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소설 춘추오패] 제30화. 그믐날 밤

인문학 / 김백 기자 / 2026-10-17 08:35:54
그믐밤의 정적을 깨고, 출전의 명이 떨어지다
흰 수리가 내려앉은 날, 천하의 운명이 움직이다

 

 


그 무렵 필(邲) 땅의 전장에서는 양군이 대치한 가운데 싸우는 것도 아니고, 휴전한 것도 아닌, 묘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가을바람 부는 들판에 한 번씩 싸리 꽃잎이 스산하게 날릴 뿐, 20만 대군이 집결한 전장은 살기조차 없이 평온했다. 어쩌다 순찰 병졸들이 마주칠라치면 멀리서 화살 몇 발 날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갈 길을 간다. 너나없이 어떤 계기가 되면 평화협정을 맺고 전쟁을 그만둔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한 번은 초나라 군영에서 악백(樂伯)이란 장수가 군졸을 시켜 상대 장수에게 고라니를 보냈다.
“졸개들과 함께 구워 드시오.”
이튿날에는 진(晉)의 장수 위기(魏崎)가 노루 한 마리를 악백에게 보냈다. 그의 말은 이랬다.
“저들이 허세를 부리는데, 낸들 가만히 있겠느냐?”
이렇게 양군은 차라리 훈련이라도 하듯이 대치 상태를 즐기고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에 황하에 매두었던 군선 바닥이 뚫린 사실이 알려졌다. 앞으로 보급품 조달에 차질이 있겠지만 누구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양식도 충분하고 건초도 그런대로 여유가 있었다. 그날 오후에 또 한 번 소면룡 채구가 왔다. 이번에는 백여 대의 수레에 고기와 술을 잔뜩 싣고 있었다.
“우리 대왕께서 먼 길 달려온 대국의 군사를 위로하시는 술과 고기를 보내시었소.”
총수 순림보는 일단 흡족한 마음으로 선물을 받았다. 이런 대치 가운데서 술과 음식의 제공은 서로가 위신을 상하지 않고 군사를 물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는 채구가 무슨 협상안을 들고 왔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채구는 다른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웃는 얼굴만 보이다가 돌아갔다.
“이자의 별명이 소면룡(笑面龍)이라지?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구나. 협상을 하겠다는 말인가? 말겠다는 건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참으로 뜨뜻미지근한 인물이구나.”
그날 해거름에 초나라 진중에서는 사건 하나가 있었다. 왕이 진중을 순시하고 있을 때였다. 머리 위에서 높고 우렁찬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군사들이 햇빛을 피해 실눈을 뜨고 올려다보니, 마치 태양으로부터 날아온 듯 흰 수리 한 마리가 날개를 넓게 펼치고 선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수리가 빠른 속도로 왕에게 내려꽂힐 듯 달려들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누구도 미처 활을 당길 새가 없었다. ‘아아…저런 저런!’ 장졸들은 저도 모르게 경악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반전이 일어났다. 맹금의 기세로 내리꽂힌 매는 한두 차례 날개를 퍼덕이더니 왕의 왼편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제껏 그렇게 크고 하얀 수리를 본 군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돌연변이였을까? 인간의 속세와 하늘의 세상을 헤집고 다니면서 전령의 역할이라도 하는 특별한 날새의 존재일까? 왕은 평소에도 매사냥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 날짐승은 그런 사냥매와 크기부터 엄청나게 달랐다. 다행히 왕은 어깨 넓은 갑옷 덕에 수리의 발톱을 지탱하고 있었다.
군사들 사이에서 와아! 찬탄의 외침이 터졌다. 그들이 올려다보는 위치에서 왕의 실루엣은 수리와 한 몸이 되어 태양을 등지고 있었다. 바야흐로 어깨 위에 맹금과 태양을 이고 군림하는 천신(天神)의 모습이었다! 순간 누구랄 것 없이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대로 넙죽 바닥에 엎드려서 절규처럼 외쳐댔다.
“아! 아아, 대왕! 대왕.”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수리는 한순간 목을 쳐들어 크게 울고는, 노을 지는 서편 하늘을 향해 휘영청 날아갔다. 또 한 번 장졸들의 가슴에서 감격의 울림이 터졌다.
“허어! 참으로 괴이한 일이로다!”
“이런 일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다.”
“과연, 과연! 우리 대왕은 천신(天神)이 강림하신 게야.”


▲AI 생성 이미지.


그날 밤은 마침 그믐날 밤이었다. 중원 사람들은 그믐날 밤에는 천지사방의 뭇 귀신이 출몰한다고 믿었다. 때로는 절절한 원한으로, 어쩌면 생전에 못다 푼 욕망의 잔불 때문에, 혹은 주체할 수 없는 장난기로 인간들에게 재앙을 선사하기 위해서 준동하는 날이다. 이 무서운 날에 거의 모든 경제 활동은 중단되었다. 사람들은 일과 여행을 뒤로 미루며, 배는 부두에 묶인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사람들도 귀신에게 씌우지나 않을까 서둘러 밭일을 마치고 집안에 은둔했다. 전쟁 중에도 그믐날에는 군사를 움직이는 일이 없었다. 그런 데다 마침 오늘은 상대 진영에서 술과 음식까지 보낸 마당이라 한결 마음이 풀어지고 경비도 소홀하였다.
그런데 남방 초나라 측의 분위기는 아주 딴판이었다. 달빛조차 없는 그믐밤은 그들에게는 축제의 날이었다. 젊은 남자들은 힘을 겨루는 격투를 벌이고, 또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청춘의 남녀가 함께 밤을 새우며 사랑을 나누는 환락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랑캐로 불린다. 광장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진다. 청년들은 문신이 요란한 가슴 앞에 악어 이빨 목걸이를 늘어뜨려 예쁜 여인들을 유혹하고, 씨름판 옆에는 예외 없이 무희들의 춤판이 벌어졌다. 젖가슴을 드러낸 채, 머리에는 억새풀을 꽂고, 허리에 풀 치마를 두른 젊은 여인들이 실룩실룩 엉덩이를 흔들고 추파를 날렸다. 초나라 춤(楚舞, 초무)은 남방 특유의 정서를 관능적인 표정과 동작으로 엮어내고 초나라 노래도 애절한 가락으로 사랑을 받았다. 그믐밤이 사람들을 더욱 달뜨게 하는 것은 밤새도록 마음껏 흥을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남녀가 경쟁적으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얻기 위해 서로를 유혹하고 그 도전과 선택에 몸을 맡기는 행위가 용인되었다. 남편 있는 여자가 한눈을 팔아도 남편만 문제 삼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았고, 배우자 없는 미혼녀인 경우는 더욱 처신이 용이했다.
그 밤은 별도 없었다. 초저녁부터 구름이 잔뜩 끼더니 어느덧 작은 별빛 하나도 허락지 않고 사방 천지를 암흑 속에 가두었다. 어둠이 내리자 왕이 직접 단위 부대의 대장들을 불렀다. 대낮같이 횃불을 밝힌 왕의 막사에, 땀 냄새, 가죽 냄새, 말똥 냄새를 풍기면서 장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오늘 낮에 있었던 흰 수리의 기적은 사람들을 경외감에 빠뜨렸다. 불가사의하고 충격적인 흰 수리로 다소 풀어졌던 전장의 공기가 확 바뀌었다. 어쩌면 이 전쟁에 대한 하늘의 계시가 내린 것일까? 새삼 대왕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에 숨 막히는 긴장이 감돌았다. 왕은 관솔 불빛에 번들거리는 젊은 장수들의 상판을 묵묵히 훑어보더니 대뜸 이름 하나를 불렀다.
“악백! 악백은 어디 있는가? 당장 앞으로 나서라!”
대왕의 목소리는 완급과 리듬이 있었고 어떤 질책을 느끼게 하였다. 악백은 뜻밖에 자신의 이름을 호령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황급히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소장 악백, 대령이요!”
“그대가 며칠 전에 고라니 한 마리를 적진에 보냈다지? 왜 그랬는가? 그들은 우리를 얕보고 있다!”
“그, 그게, 잘난 척하는 꼴이 아니 꼽기에‧‧‧”
악백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렸다.
“너를 선봉에 명한다. 적의 진영에 불길이 솟으면 군사 5천을 이끌고 인정사정없이 적진을 짓밟아라!”
순간 사람들이 얼어붙은 표정으로 왕을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대왕이 일전을 불사하기로 마음을 굳혔을까? 덜그럭거리는 갑옷을 껴입은 장수 백여 명이 모여 있었지만 조그만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들 침 한번 삼키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당사자인 악백은 가슴이 벅차오르고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대왕이 누구보다도 먼저 이 몸을 찾으셨다! 악백은 허리를 펴면서 당당하게 외쳤다.
“다시없는 영광, 소장! 수명이요!”
그동안 쌍방에서 자잘한 마찰이 있었으나 하나같이 우연한 충돌이었다. 오히려 적을 눈앞에 두고 울컥벌컥대는 장졸들을 달래는 것이 큰 골칫거리였다. 이번 전쟁의 행태에 대해 불만이 있던 장수들은 이제야 왕의 결심을 깨닫고, 너나없이 질책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자염백 손숙오의 놀람이 컸다. 그는 그동안 주로 협상을 입에 담았다. 대왕도 딱히 어느 쪽으로 기운 것이 아니어서 긴가민가하였는데, 이제야 안개가 걷히듯 왕의 뜻을 알았다. 그래! 그랬었구나. 평소 대붕의 전설을 입에 올리시던 대왕이 아닌가? 내가 이제껏 나이를 헛먹었구나! 저도 모르게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소장 휘하에 일족의 청년 장수들이 있으니 이들도 선봉에 두게 하옵소서!”
“그것도 좋을 것이네.”
왕은 싱긋 웃으며 영윤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이어서 소맷자락에서 미리 준비된 죽간을 끄집어낸다. 순간 반사적으로 고개를 빼들고 죽간을 곁눈질하던 장수들은 불경스럽다는 생각에 하나같이 고개를 숙였다. 희미한 야전의 불빛보다 왕의 눈빛이 더욱 활활 타올랐다. 이내 차곡차곡 호명이 시작되었다.
“부방(傅方)!”
“옙!”
“호수(胡修)!”
“옙.”
“너희도 악백을 따르라. 이 싸움에는 중군이 없다. 너희가 중군이다. 선봉을 받치는 데 한 치의 어긋남도 없도록…!”
“옙, 옙.”
“이담(李覃)과 잔잠(棧潛)은 어디 있느냐?”
“옙, 옙….”
“다음으로 왕관(王觀)! 육무쌍(坴無雙)!”
“옙, 예옙….”
“너희는 우익을 맡아라. 개활지를 건너 적진 좌익을 한달음에 들이친다. 이번 싸움은 속도전이다. 단박에 몰아쳐야 한다. 적진을 먼저 넘는 장수는 상을 내릴 것이야!”
이름이 불린 장수들은 비로소 질책에서 벗어난 해방감과 함께 가슴 뿌듯한 긍지를 느꼈다. ‘대왕이 잊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양손을 맞잡아 군령을 올리고 바삐 자신의 부대를 위무하러 떠났다. 평소 왕은 사나운 매를 길들이듯이 장수들을 키워왔다. 큰 싸움에 임해 매들을 굶긴 셈이다. 남은 장수들도 ‘내가 이 싸움에 빠져서야…’ 왕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긴장 속에서 손꼽아 기다린다. 왕은 남은 장수들의 이름을 아낌없이 불러댔다.
“순위(荀緯)! 왕상(王象)! 환범(桓範)!”
“옛. 옙…….”
“대릉, 문흠, 상조, 왕쌍! 동파(董巴)도 나서라.”
“옙. 옙. 옙.”
“너희는 좌익이다. 갈대밭에다 군데군데 늪이 있는 습지이다. 군사들에게 한 포대씩 흙을 들게 하라. 물구덩이를 만나면 자루째 던져 메우면서 돌진한다. 병거는 필요치 않다. 장수는 말을 타고 나머지는 도보로 출전한다. 나가라! 용맹을 보여라!”
“옙! 옙!”
“우앗! 우압!”
이름이 불린 장수들은 하나같이 오른쪽 어깨를 비틀어 불쑥 내밀면서 밀림의 언어로 대답했다. 왕의 귀에 그 고함은 ‘악! 악!’으로 들렸다. 부지불식간에 상체를 뒤트는 조상들의 몸짓도 그대로였다. 다들 모처럼 용맹을 떨칠 기회가 왔다고 짝짝이 갑옷을 걸치고 투구의 목 끈을 졸라맨다. 순식간에 진중 분위기가 터질 듯이 팽팽하였다.

 

▲한 완 (韓 莞) 작가

 

※저자 한완은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74-1982 영천시 교육청에서, 1985-2014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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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 /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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