마당 둘. 두 여인(女人) / 2.1 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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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 역사소설-안 휘] 동해영웅 이사부 -<04> 그림 : 문악보 화백 |
“지금 뭐라고 했느냐? 서라벌 인근까지 군대를 몰고 온 자들이 동해 앞바다 울릉도 섬놈들이었다는 말이냐? 그 야만인들이 왕국까지 세웠다고 했느냐?”
왕은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노기가 가득한 음성이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긴장이 감돌고 있는 대전에는 원종, 입종 두 왕자들과 왕의 장인인 이찬 등흔(登欣)을 비롯한 중신들이 도열하고 있었다. 중책을 맡은 귀족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이사부는 엎드린 채로 왕의 하문에 공손히 답했다.
“송구하오나, 그러하옵니다. 게다가 저들의 수장인 ‘우해’라는 인물이 결코 만만치 않은 자인 것으로 여겨지나이다.”
“음. 그렇다면 저놈들을 그냥 두었다가는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되는구나. 반드시 저들을 토벌해야 할 것이다.”
차가운 눈빛으로 이사부를 지켜보고 있던 이찬 등흔이 나서서 말했다. 일흔이 훨씬 넘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늘고 날카로웠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동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는 일은 신라국의 대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성취해야 할 과업인 바, 저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서둘러 특단의 대책을 강구함이 옳을 줄 아옵니다.”
왕은 잠시 뜸을 들였다. 바다로 나아가 벌여야 할 전쟁을 놓고 생각이 깊어지고 있는 듯 했다. 이사부는 왕의 그런 심사를 짐작했다. 왕이 다시 이사부에게 물었다.
“그래, 저들의 생업은 무엇이라 하던고?”
“동해안 일대의 백성들이 고하는 바에 의하면 저들은 원래 주로 섬 주변에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았다 하옵나이다. 수 년 전부터는 뭍에서 조업나간 우리 어부들을 공격하는 일이 간헐적으로 발생하였사옵니다. 그러던 것이 근자에는 뭍으로까지 나와 노략질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나이다.”
“저들이 고깃배를 덮쳐 어획물을 털고 뭍에서 좀도둑질을 한다는 것을 보니 그리 구족하지는 않다는 증좌로다.”
“범상치 않은 일은 또 있사옵니다.”
“그게 무엇이냐?”
“저들의 무리에 왜인들이 섞여있음이 확인되었나이다.”
이사부의 이야기를 듣자 왕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저들 무리에 왜인들이 섞여 있다? 허허 참 괴이한 일이로고. 어찌하여 울릉도 섬놈들이 왜인들과 함께 뭉쳐 다닌다는 것인고?”
“아직 확실한 내막은 알 수 없사옵니다마는, 어쨌든 왜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듯하옵니다.”
왕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또다시 잠시 말을 끊었던 왕은 지난날의 일을 꺼내어 되새겼다.
“내물(奈勿)마립간 구년 봄에 왜병 큰 부대가 서라벌로 침범해온 일이 있었더니라. 그때 마립간께서는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 토함산 아래에 열 지어 세우셨다. 그리고는 용사 일천 명을 부현(府縣) 동쪽 벌판에 매복시켜, 자신들의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오는 왜적들을 불시에 공격하여 섬멸한 일이 있었느니라.”
등흔이 찢어진 눈을 치뜨며 나서서 말을 보탰다.
“그렇사옵니다. 왜군들은 그때의 대패 이후로 여태껏 서라벌에는 범접할 엄두를 못 내어 왔사옵니다.”
“그렇다. 왜인들은 그 때의 전투에서 궤멸당한 이후로 서라벌을 두려워 해 함부로 동해안에 배를 대지 못해온 터다. 그런데, 어찌하여 울릉도에 사는 야만인들과 합세하여 또다시 이 땅을 집적댄다는 것인고?”
이사부는 마땅히 설명을 할 방도가 없었다. 실직주 군주로서 한때 울릉도를 염탐해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경험만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섬에 관하여 가능한 많은 정보를 얻고자 하였으나, 동해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 중 울릉도로 아주 살기 위해 들어간 사람들이 있다는 정도 말고는 그 섬에 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송구하오나 폐하. 소장으로서는 아직 저들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나이다. 더욱이 바다 한 가운데 홀로 뜬 섬에서 폐쇄된 생활을 하고 있는 자들인지라 저들의 실상을 낱낱이 알아내기가 수월하지 않사옵니다. 왜인들과 우산국이 어찌 결탁하였는지에 대해서도 그 내막을 소상히 알 길이 없사오나, 근자에 동해안 일대에 왜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그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여겨질 따름이옵니다.”
왕은 무릎을 쳤다.
“그래. 그러하구나. 왜구의 창궐이 우산국 야만인들과 관련이 있었던 게로구나. 왜인들이 울릉도를 디딤돌삼아 동해안 일대를 드나들며 노략질을 일삼아왔던 모양이로다. 괘씸한지고! ……아무래도 그놈들을 방치했다가는 무슨 우환이 될지 모를 터."
이찬 등흔이 다시 나서서 왕의 말을 받았다.
“그러하옵니다. 우산국과 왜구들을 저대로 두어서는 신라국의 안위가 심히 위태로울 수 있사옵니다.”
왕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나마나 저들을 치자면 충분한 전선(戰船)과 해전에 능한 수군이 있어야 할 것인 즉, 신라는 지금 바다전쟁 준비가 미흡하니 지난한 일이로고. 어찌하면 좋겠느냐?”
왕의 걱정을 잘 알고 있는 이사부는 심호흡을 했다. 선왕인 소지(炤知)마립간 십 오년 칠월에 근오지현(斤烏支縣, 오량지현烏良支縣, 포항 일원)에 임해진(臨海鎭)을 설치하고 해전 준비를 시작해보기도 하였으나, 그 뒤 시급한 일에 밀려나 수군양성은 유명무실한 판이었다.
신라에도 해전이 불가피한 상황이 대두될 것을 짐작해 이사부가 실직주 내에 설치한 선부서(船府署) 역시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 북에서 호시탐탐 남진을 노리는 고구려와, 노략질을 일삼는 말갈족에 대한 방비만으로도 벅찬 나날이었다.
“부족하나마 그동안 실직주의 선부서에서 배짓는 장인(匠人)들을 파악하고 있사오니 이를 바탕으로 하여 지금이라도 서둘러 전선을 짓고, 해전을 준비하여 우산국 정벌에 나서는 것이 옳을 줄로 사료되옵니다.”
왕은 이사부의 말을 듣고는 잠시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침묵은 한동안 계속됐다. 신료들 중에는 수군 문제와 관련하여 마땅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중신이 아무도 있지 않았다. 한참 만에 왕이 이사부를 향해 말을 돌려 물었다.
“하슬라에 주를 설치하는 문제는 매듭이 지어지고 있다하지 않았느냐?”
이사부가 왕의 물음에 공손히 대답했다.
“하슬라 일대 접경의 진지구축이 거의 완성돼가고 있사옵고, 주청도 이미 마련되었나이다.”
왕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하슬라에 주를 설치하고 북방을 튼실하게 하는 과업 또한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일이요, 울릉도 야만인들의 준동을 근절하는 일 또한 미룰 수 없는 중대사로다. 아찬 김 이사부 장군을 하슬라주 군주로 임명하여 실직주와 함께 통할하도록 임명하노라. 속히 임지에 나아가 국방을 튼튼히 하는 한편, 우산국 정벌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 하슬라주와 실직주 군사들을 모두 아울러서 전쟁준비를 마친 다음 지휘 출병하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들의 귀복을 받아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 기회에 수군을 제대로 정비하여 동해안 일대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발본색원함으로써 백성들의 고난을 해소해야 할 것이다.”
이사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왕을 향해 정중히 읍했다.
“폐하의 명을 받자와, 기필코 우산국을 쳐서 복속시키겠나이다.”
왕은 대전에 모여 있는 중신들을 향해 다시 큰 소리로 명했다.
“대소신료들은 모두 우산국 정벌에 차질이 없도록 이사부 장군의 전쟁준비 지원에 만전을 기하라.”
중신들은 모두 읍하며 대답했다.
“알겠나이다, 대왕폐하.”
이사부는 다시 한 번 왕을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
궁궐을 나서기 전 이사부는 원종 왕자의 처소를 찾았다. 원종의 낯빛은 언제나 무덤덤하여 속내를 알기가 어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분이 어떤지조차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원종 형님. 출정에 앞서 문후인사차 들었사옵니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서면서 이사부가 말했다. 원종은 예의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이사부를 맞았다.
“어서 오너라.”
그런데 방으로 들어서니 거기에는 왕의 둘째 아들인 입종(立宗, 지소공주의 남편, 훗날 스물네 번째 임금인 진흥왕의 생부) 왕자도 함께 있었다.
“입종 형님께서도 계셨군요. 그간 강녕하셨나이까?”
입종은 환한 낯빛으로 이사부를 반겼다.
“어서 들게. 이쪽으로 자리를 잡으시게.”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원종이 말했다.
“출정준비는 여의하겠느냐.”
“쉬운 과업이 아니오나 해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폐하를 닮아 장신인 원종은 이사부보다 더 큰 일곱 척 신체를 곧추세운 채 약간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울릉도에 왜인들이 들어와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왜인들이 왜 울릉도 사람들과 섞여 있는고?”
“짐작이 쉽지 않사옵니다. 다만, 숫자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왜인들이 울릉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한 듯하옵니다.”
그때 원종 왕자의 비(妃)인 보도부인(保刀夫人) 박 씨가 술상을 든 여시종과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이사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굽히며 인사를 했다.
“왕자비 마마.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보도부인은 밝은 얼굴로 이사부의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이어요, 이사부 장군.”
데면데면한 원종과는 달리 왕자비 박 씨는 이사부를 만날 적마다 늘 편안하게 대해주었다.
보도부인이 나간 뒤, 입종이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이사부에게 물었다.
“열여섯 번째 왕이신 흘해(訖解)이사금의 생부 각간 석우로(昔于路)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처음 듣사옵니다.”
“열두 번째 왕이신 첨해(沾解)이사금 때 각간 우로님께서 객관에 와 있던 왜국 사신 갈나고(葛那古)에게 ‘조만간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奴)로 삼고, 왕비는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희롱한 적이 있었지. 그런데 나중에 왜왕이 이를 듣고 격분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軍)을 보내어 금성(서라벌)을 공격해왔어. 이에 우로님께서 대전에서 말하기를 ‘지금의 환란은 제 말이 신중치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하고는 왜군진영으로 가서 ‘전날 나의 말은 한낱 농담일 뿐인데 어찌 군사를 이끌고 이곳까지 온 것인가?’ 하고 뱃심 좋게 따졌다네. 그러자 왜인들은 다짜고짜 우로님을 잡아서 땔나무를 쌓고 그 위에 올려 잔인하게 불태워 죽이고 돌아가 버렸지.”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사옵니까?”
“그런데 그 이후, 열세 번째 왕이신 미추(味鄒)이사금 때 왜국의 대신이 서라벌에 와서 문안을 했는데, 그 때 우로님의 부인이 왕께 특청을 넣어 사사로이 왜국사신을 접대하기로 하였어. 주연에서 왜국 사신이 술을 마시고 몹시 취하자, 우로님의 부인은 장사(壯士)를 시켜 그 왜국 대신을 마당으로 끌어낸 다음 불태워 죽임으로써 왜인들에게 살해당한 남편의 원한을 그대로 되갚았다네.”
“왜국이 가만히 있었습니까?”
“왜인이 분하게 여겨 그 이후 금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지.”
“그런 과거사를 처음 알게 되었나이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이사부 아우에게 들려주는지 알겠는가?”
“예. 왜인들이 그만큼 교활하고 음흉하니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는 교훈인 줄 깨닫겠사옵니다.”
“그러하다네. 이사부 아우가 잘 해낼 줄 믿지만, 조상들께서 겪은 일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유익할 것이네.”
“감사하옵니다.”
입종이 이사부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격려했다.
“전선을 지어 바다를 건너는 원정인 만큼 여간 험난한 전쟁이 아닐 것이네. 출정준비를 잘 마치고 속히 적들을 토벌하고 돌아오시게.”
“황감하옵니다, 형님들. 저들을 틀림없이 섬멸하고 울릉도를 점령하겠사옵니다.”
환히 웃으며 이사부의 무운을 빌어주는 입종과는 달리 원종은 예의 서늘하고 무덤덤한 얼굴로 이사부를 이윽히 건너다보고 있었다. 원종의 눈빛에 담긴 야릇한 냉기가 개운치 않는 여운을 남겼다.
*
궁궐을 물러나와 본가로 돌아온 이사부는 안방 아랫목에 앉은 모친에게 다가가 무릎을 맞댔다. 모친은 손을 내밀어 이사부의 얼굴을 더듬더듬 만졌다. 손의 감각으로 아들을 느끼는 마음이 간절했던지 껌벅거리는 두 눈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우산국 정벌에 나선다고 하였더냐?”
“그러하옵니다. 어머님.”
“바다를 건너가 싸워야 하는 일이니 수월치 않겠구나.”
“쉬운 전쟁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하오나 심려 마시옵소서. 소자 만난을 극복하고 반드시 승전하여 오겠나이다.”
이사부의 모친 보옥공주는 왕실의 종친으로서 내물마립간의 삼대 손(증손자)인 남편 아진종과의 사이에 이사부를 낳았다. 평생을 무장으로 살았던 아버지가 죽은 이후 어머니의 삶은 피폐했다.
모처럼 살펴본 모친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한결 더 짙어 있었다. 아들의 호언장담에도 안쓰러움이 깊었던지 어머니는 걱정을 더 늘어놓았다.
“전선을 짓고 해전을 치를 수군까지 조련해 정벌에 나서자면 공력이 많이 필요할 것 아니냐."
“아무래도 그럴 것이옵니다.”
“원종 왕자님은 만나 뵈었느냐?”
“예. 궁에서 뵙고 인사를 올렸사옵니다.”
“원종 왕자님을 잘 섬겨야 하느니라.”
어머니는 기회 있을 적마다 이사부에게 원종을 잘 모셔야 한다고 당부했다. 모친은 아들에게 서라벌에서 왕실의 일가요 귀족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찌 처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기 위해 항상 애를 썼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소자 그러면 이만 물러가옵니다.”
이사부는 모친에게 인사를 하고 안채를 나왔다.
사랑채로 건너와 자리에 누운 이사부는 눈을 감고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서 몸을 뒤척였다. 잠이 오지 않았다.
문득, 지소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불쑥 솟구쳐 올랐다. 이사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좌하고 앉았다. 만만찮은 세월이 지났건만, 도무지 망각의 그늘로 숨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쓰라린 추억이 있었다. 아득히 잊히기는커녕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새록새록 살아나는 질긴 연정의 끈을 타고 아련한 회억의 편린들이 살아나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은 때때로 이사부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마향(魔香) 같은 것이었다.
지소를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그녀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던 사자놀음이 떠오르곤 했다.
서라벌에는 명절이면 마을마다 대광주리와 삼베를 이용하여 만든 사자탈을 쓰고 춤을 추며 동네를 순례하는 사자놀이 풍습이 있다. 이사부의 나이 열다섯, 지소가 열넷이던 때였다. 동네에서 벌어지는 사자놀음이 궁금하여 구경을 나갔던 이사부는 그곳에서 우연히 지소를 만났다. 궁궐 행사에서 이따금씩 보아온 터여서 그녀가 원종 왕자의 딸이요, 자신에게는 오촌 조카뻘인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말을 붙여보지는 못하던 터였다.
사자놀음은 각각 두 사람씩 네 사람이 두 개의 사자탈 을 쓰고 풍물을 치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는 놀이다. 놀이패들은 여유가 있는 집을 찾아들어가 마당에서 한바탕 춤을 추고 논 뒤에, 그 집주인으로부터 사례로 곡물이나 금전 등을 받는다. 놀이패들 뒤에는 구경꾼 아이들이 주렁주렁 따라다닌다.
사자춤의 동작은 타령이나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다가 꼿꼿하게 높이 솟기도 하고, 앉아서 좌우로 몸을 돌려 이 잡는 시늉을 하다가 꼬리를 흔들면서 몸을 긁는 모습도 연출한다. 동과 서로 나뉘어 놀던 사자들은 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들거나 입으로 땅을 두드리고, 눈을 번쩍이며 일어나는 동작을 거듭하기도 한다. 풍류장단에 맞추어 꼬리를 휘두르고 발로 뛰며 좌우로 돌아보고, 입을 벌리고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나아가다가 꼬리를 물고 제자리에서 뺑뺑 도는 등 우스꽝스러운 춤사위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날 이사부는 흥겨운 사자놀음이 좋아서 그 뒤를 반나절이나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구경꾼 속에 섞여있는 지소를 발견했다. 지소 역시 사자놀음 구경에 흠뻑 빠져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놀음패들이 옮겨가면 그 뒤를 따라잡는 구경꾼들 속에 묻히곤 했다.
아리따운 지소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이사부는 사자놀음보다도 그녀를 바라보는 일이 더 즐거웠다. 한동안 지소를 바라보고 있다가 구경꾼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으면 그녀를 찾아내려고 군중 속을 헤집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등 뒤에서 지소가 이사부를 불렀다.
“낭두님!”
이사부가 흠칫 놀라 뒤돌아보았다.
“이사부 낭두님 맞으시지요?”
“아, 그래요. 맞소. 나 이사부요.”
지소가 한바탕 까르르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아까부터 저를 훔쳐보며 따라 다니셨지요?”
“…….”
이사부는 멋쩍게 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무안해 하지 마시어요. 소녀 역시 지난 날 궁궐에서 낭두님을 곁눈질한 적이 여러 번 있사옵니다.”
지소는 그러고는 또 한바탕 까르르 하고 웃었다. 지소의 웃음소리에서 짜릿한 전율이 번져왔다. 들을수록 어여쁜 웃음소리였다.
사랑은 그렇게 비롯되었다. 지소는 이사부를 잘 따랐다. 두 사람은 양기못(壤避池)가에서 자주 만났다. 지소는 승마를 좋아해서 이사부 못지않게 말을 잘 탔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서라벌 외곽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이 첫사랑인 줄도 모르고 둘은 만남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교제는 한 해가 넘도록 지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이사부와 만나던 장소에 지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사부는 매일 양기못가로 나가서 지소를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지소가 삼촌인 입종 왕자에게 시집을 가게 됐다는 말을 모친으로부터 들었다. 지소의 할머니이자 왕비인 연제부인(延帝夫人) 박 씨가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굳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사부와 지소는 이미 평생 지울 수 없을 깊은 연심을 가슴에 새겨놓고 있었다. 입종 왕자와 지소 공주의 혼례식에서 어린 신부는 내내 눈물을 그치지 않았고, 이사부는 먼발치에서 가슴으로 슬피 울었다.
전쟁터로 달려 나간 평도 이사부는 용맹을 다해 싸웠다. 이별의 고통을 잊기 위해 이사부는 전장에서 나날이 맹렬한 무사로 변해갔고, 연전연승을 일궈내는 장수로서 명성을 떨치며 성장했다…….
우산국 정벌의 크나큰 전쟁준비 시작을 앞둔 날의 밤은 더디게 흘러갔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 지소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혀 이사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이사부가 중군장 무덕을 비롯한 호위군사들과 함께 야시홀(也尸忽, 영덕 일원)과 고은(古隱, 영양 일원)을 지나 우진(于珍, 울진 일원)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한낮이 지나 있었다. 기별을 미리 받은 실직주 주조 도형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시옵소서, 장군! 하슬라주까지 관장하시게 되었다는 소식 들었사옵니다. 감축 드리옵니다.”
도형은 말에서 내려 이사부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했다. 이사부는 도형의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폐하로부터 각별한 임무를 받고 임지로 돌아왔으니 어깨가 무거울 따름이다.”
“소장도 넉넉히 짐작하고 있나이다. 우산국 문제에 대해 궁성에서 많은 숙고가 있는 줄 아옵니다. 장군의 명을 받자와 성심을 다하겠사옵니다.”
“고맙다. 이제부터 할 일이 태산같이 많으니 주조도 함께 고생을 해야 할 것 같구나. ……그건 그렇고, 하슬라주 국경 진지구축은 계획대로 잘 마무리되고 있느냐?”
“예. 군주님께서 하명하신대로 진지를 모두 구축하여 점고하였고, 주청도 완비하였나이다.”
“애썼구나. 오늘은 며칠 전 울릉도 해적들이 아주 달아난 해리현에서 유하면서 해안의 정황을 좀 더 살피고 내일 하슬라주로 갈 터이니 그리 알라.”
“알겠사옵니다. 해리현에서 편히 쉬었다가 떠나실 수 있도록 채비를 하겠나이다, 장군.”
실직주 주조 도형은 다시 말에 올라 앞장서서 길을 잡았다. 함께 온 수하들 중 기마병 하나가 도형으로부터 뭔가 지시를 받고는 말을 때려 번개같이 앞으로 내달았다.
동해는 언제 보아도 감동을 일깨운다. 푸른 물빛하며, 시원한 파도는 바라보는 이에게 가없는 희망을 던져주기도 하고, 때로는 아득한 그리움 속으로 끌어당기기도 한다. 이사부는 해안 길을 타고 북으로 향하면서 깊은 상념에 빠졌다. 그 상념의 끝을 잡고 풋사과처럼 싱그럽고 곱던 산단화의 얼굴이 되살아나 하얗게 떠올랐다.
세 해라고 했다. 세 해가 지난 다음에도 연심이 여전하거든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산단화는 태어나서 두 번째로 애틋한 연정을 느낀 이성이었다. 용기를 내어 데리고 떠나겠다고 찾아간 이사부를 그러나 그녀는 결국 따라나서지 않았다. 아비를 두고 당장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이라며 눈물짓는 그녀에게 이사부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딸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현덕 노인과 아비를 지극으로 섬기는 산단화 앞에서 이사부는 더 이상 욕심을 부려 우길 말이 없었다.
*
이사부와 산단화는 기이한 인연으로 만났다.
여섯 해 전 이사부가 실직주 군주로 임명되던 그 해, 신라는 아직 왕이 국호를 바꾼 지 이태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사실 서라벌 일대를 제외하면 남북 어디 한 곳도 제대로 확보가 되었다할 만한 안전한 국토가 있지 않았다.
실직주만 해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오십 육년부터 근 반세기 동안을 고구려군이 장악하고 있던 곳이었다. 이사부는 실직주 군주가 되자마자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삽시간에 적들이 버티던 요지를 모두 점령해 일대를 평정했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여전히 변방을 들락거리며 자기들 땅이라고 욱대기는 지역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말갈족 잔당들까지 수시로 침범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사부는 비바람을 맞으며 밤낮조차 잊은 채 전선을 지켰다. 한때 하나같이 나라를 칭하고 세력을 견주던 주내(州內)의 크고 작은 성읍국가(城邑國家)들과 군현들을 복속시켜 묶어내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힘도 중요했지만, 지략이 더 많이 필요했다. 산중야숙의 고통쯤은 예사였다. 천만 뜻밖의 매복을 만나는 바람에 함께 움직이던 군사들을 거의 다 잃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살아남는 것이 곧 이기는 일이었고 이기는 것이 곧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었다.
수많은 고초 끝에 어느 정도 평안을 얻은 것은 실직주 군주로 부임한지 네 해째 접어들었을 즈음이었다.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다음에야 비로소 실직주를 고구려의 침략위협으로부터 조금씩 놓여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물고기를 잡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들이 이따금씩 바다 한 복판에서 사나운 울릉도 사람들의 해적질에 피해를 입곤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어부들의 말에 따르면 울릉도 사람들은 드세고 사납기가 그지없다고 했다. 마찰이 있을 적마다 배 부리는 기술과 해전능력이 뛰어난 그들에게 번번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때로는 잡은 물고기들을 송두리째 빼앗기기도 하고, 얻어맞아 몸을 크게 상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조차 있다는 보고도 올라왔다.
이사부는 섬에 살고 있는 족속들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섬으로 가는 바다가 워낙 깊고, 뱃길을 가로막는 풍랑이 잦아 울릉도에 닿아보았다는 사람조차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 섬에 관한 더 이상의 정보를 듣기란 쉽지 않았다.
울릉도가 몹시 궁금하긴 했으나 미루어둘 수밖에 없었다. 변경(邊境)에서의 일이 여전히 아주 마음을 놓을 상태가 아니다보니 바다 건너 울릉도 문제를 염두에 두고 해결책을 모색할 여유가 있지 않았다.
*
“장군! 해리현에 거의 당도하였나이다.”
저물어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옛 생각에 푹 젖어 있던 이사부의 의식을 깨운 것은 주조 도형이었다. 멀리 마을이 보였다.
해리현 현청에 마련된 숙소에 도착하여 서둘러 지어온 저녁밥을 먹었다. 도형은 바다에서 나는 미역과 꽁치, 대게 등으로 만찬을 내어왔다. 하지만 마음이 번잡하여 몇 술 뜨지 못했다.
밥상을 물린 다음 이사부는 갑주를 챙겨 입고 혼자서 말에 올랐다.
“잠시 다녀올 터이니 따르지 말라.”
자신의 행동을 뜨악하니 바라보는 도형과 호위군사들을 뒤로하고 이사부는 말을 몰아 바람처럼 해변을 달렸다. 막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바다에는 철석거리는 파도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사부는 산단화가 살던 맹방 바닷가 마을로 갔다. 마을에는 드문드문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도주하던 울릉도 도적들의 침탈로 불이 나고 사람이 잡혀간 일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그새 다시 일상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촌주의 집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손을 봐준 사람이 없었던지, 타다 만 지붕은 물론 집안 곳곳이 지난번 어질더분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긴 마을사람들은 해적들이 불 지르거나 부수고 지나간 제 집들 돌보기에도 바빴을 터였다. 부녀가 잡혀 가고 텅 비어버린 남의 집을 살피려 들 정신이 따로 있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사부는 말에서 내려 마당으로 들어섰다.
말발굽소리를 들은 마을사람들 몇이 나와서 촌주의 집 돌담 뒤에 붙어서 눈치를 살폈다. 무장을 한 이사부의 모습이 두려웠던지 아무도 썩 나서는 이는 없었다.
“여러분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니 염려들 말고 다들 물러가시오.”
이사부는 마을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담장에 붙어있던 마을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서 돌아갔다.
주인을 잃은 집은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칠흑 어둠이 깔리면서 바다도 물거품만 희미하게 보였고,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만 시나브로 들려오고 있었다.
이사부는 낮은 마루에 걸터앉았다. 이태 전, 그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후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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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휘 소설가 |
[작가 소개]
안 휘 소설가
문학21 신인상 수상(소설)/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저서-장편소설] ‘동해영웅 이사부’, ‘이인좌의 봄’, ‘애숙의 나라’ [소설집] ‘광어와 도다리’, ‘치와와 실종되다’ [연재소설] 경기신문 ‘강남 여우’ 집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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