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東-07] 서언왕의 동이족과 주나라의 패권경쟁

민족·역사 / 안재휘 기자 / 2020-06-05 01:51:47
[시리즈] 박동(朴東) 박사와 함께 하는 ‘동이족과 한민족’
[그림] 춘추시기 서국의 위치와 강역-[자료] 백도백과

 

주나라 초기 강소성 사홍(江蘇泗洪) 일대에 소재하던 서국(徐國)은 기원전 2170년 백익(伯益)의 아들인 약목(若木)이 서()에 봉해지면서 건국되었다. 서약목은 서씨의 시조이다. 서국은 중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이고 동이족 중 가장 강력했다. 서국은 서융(徐戎)으로도 불리웠는데, 그 이유는 서주 초에 낙양 등을 대대적으로 공략하여 중원을 장악할 정도로 위협적이어서 그 두려움을 표현하여 융()으로 호칭한 것으로 파악된다. 서이는 래이족과 더불어 중국 동쪽의 매우 오래된 종족이었다.

 

최근 중국 연구자들은 청나라 광서년간(光绪年间)에 출토된 서국의 청동기를 근거로 서국의 문화가 화하 문화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주장하며, 서이의 문명을 화하족의 문명으로 편입하려 하고 있다. 대표적 동이족을 화하족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그만큼 화하족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30년에 곽말약은 강서(江西) 지역에서 출토된 서국의 청동기를 연구한 결과 춘추 초기의 강소성, 절강성이 서나라의 땅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이로 보아 서인들은 주와 초의 공격을 받아 강서 서북부로 남천한 것으로 파악된다.

 

서국은 강소성, 산동성 등 회대(淮岱) 지역에 입지하면서 끊임없이 주왕조와 노()나라에 반대해 갈등을 지속했다. 특히 상나라가 멸망한 이후 은민육족의 일원으로서 주나라와 끝까지 갈등을 지속하다가 주공에게 정벌당하여 서이 중 일부는 동북쪽으로 강제 사민되고 나머지 세력은 계속해서 주나라와 패권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주목왕(BC1001 ~ 947) 시기에 서언왕(徐偃王)이 인의를 행하여 민심을 얻어내는데 성공함으로써 구이를 이끌고 주나라의 낙양 등을 쳐서 서주의 통치를 무력화시켰다. 그 결과 주나라와 병립하는 동이족 최강의 대국을 건설하였으며, 이에 강회(江淮) 일대의 군서(群舒)를 비롯한 36개국에서 조공을 보내기도 하였다.

 

서언왕은 알에서 태어났는데, 박물지에는 서군(徐君)의 궁인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버렸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아이가 나와 이름을 언()이라 했다...서언왕은 진(), ()의 사이를 드나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라고 했다.

 

이러한 난생사화와 궁시신화는 상 시조 설()의 현조 사화, 부여 동명왕 사화, 고주몽 사화 등 동이족 고유의 난생사화와 같은 계통이며, 궁시신화 또한 후예(后羿)의 신화에 나오듯이 활을 잘 쏘는 동이족들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김상기 선생은 동이와 회이·서융에 대하여에서 서언왕의 난생사화와 궁시신화는 고주몽 사화와 골자가 같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선진 시기의 서이가 한민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서언왕과 관련해서는 중국 사서에서 더욱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후한서동이전의 서문에는 그 후 서이(徐夷)가 참람하게 왕을 칭하며 구이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쳐서 서쪽으로 황하 상류까지 이르렀다. 목왕(穆王)은 그 세력이 널리 떨칠 것을 두려워하여 동방 제후들을 분리시켜 서언왕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언왕은 황지 동쪽에 살았는데 국토가 500리였으며, 인의를 행하니 육로로 와서 조회하는 나라가 36국이나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선진(先秦) 동이중 하나인 서국이 1천년 이후 동북 동이의 대표국으로 기록된 사례이다.

 

상의 멸망 후 동이족은 서언왕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결집했다. 서언왕이 중원의 주도권을 차지한 이후 주나라 목왕은 초나라 병력을 동원하는데 성공한다. 초나라는 서국의 독주를 저지하기 위해 병력을 일으켜 서국 정벌에 나선다. 기원전 963년 초문왕이 공격에 나서자 서언왕은 그 백성이 전쟁에서 해를 입지 않도록 전쟁을 포기하여 초나라에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이주했다. 이때 백성들 중 따라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며,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불렀다. 서언왕이 전쟁을 피하고 떠난 것에 대해 조조는 서언왕을 나약한 군주로 평가했다. 그리고 가장 호전적인 군주로 오나라의 부차를 꼽았다.

 

서국은 춘추시대에 동북의 제, 서남의 초, 남쪽의 오 등의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계속 공격을 받다가 기원전 512년 오에 멸망당하였다. 서국의 멸망 이후 그 후손들 중 일부는 동북의 부여로 이동하고, 일부는 한반도로 이주해온 것으로 분석된다. 한반도에 이주한 서씨족은 이천 서씨 등 한민족 서씨의 주력이 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서씨는 서주 초기 일부가 부여로 이동하는 등 다원화되었으므로 그 씨족 유래에 대해서는 부여 발세력의 한반도 이주와 관련해서 다시 설명하도록 할 것이다.

-시리즈 8편에 계속됩니다

 

 

박동(朴東) 박사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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