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東-14] 나씨·노씨의 중원 내 활동 경로와 한반도 이주

민족·역사 / 안재휘 기자 / 2020-08-15 01:54:45
[시리즈] 박동(朴東) 박사와 함께 하는 ‘동이족과 한민족’

[그림] 나씨·노씨의 중원 내 활동 경로와 한반도 이주

[자료] 구글지도 위에 필자가 그림

  

나씨와 노씨는 중원 진출 이후 씨족 연합을 이루어 함께 움직인 맹방으로 판단된다. 기원전 690년 초무왕이 나국과 노국을 병탄하면서 이들 두 씨족은 강제로 이주당한다. 수경주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나국과 노국은 초에 멸망당한 후 남쪽의 지강(枝江)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러나 이후 초의 군진이 강남까지 세력을 확장하자 재차 나국과 노국 유민을 호남성 장사로 이주시켰다. 나인(羅人)은 장사 북부에서 백리가 안되는 곳의 멱라강(汩罗江)에 다시 나자국을 건국하게 된다. 이때 일부 노씨족은 멱라강 동쪽에 있는 평강으로 옮겨간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몇몇 노융인들은 호남의 진주(辰州)에 이르러 진계와 노계(泸溪) 일대의 냇가에 주둔했다.

 

이후 나씨와 노씨는 중국의 동해안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는 나족의 지표지명인 나()의 분포 양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나산(羅山) 등 나계 지명이 온주, 항주, 상해만이 아니라 광서 장족자치구, 운남성 일대에 집중 분포하고 있어 이들이 중국 동해안에서 해상활동에 종사한 것으로 분석된다. 나씨와 노씨는 이처럼 해안으로 이동하여 무역활동에 종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씨와 노씨는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 집중 분포하였는데, 특히 광서성 장족자치구에는 백제향과 백제허 등 백제와의 교류를 나타내는 지명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들 지역에는 나씨와 노씨들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 귀주성과 곤명시를 중심으로 하는 운남성에는 300만명에 달하는 포의족(布依族)이 살고 있는데, 이들 중 다수가 나씨와 노씨들이다. 따라서 백제가 이곳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백제가 건국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들 지역은 영산강 세력들과 동일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나씨와 노씨, 그리고 목씨는 온주(溫州)의 대라산 인근 지역에도 집중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나씨, 노씨, 목씨 등은 절강성의 입구인 주산군도를 거쳐 한반도로 대량 이주한 것으로 파악된다.

 

고대 시대에 주산군도 일대는 오의 영역이었다가 나중에 월이 오를 멸망시키면서 월의 영역이 된다. 나씨와 노씨, 목씨는 오·월 전쟁시기 월의 장수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선봉에 서서 오와 대립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이 영산강 유역으로 본격 이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5~6세기의 춘추전국시대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는 오··초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과 오의 멸망, 그리고 이후 초에 의한 월의 멸망, 진에 의한 초의 멸망 등으로 중원에서 수많은 전쟁 난민이 발생하였다. BC 221년 진시황의 통일 이후 중원의 유생들은 엄청난 탄압을 당하게 된다.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표현되듯이 법가 사상에 따르지 않는 책이나 유학자는 모두 불태우고 땅에 묻어 버리는 무자비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 씨족을 해산해서 일반 백성으로 만드는 개산위민’(皆散爲民) 정책을 단행함에 따라 동이족들은 민호(民戶)로 전락해 세력 자체가 말살될 수 있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동이족들은 아방궁 건설, 만리장성 축조 등 각종 진역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씨와 노씨, 목씨 등 동이 축융족들의 한반도로 이주 경로는 크게 두 가지로 판단된다. 첫째는 횡단항해를 통해 산동반도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하였다. 나씨, 노씨, 그리고 목씨는 해상활동에 익숙해 항해술이 뛰어나고 수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주한 경로에는 BC 3세기말 ~ BC 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중국식 동검이 전북 완주와 전남 함평 등지에서 대거 발굴되어 이들의 이주를 뒷받침하고 있다. 아울러 모라 등 나계 지명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는 초에 멸망한 나국인들의 성씨이다. 따라서 모라는 래이 모씨와 라씨의 씨족연합을 나타내는 지표지명이다. 산동반도를 건너서 한반도로 이주한 동이족들은 모(), (), (), (), 모라(牟羅), 모루 등의 지표 지명을 사용하였는데, 특히 변산반도 이남에 수많은 모라(모루)계 지명이 널리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나주 복암리에서는 모라(毛羅)라고 적힌 목간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영산강 유역에 모라계 세력이 집중 분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나씨와 노씨, 그리고 목씨 등의 주력이 영산강 유역을 근거지로 삼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둘째는 절강성 유역의 입구인 영파 또는 그 이남인 온주 등지에서 사단항로를 통해 한반도 서남해안 소흑산도인 가거도를 거쳐 영산강 유역으로 직접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함평지역 등에서 출토된 다양한 중국 토기 등과 나, 노씨의 지표지명인 나산(羅山)과 광산의 존재를 들 수 있다. 라산은 중국에 모두 10개 정도가 있는데, 그 중 3개가 온주, 항주, 상해 등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그런데 함평에 나산이라는 똑같은 지명이 있으며 나주 인근에는 로씨들의 지표지명인 광주와 광산이 있다.

-시리즈 15편에 계속됩니다

 

박동(朴東) 박사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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