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소설 춘추오패] 제24회 관(冠) 끈을 잘라 사람을 살리다

인문학 / 김백 기자 / 2026-09-26 08:31:21
어둠 속 허물을 덮어준 초장왕, 관용으로 신하의 목숨과 충성을 얻다

 

 

 

어쨌든 신무의는 죽음을 각오하고 왕을 찾았다가 장자의 〈소요유〉 악곡 한 자락을 듣고 왠지 모르게 든든한 기분이 되어 물러갔다. 이런 게 시나 악곡이나 예술의 힘이다. 굳이 꼭 집어서 말하지 않아도 수긍이 가고 다시 없는 감동과 확신을 준다. 이후 또 몇 달이 지났다. 왕은 여전히 날이면 날마다 술과 여인에 빠져 있었다. 이번에는 대부 소종(蘇從)이 나섰다. 소종은 다짜고짜 왕의 면전에서 서럽게 울었다. 왕은 대충 짐작하면서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그대는 왜 우는 것이냐?”

“신은 곧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초나라도 멀지 않아 망할 것이기에, 그래서 웁니다.”

“죽다니? 그대가 어째서 죽는다는 것이며 이 나라가 왜 망한단 말인가?”

“신이 대왕께 간언하면 대전에 붙인 글귀대로 신을 죽이실 것입니다. 신이 죽는 모습을 본다면 다시는 간언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대왕께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하실 것입니다. 결국 나라도 정치도 혼란에 빠질 것이기에 그게 슬퍼서 웁니다.”

이 대목에서 왕은 버럭 소리를 높였다.

“누구를 막론하고 과인을 말리는 자가 있으면 목을 자르겠다고 하였다. 군주의 말은 곧 법이다. 그대는 죽을 줄을 알면서 과인에게 대드는구나.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이다.”

“신이 아무리 어리석다고 한들 대왕처럼 어리석진 않습니다.”

“죽을 때가 되니 못할 소리가 없구나. 과인이 어째서 그대보다 어리석단 말이냐?”

“대왕께서는 모든 백성의 어버이십니다. 이미 정(鄭)과 채(蔡)는 우리와 국교를 끊고 진(晉)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장차 닥칠 일이 눈에 선합니다. 일국의 군주가 이런 이치도 모르시니 어찌 어리석다고 아니할 것입니까? 차라리 신을 죽여주십시오. 신은 왕명의 지엄함을 알리고 역사에 충신으로 남겠습니다.”

그제야 왕이 벌떡 일어났다.

“대부는 진정하시라! 과인이 뜻하는 바가 있노라.”

당시 초나라는 씨족 사회의 전통이 남아 세습 문벌이 정치권력과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문벌을 세족(勢族)으로 불렀다. 최고의 세족을 들자면 단연코 투씨이다. 투씨가는 건국 초기부터 왕실의 동반자로 혁혁한 공을 세워 최고 관직인 영윤(郢尹, 영도성의 수장으로 재상을 겸하였다)의 자리를 세습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이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듯이 투씨가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 왕실조차 통제하기가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왕이 3년 동안 주색에 빠져 있었던 것은 비선 조직을 통해서 불순한 세족들의 실상을 살피기 위한 측면이 있다. 이제 어느 정도 피아간의 구별과 확신이 서자 초장왕은 연회와 음악을 금지하고 정사에 몰두하였다. 영윤 투월초(鬪越椒)의 세력을 일축하고 평범한 출신의 인재들을 등용하여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 집권화를 꾀하였다. 한번 뜻을 세우자 왕의 활약은 거침이 없었다. 엄격한 법을 예외 없이 적용하였고, 명문 귀족들이 전횡하던 인사 행정을 모두 빼앗아 직할 왕정 체제로 개편하는 숙청의 칼바람이 불었다. 이 일을 결행하면서 죽은 자가 백여 명이요, 새로 등용한 자가 또 백여 명이었다. 외교적으로는 송나라와 정나라의 분쟁에 개입하여 그나마 우호적이던 정과는 연합하고, 대부 위가(蔿賈)를 시켜 송을 정벌하여 속국으로 삼았다. 과연 이때부터 초나라의 세력은 날로 강성해졌다.

즉위 9년이 되던 해에는 낙수(洛水) 동쪽 정형(井陘) 땅에 있는 육혼의 융(戎)족을 정벌하게 되었다. ‘융’의 무리는 천성이 용맹하여 수시로 독자 노선을 선언하면서 도발해 온 존재이다. 정벌을 앞두고 왕은 위가(蔿賈)를 영도성에 남겨서 투월초를 견제하게 하였다.

수많은 산봉우리로 뒤덮인 천혜의 요새 육혼에는 여러 부족이 살고 있었다. 그중 세력이 큰 부족만 꼽더라도 라(羅), 박(朴), 독(督), 악(鄂), 도(度), 석(夕) 등의 저마다 다른 성씨가 독립국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칠성이왕(七姓夷王)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평지도 별반 없는 첩첩 산악 지역에서 끊임없이 약탈의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일일이 찾아서 토벌하려면 원정길은 제법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원정 중에 본국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결국 투씨 일족이 모반하였다는 것이다. 전례 없이 왕권을 강화한 데 따른 반발이다. 왕이 원정을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투월초가 위가(蔿賈)부터 잡아 죽였다. 원래 투월초는 선대 초목왕이 그의 용맹을 아껴 중용한 경우이다. 그는 두 자루 쌍철창(雙鐵戈)을 잘 썼다. 나이 이미 예순이 넘었으나 그가 쓰는 창은 하나의 무게가 팔십 근이나 되었다. 왕으로서는 육혼의 정벌보다 몇 배나 급한 일이 되었다.

부랴부랴 회군하여 반란군과 맞섰다. 왕의 군사는 투씨군과 세 번 싸워 세 번을 내리 패했다. 투월초는 전황이 유리해지자 빨리 왕을 죽여 이 내전을 끝내고 싶어 했다. 어느 순간 투씨의 전위대가 왕을 노리고 본진 쪽을 급습했다. 이들은 도끼와 짧은 칼을 써서 근접전을 주로 하는 살수 전문 집단이다.

스스로 미끼 역할을 자처하던 왕이 수레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투월초도 곧바로 그 뒤를 쫓았다. 한번 달아나기 시작한 왕은 돌아보는 일도 없이 그저 앞만 바라보고 달리고 또 달렸다. 이날의 경주는 미리 보릿가루와 말고기며 육포 조각을 비상식량으로 준비한 왕군이 유리한 싸움이다. 왕은 경릉(竟陵)의 평원을 가로질러 북쪽을 향해 끝없이 달아났다. 투월초 군사도 죽을힘을 다해 왕을 뒤쫓았다. 따라잡힐 듯 말 듯 할 때마다 왕을 돕는 군사가 있어 겨우 추격군을 벗어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이어졌다. 하룻낮 하룻밤 동안 200여 리를 쫓았으나 결국 왕을 놓쳤다.

투월초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돌아오는 길이었다. 위수강 청하교에 도달했다. 하지만 어제 건너온 다리는 성치 않았다. 일찌감치 왕군의 손에 끊어졌다. 다시 보니 강폭은 넓고 물살도 빨라 섣불리 말을 타고 건널 물길이 아니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왕을 쫓아다닌 끝이라 병사들도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이튿날 새벽 나절, 투월초는 물안개가 자욱한 강변에서 화살 비를 맞고 큰 곰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왕의 군사들은 투씨 일족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몽땅 찾아내서 죽였다.

 

▲AI 생성 이미지

 

초장왕은 투월초의 난을 진압하고 영도로 개선하였다. 공이 있는 장수와 신하에게 상을 내리고 궁중의 후원 연회장에서 성대히 개선 잔치를 열었다. 이날은 특별히 왕이 사랑하는 비빈들도 함께하였다. 왕이 말했다.

“과인이 좋아하던 악곡을 듣지 아니한 지가 6년이나 되었다. 이제 역적은 죽고 사방이 안정되었다. 오늘은 경들과 함께 마음껏 즐겨볼까 한다.”

해가 지자 연회장에는 등잔불이 켜졌다. 고래기름에 겨자를 섞어 접시에 담고 심지에 불을 밝혔다. 여름날이었기에 문은 다 열려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불은 자주 흔들렸고 밤안개가 흐릿한 가운데 주흥이 도도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왕은 사랑하는 애첩 주희(朱姬)에게 특별히 분부하였다.

“이 자리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가 과인의 수족 같은 이들이다. 그대의 섬섬옥수로 술을 따르고 잔을 권하라.”

주희가 일어나 한 대부에게 술을 따르자 다른 사람들도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연회 자리를 반쯤 돌았을 때였다. 난데없이 세찬 바람이 일더니 등잔불이 한꺼번에 꺼져버렸다. 시종들이 부산하게 불씨를 찾아 딱딱거리며 부싯돌을 쳐댔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어떤 남자의 억센 손이 슬며시 주희의 허리를 감아쥐더니 곧이어 젖가슴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여자가 엉겁결에 사내의 가슴을 밀쳐내면서, 잡히는 대로 남자가 쓰고 있던 관(冠) 끈을 잡아당겼다. 사내는 그제야 슬며시 여자의 허리를 놓고 물러갔다. 주희가 잘린 끈을 손에 꼭 쥔 채 왕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누군가 소첩을 껴안고 가슴을 만졌나이다. 첩이 그자의 관 끈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불을 밝혀 그 몹쓸 자가 누군지 살펴주세요.”

왕이 급히 분부를 내렸다.

“빨리 불을 도로 꺼라. 과인이 오늘 이렇게 연회를 베푼 것은 경들과 함께 축하하고 기뻐하기 위함이다. 경들은 거추장스러운 관 끈부터 끊어버리고 진탕 마셔라. 만일 끈을 끊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과인과 함께 즐기기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알겠다.”

발 빠르게 누군가 벌써 끈을 잘랐다.

“이렇게 말씀입니까?”

“그래, 그렇게 빨리 알아듣고 시행하는 것도 좋은 습관이 되겠지. 잘한다. 됐어!”

너도나도 저마다 끈을 뜯느라 야단이었다. 결국 주희의 가슴을 도둑질한 사람이 누군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그날 밤 거나하게 취한 왕이 어떤 알 수 없는 충동에 주희의 풍성한 젖무덤을 찾았다. 내친김에 아예 얼굴을 파묻고 이리저리 빨고 있는데 여자가 투정을 부렸다.

“대왕께서는 첩의 가슴을 훔친 자를 숨겨주었나이다. 괘씸하지도 않으십니까?”

“하하하… 방금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과인은 군신을 이간질하는 소리는 들리질 않는구나.”

훗날 사람들은 그날의 연회를 ‘관 끈을 자른 연회’라 하여 절영지연(絶纓之宴)라고 불렀다. 주희의 가슴을 훔친 대부는 끝내 밝히지 못했다. 다만 초장왕이 참전한 수많은 전쟁터에서 기꺼이 왕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친 장수와 대부 중 그날 주희의 가슴을 훔친 간 큰 사내가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한 완 (韓 莞) 작가

 

※저자 한완은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74-1982 영천시 교육청에서, 1985-2014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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