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진시황제의 중원 통일은 동이족 국가들간의 혈투의 결과로 얻어진 산물
《신주사기》 제1권 오제본기
사마천은 왜 중국인들이 중국사의 시작으로 여기는 삼황을 지우고 오제부터 역사 기술을 시작했을까? 또 오제의 첫 임금인 소호를 지우고 그 부친 황제를 중국사의 시작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1권 신주(새로운 주석)를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사마천이 설정한 오제 및 하은주 시조 계보도’에도 오제는 물론 하·은·주의 시조가 모두 동이족으로 드러난다. 사마천이 감추고 싶었지만 가리지 못한 역사가 본문 및 삼가주석, 그리고 신주에서 밝혀진다.
《신주사기》 제2권 하본기
공자가 하·은·주 삼대를 이상사회로 크게 높였는데, 지금까지 중국인들은 이 시대를 이상사회로 여긴다. 그 첫번째 국가에 대해 서술한 하본기는 하나라 시조 우(禹)임금부터 시작한다. 그 우의 출자 계통은 역대 중국학자들의 오랜 논쟁거리였다. 사마천의 《사기》는 오제의 두번째인 제전욱의 아들 곤의 아들로 서술한 반면 반고의 《한서》는 제전욱의 오대 후손 곤의 아들로 달리 말하고 있다.
《신주사기》 는 이런 역대사료를 모두 분석한 후 제전욱의 아버지 창의가 동이족 소호의 동복형제인 점을 들어서 우임금 역시 동이족임을 밝혀냈다. 우가 개척했다는 9주의 범위에 대해 현재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강역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후대에 크게 확대된 것이고 우공 9주의 범위는 지금의 산동성과 하남성 일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도 논증하고, 관련 지도를 제작해 게시했다.
《신주사기》 제3권 은본기·주본기
은나라가 동이족 국가라는 사실은 은나라를 연구하는 전 세계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사마천은 은나라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이 현조가 떨어뜨린 알을 삼키고 설을 낳았다는 난생사화로 은본기를 시작했다. 동북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난생사화는 동이족 건국사화이다. 간적은 제곡의 두 번째 비인데, 제곡은 동이족 소호의 손자다.
중국인들은 하남성 안양시에서 은허(殷墟) 유적이 발견되기 전까지 하·은(夏殷)을 실존했던 국가로 여기지 않았다. 은허가 발굴된 이후부터 은나라를 국가로 여겼는데, 이는 중국 국가사의 시작이 동이족임을 뜻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하나라를 실존 국가로 만들기 위한 국가 차원의 역사공정을 계속하는 이유는 은나라를 중국사의 시작으로 설정해서는 하화족의 중국사를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주본기도 마찬가지다. 사마천은 주나라가 동이족 국가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 스스로 주 시조 후직의 어머니 강원이 제곡의 첫 번째 비라는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주나라 또한 동이족의 국가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신주사기》는 그동안 주나라를 서이(西夷)라고 부른 것은 은나라의 서쪽에 있었다는 뜻이며, 중국이라는 개념이 지금과 달리 주나라 수도 낙양과 그 북쪽 황하를 뜻하는 하락(河洛)이라는 작은 지역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신주사기》 제4권 진본기
제4권은 진본기다. 진의 선조는 제 전욱의 후예 여수인데, 제 전욱이 동이족임은 물론 여수가 현조가 떨어뜨린 알을 삼키고 임신해서 대업을 낳았다는 난생사화라는 점에서 진나라는 동이족 국가이다. 그런데 진나라는 중원을 최초로 통일한 국가다. 실로 현 중국의 모체는 진의 중원통일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진시황의 중원통일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중국역사상 최대 사건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사기》 〈봉선서〉에 “진나라는 소호의 제사를 주관한다”고 쓴 것처럼 진나라는 동이족 소호의 후예국가다. 《신주사기》 연구진들은 진시황(秦始皇)이 혜성처럼 나타나 중원을 통일한 것이 아니라 서기전 262년~서기전 260년에 진나라 60만 대군과 조나라 45만 대군이 맞붙은 장평지전에서 조나라 45만 군사가 전원 전사하면서 진나라가 승리한 것이 40여 년 후에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조나라 왕실은 진나라 왕실에서 갈라져 나은 같은 영성(嬴姓)의 국가였다는 점에서 장평지전은 형제국가들 간의 격전이었다. 진나라의 중원통일사 역시 동이족 국가 사이의 혈투의 결과였다.
《신주사기》 제5권 진시황본기
중원 사상 최초로 통일제국을 건설한 진시황의 자세한 일대기다.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한 후 스스로 태황(泰皇)의 황(皇) 자와 오제의 제(帝) 자를 합해 황제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불과 15년도 못 되어 망한 이유를 탐색한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후 불로장생을 추구하고, 유학자들을 묻어죽이는 분서갱유 등을 단행한 것이 조속한 멸망의 원인이라는 것이 사마천의 견해다. 《신주사기》 연구진들은 이 부분에서도 우리 관점의 해석을 중시한다. 진시황이 순행한 동쪽 끝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중요한데, 갈석산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음을 논증하고, ‘진나라 영역’ 지도(89쪽)와 ‘진개 침입 이후 연장성과 행정구역’ 지도(103쪽)에서 진나라 만리장성 동쪽 끝과 연나라가 고조선 강역 일부를 빼앗고 설치한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표기했는데, 대부분 지금의 하북성 일대다. 이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사기연구실과 국토지리연구실 연구자들의 오랜 연구와 토론 끝에 작성한 지도다. 또한 진나라의 남쪽 강역도 지금의 절강성 북부까지만 차지했을 뿐 복건, 강서, 호남, 귀주, 운남성 등은 진나라의 영역이 아니었음도 밝혔다.
《신주사기》 제6권 항우본기
먼저 사마천이 사기본기를 쓴 순서를 주목해야 한다. 사마천의 편찬 권수로는 항우본기가 사기 제7권, 고조본기가 제8권이다. 중원패권을 두고 다투었던 한 고조 유방보다 항우를 앞에 내세웠다. 사마천이 살았던 한나라의 시각으로 볼 때 항우는 반역자였고, 그래서 반고는 《한서》에서 항우를 본기는커녕 일종의 반란자들의 사적인 〈진승 항적열전〉에 수록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항우를 한고조 유방보다 앞서 본기에 수록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마천이 항우를 크게 높인 것은 아니었다. 사마천은 “태사공은 말한다”라는 사평(史評)에서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군사를 잘못 움직인 죄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크게 비판했다. ‘옛날 일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패왕의 사업만을 말하면서 힘으로 천하를 정벌’하려다가 패했다면서 천명이 아니라 항우 자신의 잘못 때문에 패했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천명 자체는 거부하지 않았지만 그 천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시각이 유방과 항우의 홍문연(鴻門宴)에 대한 기술에 들어있다. 이때 항우가 유방의 목을 벴으면 중원의 패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함의였다. 항우의 왕사(王師) 범증(范增)이 “오호라! 어린아이와는 일을 도모할 수 없구나. 항왕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패공일 것”이라고 한탄한 말은 이래서 인용한 것이다.
《신주사기》 제7권 고조본기
객관적인 전력으로 따지면 중원패권에서 승리할 수 없었던 유방이 어떻게 모든 조건에서 유리한 항우를 꺾고 중원을 차지했을까? 사마천이 그리는 유방은 미천한 지위에 있지만 뜻은 큰 인물이었다. 항우는 초나라 명장 항연의 후손이지만 《사기색은》에서 유방의 “성(姓)이나 자(字)는 모두 정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출신조차 불분명했던 유방이 중원 패권을 장악한 것이다. 유방은 신분이 미천했기에 사마천이 만든 하화족 중국사의 계보를 완성시키는데 적당한 인물이었다.
사마천은 오제부터 시작해 하은주 삼대를 거쳐 진한(秦漢)에 이르는 하화족의 중국사를 서술했는데, 출자 자체가 불분명한 유방의 한나라를 종착점으로 삼으면 동이족의 중국사에서 탈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조본기를 통해 사마천은 항우처럼 혼자 우뚝한 제왕보다 본인은 부족하지만 명 참모들을 주위에 둘 줄 아는 제왕이 승리한다는 메시지도 던졌던 것이다. 천하는 제왕 혼자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현자들이 함께 통치한다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유방은 중원을 차지한 후 자식과 동생들을 제후로 봉하고, 이성제후들을 제거하려 하면서 난관에 봉착한다. 특히 자신감이 넘쳐서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대패하는 장면은 자만에 대해서는 하늘이 징계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그래서 유방 사후 여후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신주사기》 제8권 여태후본기·효문본기
한고조 유방의 부인인 여태후는 산동성 출신으로 여(呂)씨에 이름이 치(雉)였다. 유방은 자신 사후 유씨 천하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 백마를 죽여 대신들과 맹세하면서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공격해야 한다”고 맹세하게 했다. 그러나 유방은 여후의 계략에 빠져 한신과 팽월같은 공신들을 제거함으로써 유씨 왕실을 스스로 약하게 만들었다. 유방은 여후의 아들 유영 대신 척부인의 아들 여의를 후사로 삼으려 했으나 장량 등의 계책으로 실패하고 유영이 즉위했다. 그가 혜제인데 혜제 사후 여태후는 혜제의 후궁에서 출생한 여러 왕자들을 차례로 등극시키면서 여씨를 대거 등용해 유씨 왕실을 여씨 왕실처럼 만들었다. 여후는 유씨만을 후왕에 책봉하라는 유방의 유훈을 어기고 동생인 여산(呂産), 여록(呂祿) 등을 후왕으로 책봉했지만 여후가 죽자 곧 반격이 시작되어 여씨들은 대거 주멸되면서 여씨 정권은 무너지고 고조의 넷째아들 유항이 문제가 되었다.
문제는 여후가 여씨 세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을 치유하는데 적격인 제왕이었다. 그 뒤를 이은 경제(景帝)의 치세와 함께 ‘문경지치(文景之治)’로 불리는데, 사마천 역시 두 제왕을 성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마천이 바라던 제왕의 상이 문제와 경제에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여태후는 실제로 정권은 장악했지만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음에도 사마천이 〈여태후본기〉에 넣어서 서술한 것은 이름뿐만 아니라 실제로 황제 역할은 한 것을 인정한다는 뜻일 것이다.
《신주사기》 제9권 효경본기·효무본기
효경제는 인자한 군주였지만 조조(晁錯)의 삭번책으로 제후들의 영지를 삭감했다가 7국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본기〉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효경제의 아들 효무제 본기다. 그가 바로 사마천을 궁형에 처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무제는 제후들의 권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흉노·고조선·대원국 등을 정벌해 한나라 강역을 크게 확장시킨 중흥군주였다. 그러나 사마천은 무제를 아주 박하게 기술했다. 사마천은 “무제는 즉위 초에 더욱 공경하게 귀신의 제사를 받들었다”고 무제를 영생불사를 꿈꾸는 방사(方士) 군주처럼 그렸다.
무제의 가장 큰 우선정책이 ‘해중(海中)의 신선’을 찾는 것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한고조도 크게 곤욕을 치렀던 흉노를 정벌했으나 정작 〈효무본기〉에는 이에 대한 사항이 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조선 정벌에 대해 “이듬해 조선을 정벌했다”고 한마디로 묘사하고, 대원국(大宛國) 정벌에 대해서도 “이해에 서쪽 대원국을 정벌했다”고 한마디로 정리했으며, 나아가 “건장궁(建章宮)을 지었는데 헤아려보니 문이 1천 개이고 방이 1만 개였다”고 진시황 못지않게 거대한 역사(役使)를 좋아하는 군주로 묘사했다.
무제에 대한 이런 박한 기술은 그가 당한 궁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사마천은 황제로 시작해 삼대와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로 이어지는 하화족의 민족사를 서술하려는 자신에게 궁형을 가한 무제를 좋게 평가할 수가 없었다. 역사가가 아무리 중립성을 강조해도 역사 서술에 절대적 객관이나 중립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신주사기 본기 세트 구성>
신주사기 1 오제본기 (400쪽 · 값 24,000원)
신주사기 2 하본기 (248쪽 · 값 18,000원)
신주사기 3 은본기·주본기 (408쪽 · 값 24,000원)
신주사기 4 진본기 (235쪽 · 값 18,000원)
신주사기 5 진시황본기 (398쪽 · 값 24,000원)
신주사기 6 항우본기 (266쪽 · 값 18,000원)
신주사기 7 고조본기 (312쪽 · 값 22,000원)
신주사기 8 여태후본기·효문본기 (264쪽 · 값 18,000원)
신주사기 9 효경본기·효무본기 (256쪽 · 값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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