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정치인보다 유권자가 깨어나야 한다.

사상과 철학 / 안재휘 기자 / 2026-04-18 08:56:45
364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평화를 깨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말해서' 라는 발언은 관계를 망가뜨리기 쉬운 말이다
가치 있다고 상대에게 함부로 충고하거나 '지적 질'하는 것은 좋지 않다.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진실은 좋지만, 사랑이 더 좋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수녀회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기

 

 

 

1

오늘이 벌써 41일로 만우절(萬愚節)이다. 악의 없는 가벼운 거짓말로 서로 속이면서 즐기는 날이다. 언젠가부터 삶이 더 팍팍 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면서, 우리의 만우절은 그냥 지나가는 듯 하다. 프랑스는 매년 41일에 어른이나 아이들이 농담과 장난을 하거나, 물고기 모양의 초콜릿을 주고받는다. 영어로는 April Fool's day(4월 바보의 날)이라고 하고, 프랑스어로는 Le poisson d'avril(4월의 물고기)라고 한다. 이름에 걸맞게 프랑스에서는 이날 종이로 물고기를 만들어 친구나 선생님 등에 몰래 붙여 놓는 장난을 쳤다.

 

 

 

프랑스에서는 1564년까지 한 해의 시작이 41일이었다.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바꾼 샤를 9세 때 새로운 달력이 생겨나고 이 때부터 11일이 새해 초가 되었다, 1565년의 11, 프랑스 인들은 희망찬 한해를 기원하고 선물을 주고받으며 새해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정작 41일이 되자 사람들은 예전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그냥 조용히 지내기에는 허전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물을 준비하되 정말 값진 선물이 아닌 웃음을 자아내는 가짜 선물을 주고받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새학기에 갓 적응하고 있는 학생들이 서로 장난치고 깔깔대면서 서로 부쩍 친해지는 계기가 되는 날이기도 한다. 프랑스 거리의 초콜릿 가게에서는 가지각색의 물고기 모양 초콜릿과 디저트가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물론 만우절이니 만큼 웃음 터지는 거짓말도 빠지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이 날 방송이나 신문에서도 유쾌한 거짓말을 치곤 한다. 이런 식으로, 사는 데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41일의 만우절은 없다.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4월에는/목필균

 

축축해진 내

마음에

아주 작은 씨앗

하나

떨구렵니다

 

새벽마다

출렁대는

그리움 하나

 

연둣빛

새잎으로

돋아나라고

여린 보라

꽃으로

피어나라고

 

양지쪽으로 가슴을

열어

떡잎

하나 곱게 가꾸렵니다.

 

2

‘4을 뜻하는 영어 'April',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그래서 4월은 아프로디테의 달이다. 실제 4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온갖 화사한 꽃들이 만발하고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4월이 아름다움의 여신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것 같다. 그리고 4월하면, 시를 좋아하는 나는, 영국 시인 엘리엇의 <황무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쓰고 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

 

"잔인한"? 4월이 잔인한 것은 마치 겨울잠을 자듯 자기 존재를 자각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을 뒤흔들어 깨우는 봄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 아침 사진처럼 말이다. 엘리엇은 봄비가 잠든 식물 뿌리를 뒤흔드는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며, 망각의 눈()으로 덮인 겨울이 차라리 따뜻하다고 했다. 얼어붙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에게 약동과 변화를 일깨우는 봄의 정신이 숭고하면서도 잔인하기 때문이다.

 

4월이 잔인한 달인 이유는 자연이 매일매일 자신을 변신시키지만, 인간은 주저하고 안주하고 편함에 취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낙엽들을 헤치고 삐쳐 나오는 풀잎들은 현재에 안주하는 법이 없다. 항상 자신이 변화해야 할 모습으로 변한다. 만일 내일도 이런 모습을 간직한다면, 그 풀잎들은 죽은 것이다. 자신이 되어야만 하고 될 수 있는 모습으로 매 순간 변한다. 이런 식으로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은 그 개체만의 고유한 성격이 있어, 인간을 제외한 동물과 식물은, 그 고유한 특징을 시간과 계절의 흐름에 맞추어 조화롭게 변신한다. 그 속도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정도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모든 인간이 세상에 다른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 신분은 공동체인 도시에서 자기 나름의 고유임무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각자 그 고유 임무에 따라 각자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를 그리스어로 '아레테'라 한다. 우리는 흔히 이걸 덕()으로 번역하지만, 이해가 쉽지 않은 단어이다. 아레테는 그리스 어에서 ', 탁월함, 남성다움, , 용기, 성격, 명성, 영광, 위엄'이란 의미 뿐만 아니라, '기적, 경의, 경배의 대상'이란 의미도 있다. 이 다양한 의미를 지닌 단어들의 공통점은 '고유(固有)'이다.

 

우리 모두는 고유(固有)하기 때문에, 세상에 하찮은 일은 하나도 없다. 어떠한 일을 하든, 진심으로 헌신하고 노력한다면, 그 일은 세상에서 가장 고유하고 귀중한, 즉 고귀(高貴)한 일이 된다. 어제 카톡에서 읽은 이야기이다. 내가 직접 검증한 것이 아니라, 그렇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라 공유한다.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게 해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제 아침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반복해 본다.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다.

 

3

작년에 바실리 그로스만이라는 러시아의 소설 <<삶과 운명>>을 읽었다. 소설가는 인간의 승리는 모든 거대한 것, 추상적인 것을 이기는 구체적인 것, 개인적인 것에 있다는 주장을 했다. 내 일상의 삶에서 우리가 사는 이유와 의미를 발견하여야 한다. 이 소설에서 만난 다음 문장을 소환한다. "잔인할 정도로 솔직해진 두 사람은 자신들의 솔직함이 두려워 솔직해지기를 마다하고 있었다."

 

솔직함과 정직함은 차이가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정직함'이고, '솔직함'은 내 마음 속의 판단이기 때문에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솔직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평화를 깨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말해서' 라는 발언은 관계를 망가뜨리기 쉬운 말이다. 그냥 말을 안 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이다. 나는 가끔 내 솔직한 마음을 말하여 대화 분위기를 '뻘쭘'하게 만들곤 한다. 이젠 솔직한 말은 가급적 안 할 예정이다. 그리고 아무리 가치 있는 말이라도 그것이 누군가의 가슴속에 들어가 화학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 의미가 퇴색된다. 그러나 가치 있다고 상대에게 함부로 충고하거나 '지적 질'하는 것은 좋지 않다.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진실은 좋지만, 사랑이 더 좋다. ”상투스, 상투스“('거룩하시다'로 시작하는 성가): 입만 열면 거룩한 소리로 남한테 부담을 줄 때 하는 말이다. 맛있게 먹고, 남을 비난하거나 그러지 않고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 더 겸손하다. 남을 비난하지 말자, 타인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데 평생을 바치신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수녀회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기준은 하나였다.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나요?"였다.

 

4

SNS가 평소에는 조용히 있다가 선거철이 되니, 친구 요청을 하고, 자신을 알리기에 하루에도 여러 번 포스팅을 한다. 그래 선거에 나오는 사람은 <<장자>> <인간세>의 다음 부분을 정독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 공유한다. 그리고 유권자인 우리도 후보자의 자질을 이 잣대로 평가해 보아야 한다. 선거, 참 중요하다. 우리는 '4류 정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앞서가는 분야들이 이 4류 정치에 발목이 묶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4류정치의 책임은 정치인들이지만 유권자인 국민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적 대표자들의 질을 높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선거하고, 공약을 지키지 않으면 책임을 묻는 시스템을 잘 만들어 가동 시켜야 한다. 정치인보다 유권자가 깨어나야 한다.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 안회의 갸륵한 마음을 알면서도 공자는 안회의 요청을 거절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근심 걱정이 있으면 남을 도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먼저 "스스로 도를 굳힌 뒤에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경(시각장애인)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겨우 인의(仁義)를 배우고 그것으로 정치판에 뛰어들겠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기 수양을 했으면 사람을 다스리라고 했지만 섣부른 수기(修己)만으로는 치인(治人)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럴 경우 오히려 '치인'이 아니라, 재인(災人), 즉 남에게 재앙을 안겨 주는 일이 되고, 결국 자기를 해칠 위험까지 있다고 했다.

 

2) 이상만 높고 정치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경험을 못한 햇병아리가 세상사에 닳고닳은 정치 지도자들, 사람을 자기들 마음대로 주물러 온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다가는 오히려 그들에게 설득당하고 이용만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옛날에 인격을 잘 닦았지만 백성을 위한다는 이상만으로 백성들 편에 서서 임금에게 간하다가 죽은 역사적 인물 두 명을 실례로 들려주면서 심지어 죽음을 당할 수 있으니 아예 갈 생각을 말라는 것이다.

 

3)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네가 위나라로 가려는 것이 진정으로 그 나라 백성들을 위한 것인지 네 명예와 실리를 위한 것인지를 살펴본 후에 가고 말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명예와 실리 추구는 성인들도 물리치기 어렵다고 말한다. 이상과 포부만은 좋을지 모르나, 그 것만으로는 될 일이 아니니 위나라에 가겠다는 생각을 아예 포기하라고 한다.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동기(動機)가 무엇인지 반성하게 하는 대목이다. 결국 아무리 대의명분을 내세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조금이라도 자기의 이기적 목적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를 냉철히 살펴보고, 속으로 조금이라도 꿀리는 것이 있으면, 이런 일이 본인에게나 남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요즈음 선거에 나오면서 국가와 지역을 위해 나를 바쳤다느니 하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이야기이다.

 

5

오늘은 성 주간 수요일로 말씀은 <마태오 26,14-25>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다,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 이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하십니다.’ 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런 사람이기를>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 26,24)

 

나보다 더

나를 믿으시는

당신을

믿음으로써

내가

나에게

믿음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를

나보다 더

나를 희망하시는

당신을

희망함으로써

내가

나에게

희망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를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내가

나에게

사랑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를

나보다 더

나를 섬기시는

당신을

섬김으로써

내가

나에게

섬김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를

나보다 더

나를 살리시는

당신을

살림으로써

내가

나에게

살림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를

 

6

하느님께 나의 부족함을 합리화하거나 포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봉헌합시다.

2026/4/1/성주간 수요일

마태오 복음 2614-25: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줍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과연 자신의 행위를 배신이라고 인지했을까요? 어쩌면 정당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메시아이시라면 붙잡히신다해도 스스로 풀려나시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고,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더 빨리 실현하시리라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은전 서른 닢도 순전히 자기 이익을 위해 취하려 했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더 큰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짐작의 시도에도 복음이 전하는 사실이 부정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도둑이었습니다(요한 12,6). 

 

도둑의 특징은 거짓입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에서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하며, 함께 있던 이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기만합니다. 이에 반해, 베드로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우리는 모두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자신을 애써 포장하고 감추는 태도가 아니라, 그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며 은총을 청하는 자세가 아닐까요.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니 말입니다. 김우중 스테파노 신부(예수회)/생활성서 20264월호 '소금항아리'에서

 

7

202641일 성주간 수요일

 

성주간 수요일입니다. 내일부터 시작될 '성삼일'이라는 거룩한 잔치를 앞두고, 오늘 복음은 우리 마음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조명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은전 서른 닢을 받습니다. 당시 은전 서른 닢은 종 한 명의 몸값에 불과했습니다. 유다는 하늘의 주인을 고작 노예 한 명의 가격과 맞바꾼 셈입니다. 우리는 유다를 비난하지만, 우리 역시 삶의 순간순간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도 합니다. 나의 편안함을 위해 정의를 팔고, 나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팔며, 나의 체면을 위해 주님의 말씀을 뒷전으로 미룹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주시겠습니까?"하고 묻는다면, 신앙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가 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배반 예고에 슬퍼하며 묻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그런데 유다의 질문은 다릅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삶의 주인이신 '주님'이었지만, 유다에게 예수님은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스승' 혹은 '선생'에 불과했습니다. 내 삶의 주권을 내어드리지 않고 지식으로만 믿는 신앙은 위기의 순간에 너무나도 쉽게 배반의 길을 선택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주님'이신가요, 아니면 그저 좋은 말씀을 해주는 '선생님'인가요?

 

1독서의 주님의 종은 우리에게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지친 이를 위로할 줄 아는 제자의 혀를 가졌습니다. 또한 모욕과 침 뱉음 속에서도 얼굴을 차돌처럼 단단하게 가다듬으며 하느님을 신뢰합니다. 유다는 혀로 예수님께 입을 맞추며 배반했지만, 주님의 종은 그 혀로 사람을 살립니다. 세상이 나를 비난하고 흔들 때,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 50,7)는 확신입니다.

 

오늘 유다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길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그와 함께 식사하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마태 26,24)이라는 탄식은 저주가 아니라, 길을 잃은 자녀를 향한 하느님의 커다란 아픔이 담긴 사랑의 외침입니다.

 

성삼일을 하루 앞둔 오늘, 우리 마음속의 '은전 서른 닢'을 꺼내어 주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라고 묻기보다, "제가 무엇을 드릴까요"라고 묻는 제자가 됩시다. 주님을 지식으로만 아는 '스승'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것을 맡기는 '주님'으로 고백합시다. 우리가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며 주님 곁에 머물 때, 우리는 배반의 어둠을 뚫고 부활의 빛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팔아넘기지 않게 저를 붙들어 주소서. 제 마음의 주인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아멘.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 박한표 교수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 미디어시시비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안재휘 / 대표기자 기자
이메일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