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책] 『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 -최대환

문화·예술 / 안재휘 기자 / 2026-03-01 23:29:11
"죽음을 준비하는 유일한 방법은 '좋은 삶' 살기"
"삶의 유한함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삶을 더 소중히 여기길"

 

   

"지금 죽어도 허무하지 않을 것인가?"

 

20년쯤 전 독일 뮌헨의 예수회 철학대에서 연구하던 30대 초반의 최대환 신부는 어느 날 아침 공원에서 조깅하다 느닷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에 얼어붙었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평소 생각지 못했던 낯선 질문에 "절벽 위에 서서 심연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들었다는 최 신부는 그날의 강렬한 경험이 철학을 평생의 동반자로 삼게 된 계기가 됐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천주교 의정부교구 소속 사제이면서 가톨릭대 신학과 겸임교수로 철학을 가르치는 최 신부가 '죽음'을 키워드로 한 철학 교양서 '좋은 삶을 위해 죽음을 묻다'(어크로스)를 펴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부터 단테의 '신곡',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파스칼의 '팡세' 등까지 고대 철학과 고전들이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을 친절하게 설명한 책이다. 죽음이라는 인류의 영원한 수수께끼를 놓고 먼저 치열하게 사유했던 옛 사상가들의 성찰 속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지혜를 길어낸다.

 

책 출간에 맞춰 지난달 26일 서울 명동대성당 인근에서 만난 최 신부는 "죽음을 준비하는 유일한 방법은 '좋은 삶' 살기"라며 좋은 삶을 위해,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열린 마음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음은 최 신부와 일문일답.

 

-- 조깅 중 떠오른 질문이 왜 그렇게 강렬했을까.

 

그때가 청년기를 막 마칠 때쯤인 것 같다. 신부라는 신분 자체가 특별해 보일 수 있지만 나름대로는 평탄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런 질문이 떠올라 당황스러웠다. 아마도 당시 그 질문이 강렬했던 것은 '지금 죽으면 허무할 수도 있겠다'는 게 전제가 돼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 질문 자체가 나에겐 껍데기를 깨는 경험이었고 그 이후로 인간의 행동이나 윤리, 죽음이나 운명 등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

 

-- 사제로서 명확한 기독교적 사생관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옛 철학자나 작가들의 사생관이 그와 충돌하는 지점은 없었나.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이전의 모든 고대 철학은 그리스도교적 철학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생기고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그리스 철학을 많이 받아들였고, 그리스도교 사생관과 플라톤의 생각 등이 통하는 부분이 많다. 죽음을 자연적 현상으로 접근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심이 없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그리스도교와 많은 차이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죽음 후 영속적 삶에 희망을 두지 않고도 죽음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길을 보여줬다. 모든 철학자에게서 배울 만한 지점이 있기 때문에 종교와 무관하게 그들의 사상을 적절히 가져와 자신이 소화를 시키면 된다.

 

-- 그래서인지 이 책도 종교적인 색채는 진하지 않은 것 같다.

 

신자를 대상으로 썼다면 죽음 다음의 부활 등을 얘기했을 것이다. 그런 종교적 믿음이 없더라도 삶이 끝나는 순간 '이렇게 죽어도 허무하지는 않겠다'는 마음이 들면 그 이후부터는 죽음 이후에 대해 열린 마음이 되는 것 같다. 결국 훌륭하게 삶을 잘 살아낸 사람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희망이 종교를 막론하고 맞닿아 있는 지점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고대 철학으로 말하자면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사추덕(四樞德)을 갖춘 삶이다. 자신이 가진 좋은 것들을 잘 발전시키고, 그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뭔가 기여하는 삶을 살면 크게 후회는 하지 않지 않을까 한다. 키케로는 죽음을 '다 무르익은 사과가 저절로 떨어지는 것'에 비유했다. 열매를 내놓은 나무가 아쉬워하지 않듯 자기 삶의 결실을 내놓으면 죽음 앞에서 아쉬울 게 없다.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회한이 남고 죽음이 더 두려워질 것이다.

 

-- 아무 결실도 내지 못했다고 느끼면 어떡하나.

 

보이는 것만이 결실이 아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고 회한이 남을 수 있지만, 이를 인정하면서도 삶에서 잘한 부분도 찾아내 스스로의 삶과 화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삶이라는 게 수학 성적처럼 눈에 보이게 쌓이는 게 아니다. 마지막 순간에라도 삶에 대한 깨달음이 온다면 그 순간부터 좋은 삶이라 할 수 있다.

 

-- 가톨릭대 의대 생명대학원에서 '죽음 이해' 강의를 하고 있는데 반응은 어떤가.

 

특수대학원이라 호스피스나 생명윤리 등에 관련된 분들도 많이 들으신다. '생명' 대학원인데 왜 '죽음'을 얘기하느냐는 질문도 받은 적 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 꺼리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죽음이라는 주제를 품지 않으면 생각이든 배움이든 어느 한 단계를 넘어가지 못하고,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좋은 삶을 위해서라도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으면 한다.

 

-- '지금 죽어도 허무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지금 답해야 한다면.

 

허무하지 않을 것 같다. 허무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평생 따라다닐 질문이지만, 20년 전과 달리 지금은 그런 질문에서 도망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 삶을 허무하지 않게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인생의 매 순간 선택을 한다면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유한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 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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