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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사씨(沙氏)의 중국 내 주요 근거지와 한반도 이동-구글 맵 |
사씨(沙氏)는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이다. 이들은 전북 익산, 옥구 등에 근거지를 두고 백제 후기 왕실을 좌우했던 씨족이다. 원래 사씨는 산동을 비롯한 동북에도 다수의 세력이 포진하여 대륙백제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아울러 『일본서기』의 기록에도 목씨와 더불어 사씨가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따라서 이들의 이동경로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사씨 중 대표적 인물로는 사법명(沙法名)이 있다. 그는 백제 동성왕(재위 479~501) 때 북위의 대군을 물리친 명장이다. 사택기루(沙宅己婁)는 『일본서기』 흠명천황기에 따르면 백제 성왕 대에 상좌평을 맡고 있었다. 무왕·의자왕 대에는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대좌평(大佐平)이었다. 사택적덕은 무왕 말기에 익산 미륵사 창건의 후원자로서 무왕의 익산 천도를 보좌하였다. 미륵사 금동사리봉안기에서 사택적덕의 딸이 백제 무왕의 왕후였다는 기록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의자왕 시기에는 사택손등과 사택천복이 좌평을 역임하는 등 절정의 권세를 누렸다. 백제의 마지막 대좌평이라 할 수 있는 사택천복(沙宅千福)은 660년 7월, 백제멸망과 함께 의자왕과 부여융 및 왕족과 대신, 장수들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 일본으로 도래한 백제유민 사택소명(沙宅紹明)은 사후에 백제 관위였던 대좌평 관위를 하사받았다. 이처럼 사씨는 백제를 떠받치는 핵심 씨족이었다.
이들 사씨는 동이족 중 사이(沙夷)족으로서 염제 신농의 후손으로 인정되고 있다. 백도백과에 따르면 염제가 부족의 지도자로 있을 때, 그 아래 신숙 사씨(臣夙沙氏)가 있었는데 이후 사씨로 성씨를 바꾸었다고 한다. 원래 은나라 탕왕의 후예로서 지명을 성씨로 삼았다. 사씨의 군망(群望)은 기원전 203년 여남군(汝南郡, 현재의 하남 상채)이다. 이곳은 나씨와 노씨가 위치했던 신양시 나산과 광주 광산의 북쪽, 그리고 축융의 터인 신정(新鄭)의 남쪽인 주마점시에 위치하고 있다.
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은나라의 3대 성인 중 한 명인 미자(微子)를 상구(商丘)에 봉하여 송나라를 건국하게 했다. 『춘추좌전』에는 상구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곳은 미자의 후손인 사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씨 세력들은 중원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자의 후손들 중에 이후 사읍, 또는 '사록(沙鹿)'에 봉해진 사람이 있는데, 사서에는 ‘하상지읍'(河上之邑)이라고 칭하며, 지금의 하북성 대명현(한단시와 복양시 사이)이 바로 그곳이다. 그래서 그를 사백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사씨 일파들은 서주 시기에 하북성 한단시 섭현(涉县) 일대에 사씨 후국을 건국하였는데, 나라 이름을 따라 성씨를 삼았다고 한다. 춘추시대 하북 지역에는 섭국이라는 방국이 존재했으며, 이는 태행산을 지나 동쪽의 하북 평원으로 연결되는 한단까지의 직선도로 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통로는 춘추 후기부터 전국 초기까지 조간자, 조양자 등의 진(晉)과 제(齊)나라 사이의 전쟁에서 빈번히 활용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조간자, 조양자의 가신 중 섭타(涉佗)가 나오는데, 그가 바로 사씨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두예의 주석에 따르면 섭타는 진나라 대부로서 조간자(赵简子)의 가신인 것으로 파악되며, 사씨의 후손이었다.
사씨는 상나라 멸망 이후 한단 북쪽으로 이동한 기자조선의 후손들 중에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만성통보』나 『백가성고략』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사씨의 계보는 사수씨에서 나온 것이고, 그 원류는 백제이다.”고 한다. 사수(沙随)씨에서 출자하여 사씨로 개명한 것이다. 사수는 춘추시대 송나라의 영지였다. 현재의 위치는 하남성 저릉 동북부(宁陵东北部)에 해당한다.
낙랑조선을 건국한 기자의 후예 중에도 사수씨가 있다. 사수는 송나라가 건국된 상구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춘추좌전』 양공 2년(기원전 571년)에는 “제 영공이 래(萊)를 쳤다. 이때 래인들은 제영공의 총신인 숙사위(夙沙卫)에게 말과 소 각 1백 마리를 바쳤다. 이에 제나라 군대가 곧 회군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숙사위는 제나라의 대부로서 같은 동이족인 래를 침공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숙사씨의 후손들이 앞의 ‘숙’을 없애고 사씨를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기원전 286년에 제, 초, 위의 공격으로 송나라가 멸망하자 사수씨는 낙랑조선에 합류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백제가 당나라에 멸망당하자 사씨들 중 일부는 다시 중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복성에서 사씨 단성으로 개성하였다. 동이족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사이(沙夷)라고 불리웠는데, 『후한서』에서 분류한 9이족에 사이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시리즈 7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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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朴東) 박사 |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羅)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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