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그날은 지옥 같았다. 제원역에 모여 있던 농민들이 쳐들어왔다. 죽창과 낫 쇠스랑을 들고 금산 읍내로 난입했다. 향리들은 물론 관아까지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많은 사람이 다쳤다.--
--임한석이 난데없이 나타났다. 쌍욕을 퍼부어댔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일하던 일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김석순을 에워싸더니 닥치는 대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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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 연재소설-이성수] 칠십일의 비밀 -<01> |
날아갈 것만 같았다. 휘황찬란한 새벽이었다. 억수같이 내리던 비가 뚝 소리를 내며 그치는 것 같았다.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던 구름이 순식간에 흔적 없이 사라지고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어 집채만 한 해가 검붉은 쇳물을 뒤집어쓰고 머리를 내밀더니 능선 위에서 펄펄 끌었다.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근래 들어 가장 영롱하고 아름다운 일출이었다. 하늘이 공문제(‘영감잔치’라고도 하며 부보상 신·구 접장의 이·취임식)를 축하해 주느라고 날이 활짝 갠 것으로 여겨졌다. 임한석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없었다. 무려 보름 만에 보는 태양이었다. 하늘이 찌푸렸다가 활짝 갠 끝이었다. 산야가 유난스레 맑고 따사로웠다. 명주바람이 살랑거렸다. 옷을 걷어 올린 팔뚝에 바람이 스치면 기분이 저절로 상쾌해졌다. 남산자락이 철쭉꽃으로 온통 붉었다. 녹색 옷으로 갈아입은 진악산도 생기를 뿜어내며 힘자랑이 한창이었다. 마치 칼이라도 휘두를 기세였다. 객사를 가슴에 품어 안은 조종산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애초에는 삼월 보름에 맞춰 개최하려고 했었는데 미뤄지게 되었다. 전주에 있는 도반수 송봉호까지 직접 내왕했다. 이것저것을 따져보고 성대하게 치루라며 금일봉까지 하사했다. 근 한 달 동안이나 준비한 잔치였다. 금산 부보상이 속한 전라도 전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충청도와 경상도에도 통문을 돌렸다. 미처 통문이 당도하지 못한 곳에서도 소문을 들은 부보상(‘보부상’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명칭)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길을 일찍 잡아 몰려온 꽤나 많은 부보상들이 동구 밖에 모여 있었다. 환의(부보상끼리 서로 옷을 맞바꿔 갈아입는 풍습)를 하고 꽹과리와 징 북 등을 두드려 질구락(행진곡)을 즐기며 잔칫날이 다가오기를 학수고대했다. ‘갱 갱 겍 개개갱 겍, 개갱 갱 께 갱 개개갱…….’ 부보상들의 질굿(질구락의 다른 표현)은 더없이 흥겹고 즐거웠다.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려지고 쌓인 피로가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맘껏 즐기는 잔치였다. 주최 측에서 내오는 산해진미까지 넉넉하여 마치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모두가 몸과 마음이 한껏 들떠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사흘만 지나면 잔칫날이었다. 여전히 많은 부보상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족히 5백 명이 넘을 것 같았다.
돌아보면 그날은 지옥 같았다. 제원역에 모여 있던 농민들이 쳐들어왔다. 죽창과 낫 쇠스랑을 들고 금산 읍내로 난입했다. 향리들은 물론 관아까지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많은 사람이 다쳤다.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갚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섣부르게 나설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근 20여 일 동안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참아냈다. 하찮다고 여겼던 농민들의 모습은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구나 당황스러웠다. 본래 농민들은 모래알 같았다. 좀처럼 한데 뭉치지 못했다. 세상 물정에도 어두웠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잘 몰랐다. 순진하고 무지했다. 요리하기에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 농민들이 달라져 있었다. 깜짝 놀랐다. 울분을 맘껏 쏟아내고 있었지만 행동이 일사불란했다. 질서가 정연했다. 규율이 잘 잡힌 훈련된 군인이었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움직였다. 부상들은 내로라하는 왈패하고 맞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대부분 일당백을 해낸다. 그런 부상들이 일거에 제압되었다. 임한석은 수하들을 믿었다. 그런데 목숨을 잃을 뻔했다.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농민들은 용감했다.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었다.
부보상들은 규율이 엄하기로 유명하다. 풍찬노숙하며 고생을 함께하는 처지라 형제보다도 더한 동료애로 뭉쳐있었다. 서로를 위해서라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관아마저도 부보상들의 결속력을 예의주시하는 지경이었다. 기습으로 당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패인은 아니었다. 항상 습격에 대비하는 부보상들이라 재빠르게 대응했었다. 그러나 농민들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에 눌리고 말았다.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맥없이 도망치기에 급급했었다. 갑작스럽게 생긴 농민들의 괴력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괴력이 생겼는지 궁금하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알던 농민들은 별것 아니었다. 아무리 많은 농민이 모여 있어도 기가 센 부보상이 나서 윽저리면 삽시간에 제압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들이 똘똘 뭉쳐서 바위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접주라고 불리는 이야면의 명령하나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죽기를 각오한 눈빛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수십 년 동안이나 생사를 같이 해온 부보상들보다도 상하가 분명했고 짜임새가 있어서 약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쳐들어가 박살 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덤빌 일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통문을 돌려 많은 부보상들을 불러 모아 놓았다. 실행에 옮기는 것이 머뭇거려졌다. 괴력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괴력의 정체를 알아내고 방책을 마련하느라 임한석은 참고 또 참았다. 절치부심했던 20여일이었다. 이제 공격하는 일만 남았다. 회소가 설치된 방축리로 염탐꾼을 보냈다. 농민군의 동향을 시시때때로 살폈다.
이제 의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부보상들의 사기를 북돋워 놓고 여세를 몰아 쳐들어가면 된다. 장시의 이곳저곳에 부보상들을 수백 명이나 배치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공격에 대비해 놓았다. 걸림돌은 없다. 지난번 당했던 치욕과 굴욕을 백배 천배로 되갚아주면 된다. 벌써 부보상들은 지난 일을 떠올리며 안달이 나서 결기를 부렸다. 오직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태양이 산 능선을 멀찌감치 따돌려 놓고 빛났다. 이제 곧 잔치가 시작된다. 새벽까지도 으르렁대던 하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구름 한 점이 없다. 날씨가 유난스레 맑고 밝다. 포근하기까지 하다. 임한석은 하늘도 공문제를 축하해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 같았다.
“수향아!”
“들어오라고 허겠구만요.”
임한석의 기분은 어느 때보다 좋아 보였다. 다른 때 같으면 초동을 보내 지시를 내렸을 일이다. 그런데 얼굴에 웃음기를 가득 담고서 직접 동몽청으로 왔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수향은 의도를 헤아려 보려고 하는 말이었다.
“아니어 내가 그리 갈 것인 게 그리 알아.”
임한석 답지 않았다. 그는 한때 관속이었다. 관속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가업이다. 고을 수령마다 천차만별이었다. 그런데도 임한석의 집안은 수령을 잘도 구워삶았고 그들을 이용해 세도를 부려왔다. 웬만한 사람하고는 어울리지 않았다. 안하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부보상들에게 신표(부보상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으로 험표라고도 함)를 직접 건네주겠다는 말이었다.
“접장나리께서요?”
평소였다면 되묻는 것만으로도 치도곤을 치를 일이었다. 건성으로 듣는다며 꼬투리를 잡아 매질을 당했을 것이다.
“혹시 못 온 사람 있냐?”
“…….”
임한석의 태도가 평소와 너무 달랐다. 수향은 어찌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눈치 살피기에 바빠 우물거렸다. 이 또한 불호령이 떨어질 일이었다. 그렇지만 임한석은 얼굴에 웃음을 담아 말을 이었다.
“못 온 사람한테는 니가 전혀라.”
본래 금산임방(任房 조선 후기 각 군·현 단위로 조직된 부보상 조직)의 접장은 부보상들이 권점(투표의 일종)하여 선출하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임한석은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본래 접장이 되겠다며 세 명이나 나섰었다. 그리고 대립하여 격렬하게 싸우기도 했다. 그렇지만 임한석의 등장으로 모두가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임한석의 위세에 눌려 그렇게 되었다. 이미 접장으로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재임하고 있는 접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명색일 뿐이었다. 임한석은 이미 접장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접장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기막힌 나날이었다. 앞길도 뒷길도 막혀버린 진퇴양난의 세월이었다. 그 세월은 구사일생으로 용케 건너온 험난한 바다와도 같았다.
한 손으로도 너끈하게 들 수가 있는 보따리였다. 그런데 뱃삯이 인삼 두 가마니보다 더 비싸다고 했다. 아무리 봐도 터무니없는 뱃삯이었다. 한두 번 보았던 일은 아니었다. 따지기는 했었다. 그래 봤자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 사람만 물정 모르는 바보가 되었다.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횡포였다. 그렇기에 김석순의 목청이 높아지고 말이 많아졌다.
- 요 보따리 한 개가 인삼 한 지게보다 더 비싸다요? -
- 나는 몰러. 시키는 대로 하는 겨. -
선주가 잘 모른다고 잡아떼고 있었다. 횡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애써 얼버무리느라고 쭉 찢어진 작은 눈을 일부러 억지스럽게 치켜뜨고 부라렸다. 말을 더 붙이지 못하도록 짜증을 내고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따졌다가는 참지 않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 선주가 모르면 누가 알아요오? -
이름만 선주였다. 뱃길을 이용하는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제원역을 드나드는 선박 대부분이 김원택의 것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놓지를 못했다.
- 실을 겨? 말 겨? -
선주가 김석순의 얘기를 짓뭉개놓고 윽박지르듯 말했다. 더 이상 따지지 말라는 뜻이었다.
- 관아로 가서 따져야것구만. 참! -
김석순은 너울가지가 좋은 사람이었다. 웬만해서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남이 싫어하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존심과 의협심은 그 누구 못지않았다. 그동안은 선주의 횡포를 참아 넘느라고 애를 먹었다. 하지만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 저 놈이 죽을라고 환장했구나. 저놈 입을 쫙 찢어야 쓰것다. -
임한석이 난데없이 나타났다. 쌍욕을 퍼부어댔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일하던 일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김석순을 에워싸더니 닥치는 대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고 보니 부보상들이 제원역에 쫙 깔렸었다. 김석순은 입술이 터지고 눈두덩이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얼굴을 가리면 옆구리와 가슴으로 날아들고 옆구리와 가슴을 가리면 얼굴로 날아들었다. 부상들의 주먹질이 임한석의 눈치를 살펴 가며 더 거세지고 독해져 갔다.
- 아이고. 사람 살려주씨요오! -
누구 한 사람도 말리려 들지 못했다. 자신에게 불똥이라도 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 나설 생각조차 못했다.
- 헛소리하면 이리 되니께……거시기들 허지 말어. 다들 잘 봤제? -
김석순의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멍이 들고 찢어졌다. 주먹질에 견디다 못해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임한석은 상관하지 않았다. 김석순을 일으켜 세워놓고 목청을 높였다. 본때를 보이겠다며 다시 한번 윽박았다.
- 분수를 모르고 날뛰면 이렇게 되니께 명심들 혀. -
제원역에는 역참이 있고 부두도 있었다. 사통팔달의 고을이었다. 금산은 물론 고산과 무주 용담 영동과 옥천 등 근처 고을의 물산과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장시가 크게 열리는 곳이었다. 황석강(지금의 금강 상류) 뱃길을 이용하여 큰 짐을 손쉽게 강경포와 군산포로 나를 수가 있었다. 장날뿐만이 아니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런데 마침 장날이기까지 했다.
한낱 부보상인 임한석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선주를 제쳐놓고 여봐라 하며 법석을 떨었다. 십여 명이나 달려들었다. 누가 봐도 너무 했다. 주변의 사람이 몰려들었다. 수십 명이 둘러싸고 구경했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도 나서지 못했다. 모두가 임한석의 서슬에 짓눌려 있었다. 더군다나 부보상들의 뒤에 구실아치와 재지사족(향촌사회에 머물러 있던 지식계층)들이 버티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불똥이라도 튈까 봐 곁눈으로만 쳐다 볼 뿐 어찌해볼 생각조차 못했다.
- 틀린 말도 아니구만 너무 허네 그려 -
김치삼이 별안간 끼어들었다.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얼토당토 않는 처사였다. 선주와 부보상들이 지나친 것이다. 물론 자신도 터무니없는 뱃삯에 불만이 많았다. 따져볼 용기가 생기지 않아 못 본체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덤벼들었다. 그것도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마구잡이로 발길질과 주먹질을 했다. 마치 죽이려 드는 것 같았다. 가만히 두고 보았다 가는 사람이 맞아 죽을 것 같아 무작정 끼어들고 본 것이다.
- 저 새끼는 또 누구냐? 저 새끼 입도 찢어야 쓰것다. -
임한석이 이때다 싶게 제원역이 쩌렁거리도록 고함을 내지르며 부상들을 다그쳤다. 잘 걸렸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잖아도 본때를 보일 사람이 더 필요했다는 태도였다.
- 아이고. 나죽네. 사람 살려요오! -
좀 전 김석순이 당하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앞 다투어 덤벼들어 마구잡이로 주먹과 발길을 휘둘렀다. 김치삼은 몸집이 좋고 날렵했다. 하지만 어찌해볼 만한 겨를이 없었다. 그마저도 견디지를 못했다. 비명을 내지르며 고꾸라졌다.
<0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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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수 소설가 |
[작가 소개]
이성수 소설가
아호 쾌술(快述)/전북 고창 출생/한국문인협회 회원/수원문인협회 소설분과 위원장/한국소설가협회 회원/소설동인회 스토리소동 회원/장편소설 '꼼수', '혼돈의 계절', '구수내와 개갑장터의 들꽃', 칠십일의비밀' 외 단편소설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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