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東-09] 나·노(羅·盧) 축융족과 초나라 간 언북전쟁

민족·역사 / 안재휘 기자 / 2020-06-25 01:03:49
[시리즈] 박동(朴東) 박사와 함께 하는 ‘동이족과 한민족’
[그림] 초라 언북지전 이전 호북성 경내 주왕실 분봉 제후국들의 강역

 

나씨는 불의 신 화정(火正)의 후손으로서 축융(祝融)으로 불리웠다. 『사기』초세가에 따르면 중려(重黎)가 제곡 고신씨의 화정으로서 천하를 밝게 비추는 축융, 즉 태양신이 되었다고 한다. 나씨는 중려의 후예이다. 나씨는 상나라 갑골문에도 등장하는데, 나의 글자 형태()는 마치 새장을 들고 새를 잡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그리고 노씨도 축융의 후손으로 불리웠는데, 이들은 나씨와 그 계통이 다른 염제 계통의 축융족이다. 갑골문 노()는 “난로에서 호랑이 머리나 짐승 뼈를 삶는다.”는 뜻을 갖는다.

나씨족과 노씨족은 주 무왕에 의해 자작으로 봉해진 후 호북성 의성현과 방주 죽산현에 각각 나자국(羅子國)과 노국(盧國)을 세웠다. 건국 이후 나인들은 노융과 더불어 소국 연합을 이루어 강대국들의 침략을 방어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나국의 남쪽에 위치한 초나라는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초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강소국들을 모두 정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과정에서 초나라와 나·노 연합군 사이의 초라 언북지전(楚羅鄢北之戰)이 발생했다. 이 전쟁은 춘추 초기에 초나라가 어떠한 방식으로 성장했는가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나씨와 노씨 세력이 이후 중원에서 중국 동남 해안 지역으로 이주하여 해양세력으로 변모한 후 한반도 남부 영산강 유역으로 이주하는 경로를 잘 보여준다.

 

  초나라가 주변국을 병탄하려고 하자 호북성 경내의 모든 강소국들은 이에 대한 대응을 서두르게 된다. 그럼에도 초나라는 운국을 격파하고 팽(彭)을 쳤으며, 교(绞)국을 토벌하였다. 초가 교(绞)를 정벌하자 나인들은 초를 추적하여 정찰을 강화하였다. 『춘추좌전』 노환공 12년(BC 700)에는 “초가 교를 칠 때 군사를 나누어 팽수(호북성 방현)를 건넜다. 당시 나(羅)인들은 초군을 칠 생각으로 대부 백가를 시켜 정탐케 했다. 백가가 초군의 주위를 세 차례 돌며 적정을 파악했다.”고 한다.

 

  노(魯) 환공 13년 봄 초나라는 대부 굴하(屈瑕)에게 다시 명하여 나(羅)국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초 군대는 이미 교(絞)를 토벌하여 크게 승리한 뒤여서 굴하는 스스로 공로가 있다고 여겨 발을 높이 올리어 걸으며 의기양양 뽐내는 지고기양(趾高氣揚) 상태였다. 이 모습을 본 대부 두백비(斗伯比)는 초무왕에게 “이번 전투에서 굴하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일찌감치 응원군을 보내야 합니다.”라고 했다. 초무왕이 어리둥절해 하자 왕후 등만은 “두백비 장군은 지난 번 운국과의 조그만 전투에서 이긴 일로 교만해진 것을 걱정하는 것이니 급히 사람을 보내어 신중히 행동하게 하소서.”라고 했으나 이미 굴하는 떠나고 난 뒤였다.

굴하 때문에 교만하고 광적인 분위기에 휩씨인 그의 군대는 규율이 없었다. 이에 대해 『춘추좌전』노환공 12년조에는 “초군은 언수(鄢水)에 이르러 대열을 갖추지 않고 무질서하게 강을 건넜다. 이어 군진을 정비하지도 않은 채 만연히 나(羅)국에 당도했다. 나국은 노융(盧戎)을 끌어들여 초군을 협공해 대파했다. 굴하는 부끄러운 나머지 황곡에서 목을 매어 죽는 액사를 했다. 나머지 제장들은 야부에서 죄인의 몸이 돼 초무왕의 처분만을 기다리게 됐다.”고 했다.

 

  노융과 연합한 나군은 초군을 맞받아쳐 대승을 거두었다. 노국은 서쪽, 나국은 동쪽에 위치하여 초나라를 동서 양쪽에서 협공하였다. 초가 대패한 후 초무왕은 “이것은 두백비의 충고를 듣지 않은 나의 잘못이다. 굴하의 거만하고 잘난체 하는 그런 정서를 제지했어야 했다.”고 하며 구금된 장수를 모두 석방하였다. 초라 언북지전은 교만한 군대는 반드시 패한다는 교병필패의 교훈을 던져 주었다.

 

  언북지전 패배의 치욕을 씻기 위해 절치부심한 초나라는 기원전 690년 호북성 샹판(襄樊)에서 노와 연합한 나를 정벌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로써 초나라는 호북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대국으로 성장한다. 그런데 『춘추좌전』에서 나국의 멸망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초가 690년 한수를 건너 수(隨)와 등(鄧)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나국이 멸망되지 않았다면 그 배후에 있는 수나 등을 공격할 수 없는 형세였으므로 바로 이전에 나국과 노국이 멸망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울러 이 해에 초무왕은 행군 도중 병사하였다.

 

  이에 나라를 잃은 나국과 노국의 축융 자손들은 호북성 지강현(枝江縣)과 평강현(平江縣), 호남성 멱라 지역, 호남성 장사 등지로 강제 이주당하였고, 나라 잃은 한을 잊지 않기 위해 나국의 유민들은 국명인 ‘나’를 성씨로 삼았고, 노국인들은 ‘노’를 성씨로 삼았다. 이후 그 나씨와 노씨 후손들은 대륙의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 주류는 장사(長沙) 지역을 거쳐 중국의 절강성과 월주 등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나인들이 살던 곳에는 나성, 대라산, 소라산, 나전(羅田), 나천, 나수, 멱라강(羅汭) 등 수많은 나계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시리즈 10편에 계속됩니다

 

 박동(朴東) 박사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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