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적 가야전시 규탄 세미나-②] 광개토태왕릉비에 나타난 왜(倭)의 실체

민족·역사 / 안재휘 기자 / 2020-03-10 02:46:57
주제발표:이찬구(겨레얼살리기범국민운본본부 사무총장) 토론:윤창열(대전대 교수)
"일본인의 손에 닿는 유적, 유물마다 조작되고 변조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일제는 36년 동안 한국인에게서 역사의 혼을 파괴해 왔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광개토태왕릉비였던 것이고, 그 중에
신묘년조 기사인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다."
"필자는 이 구절에 변조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이왜이(而倭以)를 이제이(而帝以)로
바로 잡아

 

광개토태왕릉비에 나타난 왜(倭)의 실체
-일본열도 분국설과 관련하여-

 

이찬구(사단법인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

 

 

  <목  차>
  1. 문제 제기
  2. 비문 연구로 본 왜에 대한 논쟁
  3. 신묘년조 기사의 재해석과 왜의 실체
  4. 경자년조 기사의 임나가라와 분국설에 의한 임나의 실체
  5. 결론 –일제의 한반도 임나일본부설은 거짓말이었다.

 

 

1. 문제 제기


  광개토태왕비는 장수왕 3년(AD 414)에 건립된 동북아시아에서 최고 최대의 비이다. 높이 6.39m에 원래 1802자가 새겨 있으나 깨진 글자도 있다. 비신은 응회암이고, 받침돌은 화강암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 비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비가 재발견된 것은 1876년(光緖 2년)으로 중국인 관월산關月山에 의해서였다. 그 후 1884년(광도 10년) 일본 육군참모본부 정보원 사카와 가게이키(酒勾景信1850~1891) 널리 알려진 주구경명(酒勾景明)은 그의 가명임을 佐伯有淸이 『일본역사』287호에서 밝혔다.
 중위가 만주 지역을 정탐하다가 이 비를 발견하여 본국에 탁본을 보냈고, 일본 군부 세력은 비밀리에 이를 연구하였다. 그 결과 1888년에  『여란사화如蘭社話』 권8에  「고구려고비高句麗古碑」를 발표하였으며, 곧이어 1889년에  『회여록會餘錄』第5집을 통해  「고구려 고비문高句麗 古碑文」을 발표하였다. 亞細亞協會 『會餘錄』 第5集,東京, 明治22(1889). 이 책에는 面數가 부여되어 있지 않음
 이 때 활용된 탁본이 소위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이하 쌍구본) 일반적인 탁본과는 달리 우선 비명에 한지를 대고 음각된 글자의 윤곽을 떠낸 다음 글자 밖의 여백에 먹물을 발라 마치 탁본처럼 만든 것으로 이형구는 이를 假拓本이라고 했다.
이다. 1959년 일본인 내부에서조차 ‘변상(變相)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어 1972년 재일동포 이진희李進熙에 의해 부분적인 개작(改作)설이 제기되었다. 李進熙 『광개토왕비의 탐구』이기동 역, 일조각, 1982, 127쪽
 이로써 쌍구본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와 재검토가 요청되었으며, 일본의 비문조작설까지 국내외 학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비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그런데 류승국은 비문의 원형을 찾기 위해서는 조작되기 이전의 초기 원석탁본을 찾는 것이 급선무로 판단했다. 류승국 「광개토대왕비문을 통해서 본 한국고대사상의 원형탐구」 『학술원논문집』43, 2004
 비문 가운데 ‘倭’(왜) 字가 나오는 부분은 일본에 불리한 내용일 경우 원형을 손상하거나 조작한 사례가 입증되고 있다고 보고, 1994년 자신이 북경대학의 객좌교수로 있을 때 그 대학에 있는 「호태왕비원석초기탁본好太王碑原石 初期拓本」 중에  「진고구려호태왕비晋高麗好太王碑 이룡정탁정지본李龍 精拓整紙本 오분제3五分第三」 임기중  『廣開土王碑原石初期拓本集成』 동국대, 1995 참조
이라는 미공개 탁본을 열람하고, 이를 토대로 보결 글자를 찾아내기도 했다.
  필자는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를 해석하는 최대 관건이 그 문장의 주어와 缺字(결자) 補入(보입)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주어는 일본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왜(倭)와 정인보의 고구려(高句麗) 두 가지설로 대립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신묘년조 기사 중에 이왜이(而倭以)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이형구의 倭(왜)자 위작설 이형구 박노희 「광개토대왕릉비의 소위 신묘년기사에 대하여-僞作 ‘倭’字考」『동방학지』29, 연세대국학연구원, 1981
을 참고로 필자가 프랑스 학자의 소장본인  ‘샤반느 탁본’ 水谷悌二郞 『好太王碑考』 개명서원(동경), 1977, 별책부록 참조
(1907)을 통해 새로운 보결을 시도하고자 한다.
  신묘년조 기사에서 왜를 주어로 삼은 일제는 이를 토대로 임나일본부설을 끊임없이 제기해 조선 침략의 명분으로 삼아 왔다. 그동안 임나일본부설이 거짓임을 입증하고자 연구가 이어왔으나, 유감스럽게도 북한 학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설이란 야마토왜가 369년 『일본서기』 神功紀 49年條(369년)의 내용은 倭가 新羅를 격파하고 伽倻7國을 평정한 다음 百濟까지도 西蕃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春三月 ① 以荒田別⦁鹿我別為將軍 則與久氐等 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 或曰 兵眾少之 不可破新羅 更復奏上沙白⦁蓋盧 請增軍士 即命木羅斤資⦁沙沙奴跪【是二人不知其姓人也 但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 與沙白⦁蓋盧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②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 七國 乃移兵 西迴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 四邑 自然降服 ③ 是以 百濟王父子及荒田別⦁木羅斤資等 共會意流村【今云州流須祇】相見欣感 厚禮送遣之 唯千熊長彥與百濟王 至于百濟國登辟支山盟之 復登古沙山 共居磐石上 時百濟王盟之曰 若敷草為坐 恐見火燒 且取木為坐 恐為水流 故居磐石而盟者 示長遠之不朽者也 是以 自今以後 千秋萬歲 無絕無窮 常稱西蕃 春秋朝貢 則將千熊長彥 至都下厚加禮遇 亦副久氐等而送之(『日本書紀』 9 神功皇后 攝政紀). 이를 세 가지로 나누면, ① 荒田別⦁鹿我別 두 장군이 백제사신 久氐 등과 함께 卓淳에 도착한후, 木羅斤資⦁沙沙奴跪 등의 증원군과 함께 신라를 토벌함. ② 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 7國을 평정한 뒤, 군사를 돌려 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줌. 한편 백제의 肖古王 부자가 加羅 7國을 평정한 군사들과 합류하는 과정에서 4邑이 스스로 항복함. ③ 百濟王이 盤石에서 倭의 西蕃이 될 것을 맹세함.(한승아,『日本書紀 神功紀 49年條의 군사작전의 성격과 시기』고려대 석사논문,2015 참조인용)
부터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가야)를 경영(지배)했다는 『일본서기』의 논리인데, 설상가상으로 광개토태왕릉비의 신묘년조 기사의 ‘이위신민以爲臣民’이 ‘왜가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왜곡되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는 빌미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한 제 학설을 소개하고 바른 해석을 시도하여 왜(倭)의 실체(實體)와 임나일본부가 허구임을 밝혀내고자 한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은 2019년 12월3일부터 2020년 3월1일까지 가야유물 2,600여 점을 모아서 ‘가야본성-칼과 현’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고 있으나, 도리어 임나일본부설을 설명하는 전시장으로 전락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출처 : 뉴스렙(http://www.newsrep.co.kr)
 
  아울러 필자 나름대로 경자년조 기사를 계연수의 비문징실을 인용하여 결자 보결해 재해석하며, 임나가라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에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 글 속의 ‘비문’은 곧 광개토태왕릉비를 가리킨다.

 


2. 비문 연구로 본 왜에 대한 논쟁

 

 1) 일제에 의해 시작된 비문 연구

  1876년 2월 조선은 최초의 근대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 조약’)를 체결하였다. 이 조약 체결 후 일본은 당시 한반도와 만주대륙으로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했다. 그 일환으로 일본 참모본부는 사카와(酒勾景信) 등을 만주에 파견하여 지역을 답사토록 하였고, 그들은 집안현 통구에서 우연히 태왕비를 보게 되었다. 1884년 사카와가 소위 ‘쌍구탁본’을 일본으로 가지고 오면서 일본에서의 비문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탁본은 일본 참모본부 편찬과의 지휘 아래 편찬과의 문관이고 훗날 육군대학 교수를 역임한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1845~1916)과 해군성 문관인 아오에 슈(靑江秀1834~1890) 등이 중심이 되어 비밀리에 연구되었다. 박종대 「일본의 광개토왕릉비문연구와 임나문제논증분석」 『가라문화』8, 경남대, 1990.12, 97쪽
 이들의 연구결과로 오늘날의 쌍구본(그림)이라는 탁본이 완성되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亞細亞協會 앞의 책
 이 비문으로 1500여 년 전에 이미 일본이 한반도를 정복한 것 같이 조작하여 한일합병 내지 정략적 지배의 구실을 삼고자 했다. 쌍구본은 『회여록』에 실려 있고, 다음의 文句가 오늘날까지도 격렬한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회여록 쌍구본)

  첫 연구는 아오에 슈(靑江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1884년 7월 「東夫餘 永樂太王碑銘之解」 「高句麗19世廣開土王墓碑解」라는 두 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처음으로 신묘년조 기사를 ‘고대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정복하여 신하국으로 삼았다’는 요지의 해석을 하였고, 박종대 앞의 논문, 101쪽
 이어 비문의 “任那加羅 從拔城”을 들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표면화시키려고 초역사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박종대, 위의 논문, 105쪽
 
  1889년(명치 22년) 6월에 그간의 비문 연구 성과를 묶은 『회여록』 제5집이 공개되면서부터 비문에 대한 일본의 기획연구는 본격화되었다. 이 잡지는 아세아협회라는 일본 국수주의 단체의 기관지로서 비문에 관해 5부류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에 보면 일본에 유리하도록 비문의 내용을 해석하였고, 이를 주도한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는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碑文中有大關係于我者, 辛卯渡海、破百殘新羅爲臣民數句,是也、古來漢.韓史乘、唯書我寇邊通聘, 未嘗書百濟新羅爲臣民於我, 蓋諱國惡也、此碑建於三朝鼎峙之世, 成于高句麗人之手, 故不復爲二國諱, 能使當日事實, 暴白於一千六百餘年之後, 其功可謂偉矣、明治卄一年十月 橫井忠直 識” 亞細亞協會 앞의 책, (無面)

 
[이 碑文 中에 우리 日本과 크게 관계된 부분이 있으니 辛卯年 (AD 391)에 바다를 건너가 百濟와 新羅를 破하고 臣民을 삼았다는 몇 구절이 그것이다. 古來로 한국과 中國의 歷史書에는 우리나라(日本)가 나라의 변경을 도적질했다든가 통빙(通聘)했다는 것은 써 왔지만, 백제와 신라가 우리 일본의 臣民이라고 쓴 것은 없다. 그것은 한국과 中國이 日本을 미워하거나 혐오해서 쓰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 碑는 三國時代에 세워진 것이고, 또 고구려 사람의 손으로 써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 고구려 사람들은 百濟와 新羅 두 나라를 위해서 꺼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當時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그것이 1600년 뒤인 오늘날에 와서 폭로되어 드러나게 되었으니, 그 공적이 가히 위대하다고 할 것이다. (명치21년 1889년 10월 橫井忠直 씀)] 류승국 앞의 논문, 8쪽


  요코이 해석의 핵심은 신묘년조 기사의 주어를 倭로 보고, “왜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高句麗古碑釋文」에서 ‘신묘년조’의 구두점을 다음과 같이 떼었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회여록 쌍구본)  亞細亞協會 앞의 책, (無面)


  류승국은 요코이(橫井忠直)가 태왕 비문에 있는 ‘以爲臣民’을 해석할 때는 고의로 ‘爲臣民’ 亞細亞協會 앞의 책, 「고구려 고비고」
이라 하여 해석상 ‘以’를 탈락시켜 ‘일본이 百濟 □□新羅를 破하여 臣民을 삼았다’로 직설적으로 해석하고, 이것이 歷史的 事實인양 왜곡하였다고 지적했다. 류승국,앞의 논문, 8쪽
 요코이(橫井忠直)의 목적은 神功의 三韓정벌과 연관시키려는 속셈이었다.
  한편 일본 참모본부는 이보다 앞서 1880년에 「皇朝兵史」, 1882년에 「任那考」를 편찬한 바 있다. 이는 일본 군부가 집요하게 조선침략에 대한 흉계를 꾸며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뒤인 1892년 하야시 야스스케(林泰輔)는 한국사에 관한 최초의 일본인 저서로 알려진 『조선사』를 동경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고구려 광개토왕 때 일본은 신라, 백제를 쳐부셨고(破), 광개토왕은 이를 구하려고 일본과 싸웠다”(권2-28쪽)고 적고 있다. 최재석 『고대한일관계사 연구비판』 경인문화사, 2010,34쪽
 다시 말해 비문을 曲解하여 광개토왕은 신라와 백제를 공략하는 일본과 대등하게 전쟁을 하였다는 주장이다. 이어 1893년 管政友의  「任那考」, 1898년 三宅米吉의 「高麗古考」 등이 계속적으로 발표되었다. 이는 일본의 대륙침략전술과 한국사 경시풍조를 반영한 것들이다. 그 외에 일본서기에 의존했던 大和정권의 조선남부=任那지배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비문의 倭관계 기사가 보조적으로 이용되어 神功의 三韓정벌 설화가 정당화되기에 이르렀다. 鈴木靖民/이건하 역 「일본에서의 광개토왕비 탁본과 비문연구」 『고구려발해연구』2,1996, 37쪽


  2) 정인보의 신묘년조 문제제기와 고구려 주어설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 태왕비가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다가, 일본 학자들이 『회여록』을 발간해 내자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그늘 아래 있던 때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뜻있는 학자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위당 정인보가 있다. 정인보는 『조선어문연구』(1930년)에서 「고구려 廣開土大王 碑記」 鄭寅普 「廣開土王陵碑 碑記」 『朝鮮語文硏究』, 延禧專門學校出版部, 1930, 19쪽
를 처음으로 논술하였다. 여기에서 일본인 橫井忠直說의 부당함을 논박하고 있다. 즉 倭가  신묘년(391년)에 백제와 신라를 파하여 신민을 삼았다고 함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병신년(396년)에 고구려와 백제와 싸운 사실에서 반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이미 백제가 일본의 신민이 되었다면 5년 뒤에 고구려와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인보의  ‘사실의 모순’에 관한 단락을 소개한다.

사실의 모순 :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濟新羅以爲臣民이라 한 것이 決定事實이면 첫째, 廣開土王이 丙申年에 百濟를 칠 때 日本軍과 接觸없이 純然히 百濟兵과만 싸우다가 國城에 이르러 國王과 盟約한 것을 보아 百濟主權이 그때까지 依然하였음을 볼 것이니 前六年의 남에게 破降되지 아니 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둘째, 辛卯以來九年인 己亥에 新羅 遣使白王 云倭人滿 其國境 遣破城池라 하였으니 九年前 附屬됨을 實이라하면 새삼스럽게 滿其國境 遣破城池의 急이 있을리 없고 또 前에는 臣民을 甘作하던 新羅로서 무슨 마음으로 援救를 隣邦에 求하였으랴 이 決코 附庸 萬公의 일이 아니며 九年前 남의 臣民된 族類의 일이 아닌 것을 了知할 수 있다.(정인보 「廣開土王陵碑 碑記」1930)

  정인보의 논지는 일인학자의 해석이 역사적 사실과 문맥에 모순되기 때문에 지적했다는 것이다. 倭(왜)가 그 당시 백제와 신라를 공파(攻破)해서 신민을 삼은 사실이 없기 때문에 후에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한 것이라는 말이다. 또 文理가 어긋나므로 백제가 신라를 ‘臣民으로 삼았다는 것은 맞지 않는 소리’ “而謂倭破百濟新羅以爲臣民者 妄也”(정인보 「비문석략」). 본문에는 이를 ‘妄發’이라고 쓰고 있다. 정인보의 「비문석략」은 훗날 이유립이 구두점을 찍어놓았기 때문에 보기에 좋다(이유립『대배달민족사』 2권, 고려가, 1987, 348~350). 그리고 류승국은 ‘以爲臣民’과 ‘爲臣民’은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以爲臣民’은 臣民을 삼으려고 생각하고 여긴 것이고, 사실로 臣民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 정인보는 단호하게 주장한다. 또 그는 「廣開土境 平安好太王陵碑文 釋略」(1955, 이하 「釋略」)에서 신묘, 병신조를 보다 구체적으로 해석했다. 정인보는 「석략」에서 신묘, 병신조를 6개 구절로 나누고, 일본측과 반대되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가 쓴 구두점과 보결에 따라 한문 원문을 재구성하고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  鄭寅普 『薝園國學散藁』 서울, 문교사, 1955, 119~121쪽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태왕의 속민이다. 倭가 辛卯年에 일찍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왔으므로 고구려는 또한 일찍이 바다를 건너가 攻略하여 서로 쳤다. 백잔이 倭와 내통하여 신라에 불리하게 만들었으므로 태왕이 생각하기를, “이들은 나의 신민인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가”하고 怒하여 6년 병신에 大王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여 신라를 이롭게 하였다.(정인보)


  이처럼 정인보는 백잔과 신라가 고구려의 속민이라는 전제하에 백잔이 고구려를 배반하여  왜와 함께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 한 것에 대해 징벌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따라 정인보는 문제의 “百濟□□新羅”의 두 글자 결자(缺字)에 대하여  ‘’(연침)으로 보결(補缺)한다. 鄭寅普 『薝園國學散藁』 서울, 문교사, 1955, 121쪽
 聯侵(연침)이란 “백잔이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하였다” 이형구 「廣開土境 平安好太王陵碑文 釋略」 『백산학보』 32호, 228쪽. 이형구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구당서』(隆到熊津城條)를 인용해 백제와 왜가 내통한 것을 입증한다.
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정인보는 연침설에 대해, “이 연침(聯侵)이 아니라 하더라도 상하를 살펴볼 때, 문장의 의미는 결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鄭寅普 『薝園國學散藁』 서울, 문교사, 1955, 121쪽
이라고 단언하였고, 이어 “만약 백잔과 신라 중에 어느 하나가 왜인과 연합(聯合)하여 그 하나를 침략하였다면, 태왕은 분명 더욱 분노하였을 것” 鄭寅普 『薝園國學散藁』 서울, 문교사, 1955, 122쪽
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연침(聯侵)이란 ‘聯倭人而侵’(연왜인이침) 또는 聯倭侵羅(연왜침라)이다.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쳤다는 뜻이다. 한국의 학자들의 論旨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정인보의 주장을 주로 하여 서술되고 있다. 북한의 학자들도 대체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 박시형은 이 곳 세 개의 복자를 ‘招倭侵(초왜침)’ 또는 ‘聯侵新(연침신)’ 등의 글자로 복원하였다. 박시형 『광개토왕릉비』 푸른나무, 2007, 205쪽
 그런데 다케다는 정인보와 박시형의 학설이 비슷한 점을 들어 鄭.朴설로 불렀다.  鄭.朴설에는 신묘년조 기사에 3개의 주어가 나오나, 金錫亨은 渡海破百殘을 하나로 하여 주어가 倭, 高句麗 두 번 나온다. 일본의 사에키(佐伯有淸)도 주어가 왜, 고구려로 두 번 나오는데, 이는 일본에서 나온 새로운 학설로써 고구려의 주어 중복문제를 해소하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武田幸男 『高句麗史と東アジア』 東京 岩波書店, 2012,157쪽
 
  그러나 정인보의 고구려 중심론에 대하여 중국학자들은 비판적이었다. 왕건군(王健群)은 그의 저서 『호태왕비연구』(1984년)에서 백잔 신라로부터 討利(토리)까지가 모두 44개 글자인데, 이 44개 글자 중에 6번이나 주어가 변하며 게다가 ‘渡海破’처럼 무주어, 무목적어의 귀절과 ‘以爲臣民’처럼 주어, 위어(?)가 없어 불완전한 문장을 그 사이에 끼워 넣는다면 어떻게 읽어낼 수 있겠는가? 王健群, 『好太王碑硏究』,中國 吉林人民出版社, 1984, 153쪽
라고 반문하면서 정인보의 견해를 비평하였다.
  왕건군은 정인보가 나눈 단구에 의한 해석은 그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으며, 해석도 문구가 이상할 뿐만 아니라, 사리에도 통하지 않으며 문제해결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비평한다. 다만 정인보의 목적은  “以爲臣民”의 주어를 고구려나 호태왕에게 옮겨 왜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적이 없다고 함으로써 일본의 ‘임나일본부’의 해석자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데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민영규는 往討(왕토)의 討나 破는 태왕이 비문에서 천자의 권한으로 천벌을 그대로 집행할 때 쓰는 용어로써  ‘渡海破’의 주어는 고구려가 분명하고, 구태여 목적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서 왕건군을 비판했다. 閔泳珪 「鄭澹園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 : 校錄幷序」 『동방학지』46-48, 1985,11쪽
 민영규는 왕건군이 말한 5번의 主語(주어)는 호태왕이 아니라  「석략」에 의하면 백제라고 해야 옳다고 지적한다. 백제가 聯侵新羅(연침신라)하여 以爲臣民하려 하니 어찌 백제 네가 그럴 수 있느냐? 閔泳珪 「鄭澹園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 : 校錄幷序」 『동방학지』46-48, 1985,7쪽
는 것이 태왕의 혁노(赫怒)의 이유이며, 그 결과의 실천적인 정벌 행위가 討倭殘(토왜잔)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묘년조 기사에서 일본의 통설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왕건군의 倭(왜) 주어설은 더 이상 의미없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3) 북한 박시형의 신묘년조 연구

  북한 박시형은 1966년에 『광개토왕릉비』를 평양 사회과학원출판사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이는 1963년 가을,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와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의 합동 연구단체는 현지에서 태왕비 재조사 사업을 진행하여 비문에 대한 신중한 검토와 정밀한 탁본, 실측도를 작성한 결과를 토대로 집필한 것이라고 자부했다. 특히 이 책을 통해서 박시형은 비문의 역사적 사실, 예술적 가치, 일제의 침략적 음모를 폭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문제의 병신년 기사를 ‘백제정벌’란에서 소개하고 있다. 박시형 앞의 책을 인용한다. 박시형은 2001년도에 사망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殘國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오랜 속민들로서 이전부터 조공을 바쳐 왔다.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 왔기 때문에, 우리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가서 그들을(왜)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하고 그들을 저희 신민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대왕은 6년 병신년에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토벌하여 승리하였다.” 위의 책, 202쪽


  박시형은 원문과 원문해석에 이어 新(신), 屬(속), 辛(신), 利(리) 등의 문자를 해석하고, ‘討利(토리)’에 다른 의심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단어를 해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토리는 전승, 전취의 뜻이라고 했다. 또 그는 마지막에 ‘역사적 사실’란을 두어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시도했는데, 항복을 나누어 정리하면 이렇다.
  ○ 신묘년의 의미 : 서기 391년은 태왕이 즉위한 해이다. 그러면 다른 곳처럼 ‘영락원년 신묘’라고 연호를 달지 않았는가? 그것은 이 倭 소탕 사건이 왕의 즉위 이전의 어느 한 달에 있었기 때문이다.
  ○ 비문에 왜를 격파한 고구려의 이름이 누락된 이유 : 이 문장 말고도 주어가 빠진 문장이 비문에 허다한데, 그것들은 당연히 비의 주체가 고구려 혹은 태왕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 신묘년 왜 격파의 역사적 사실 : 『삼국사기』의 「박제상」 열전에는 이 무렵에 고구려 수군이 동해에서 왜를 소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뒤에 설명함) 그러나 이 자체로는 고구려 군대에게는 큰 사건이 아니었다. 하나의 돌발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정벌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삽입구 형식(기사본말)으로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百殘□□□羅 以爲臣民의 보결 : 박시형은 세 개의 복자를 ‘招倭侵(초왜침)’ 또는 ‘聯侵新(연침신)’ 등의 글자로 복원하였다. 위의 책, 205쪽
 즉 “백제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하고, 그들(신라)을 자기(백제)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았다. 왜가 고구려의 동맹국 신라를 넘보면서 침략을 일삼았고, 배신한 백제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하여 그들을 자기 신민으로 만들고 있으니, 고구려의 백제정벌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박시형은 백제가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었는지, 또는 만들려고 했는지에 대해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 일제의 날조 행위 : 일제 관변학자들은 이 문단을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羅,以爲臣民 이라고 했다. 파(破)의 구두점을 바꾸어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이들을 자기(왜)의 신민으로 만들었다”고 선전하였다. 만약 일본측 말대로라면 문장이  ‘倭以辛卯年 渡海來’로 來(래)가 뒤에 와야 한다. 그런데 원문은 來(래)가 앞에 와 있다. 그래서 來渡海, 즉 “왜가 바다를 건너 온 것이 아니라, 왜가 신묘년에 왔고,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서 그들(왜)을 친 것으로” 해야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박시형은 ‘來 渡海破’에서 ‘來’의 주어는 ‘왜’이지만 ‘渡海破’의 주어는 ‘고구려’가 마땅하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정인보의 견해를 받아드린 것이다. 다만 臣民의 주어를 백제라고 주장한 점이 정인보와 다르다. 이렇게 박시형이 정인보와 같이 고구려를 주어로 해석한 가장 큰 이유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에 왜의 전공을 기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그래서 왜가 건너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깨뜨렸다는 뜻이다.

 

3) 4세기 倭의 실체에 대한 논쟁

  신묘년조 기사의 연구 목적은 왜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밝히는데 있다. 비문의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왜가 어떤 정치체이고, 어디에 왔고, 어떤 무력을 가진 집단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다. 그동안 왜의 실체를 밝히기가 어렵고, 단지 서로 다른 논쟁만 있어 왔다. 그 논쟁도 한중일에서 각기 상이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주장을 열거하고자 한다.

 

  (1) 신채호 : 왜가 백제의 교화를 받아 백제의 속국이 되었으나 천성이 남을 약탈하는 것을 좋아하여 도리어 백제를 침략하기 시작하더니 진사왕(재위 385~392) 말년에는 더욱 창궐하여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였다. 그럼에도 백제는 고구려에 석현 등 10여 개의 주(州)와 군(郡)을 빼앗긴 것만 분하게 여겨 391년(광개토왕 원년)에 진사왕이 진무(眞武)로 하여금 고구려의 새 점령지를 습격하게 하는 한편, 고구려와 대항하기 위해 왜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신채호 『조선상고사』(6편「광개태왕의 왜구 격퇴」)
 

  (2) 중국의 왕건군 :  그는 “왜를 북구주(北九州) 일대 독립적으로 존재한 지방정권이나 혹은 일부 일본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정치연합체로 인정하지만, 호태왕비문에 나타난 왜를 倭國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침략 통치하기 위하여 조직한 군대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왜가 백제나 신라를 침범하였다는 것은 북구주(北九州) 일대의, 왜국내 약탈자들이 무리를 지어 해적(海賊)처럼 한반도 남부에 침입하여 살인 약탈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이른바 이위신민(以爲臣民)하였다는 다만 일시적으로 굴복시킨 것으로서 나라와 나라사이에 지배관계가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 王健群, 「광개토왕비문중의 왜의 실체」 『고구려발해연구-광개토호태왕비 연구 100년』2, 서일범 옮김, 고구려발해학회, 1996, 447~449쪽
고 말했다. 

 

  (3) 북한의 박시형 :  그는 왜(倭) 신민(臣民)설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신라와 백제는 원래가 고구려의 속민인데, 만일 왜가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면, 태왕은 당연히 침략자 왜를 쳐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태왕이 백제를 정벌한 것은 백제의 잘못이 고구려의 의사에 반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질서를 위반하며 왜를 끌어 들여 실제로 백제는 397년 5월에 倭(왜)와 수호를 맺었다.(王與倭國結好: 백제본기 아신왕 6년조) 또 비문에도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通”이라 하여 백제가 약속을 어기고 왜와 비밀리에 통했다고 했다.
 (보호받아야 할)신라를 압박하여 신민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묘년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어 일제는 신묘년에 연호가 붙지 않은 것을 빌미로 그 신묘년은 서기 391년이 아니라, 한 주갑 앞당기거나(서기 331년), 또는 두 주갑을 앞당겨(271년) 볼 수도 있다며 꿈같은 잠꼬대로 역년(歷年)을 억지로 자기네에 맞추려고 왜곡했다고 지적한다. 2004년도에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의 태왕릉(太王陵)에서 ‘신묘년’(辛卯年) ‘호태왕’(好太王)이 함께 적힌 청동방울이 발견되었다. 이는 엉터리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증거 자료가 확보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4) 일본의 다케다 : 일본의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는 그동안 논의된 ‘신묘년조 통설’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여 설명한다. 佐伯有淸(사에키 아리키요) 『廣開土王碑』 吉川弘文館, 1974, 272쪽

  ㉠ 신묘년조 비문은 4세기 후반의 일본세력의 조선반도 진출을 분명히 하는 확실한 사료이다
  ㉡ 신묘년의 부분은 倭를 주어로 하며, <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이라고 판독하고, 倭가 백제 신라를 복종시켰다고 해석한다.
  ㉢ 비문 중에 보면, 倭는 日本, 大和朝廷(軍), 日本軍 등 일본의 통일군사력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 이들을 전제로 하여 大和朝廷에 따른 일본의 통일을 생각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야마토 조정에 의한 일본 통일을 4세기 중엽으로 앞당기고 있다. 그래서 4세기 말에 고구려에 대항하면서 백제와 신라를 지배하였다는 억지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5) 연변의 박진석 : 박진석은 서기 392년부터 395년 사이의 백제의 대외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일본 통설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그 때 4년간은 통설대로라면 왜의 신민기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와 5차의 큰 전쟁을 치렀다. 또 396년에는 고구려에게 크게 패해 영원히 고구려의 노객이 될 것을 맹세한다.(永爲奴客) 백제는 전쟁마다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백제가 왜의 신민이었다면 고구려에 대항하여 왜가 (백제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결국 백제 홀로 자기의 실지(失地) 수복(收復)을 위해 고구려에의 항쟁에 집중했을 뿐이다. 이것은 백제가 왜와 무관한 별개의 주권국가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박진석 『호태왕비와 고대 조일관계 연구』 중국, 연변대학출판사, 1993,193쪽
 

  (6) 최재석 :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나타난 왜(倭)나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왜는 일본 원주민이나 야마토왜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발달된 조선, 항해술과 대마도를 병기와 식량의 중간기지로 한 점, 해안을 통해 빈번하게 신라를 침범한 점 등으로 보아 신라를 침범한 왜가 북규슈(北九州)에 존재하는 왜일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신라에 대하여는 약탈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백제에 대해서는 그러한 사건이 한 건도 일어나지 않은 현상으로 보아서 신라를 침범한 왜는 북규슈에 있는 백제계의 왜임이 분명해진다. 비문에 나오는 같은 시기의 왜도 북규슈의 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최재석 『고대한국과 일본열도』 일지사, 2000, 21쪽
 

  (7) 북한의 김석형 : 일찌기 일본 열도내 삼한 분국설을 밝힌 김석형은 ‘『일본서기』나 『고사기』는 일본의 남조선 경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 삼국이 일본 렬도 경영을 말하고 있다.’ 김석형 「삼한 삼국의 일본렬도 내 분국들에 대하여」 『력사과학』 1963, 1호 7쪽
고 결정적으로 언급하였다.  일본의 고분(古墳)문화는 5~6세기까지는 서부 일본에서는 북 큐슈(北九州), 기비(吉備), 기내(畿內)라는 세 개 지역에 국가적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어느 곳의 것이나 한국적인 성격이 농후함을 간취할 수 있었는바, 그 중에서도 현저한 것은 북 큐슈 일대였다. 북 큐슈 서부에 있는 후나야마 고분(구마모도 현)의 주인공과 같은 사람은 5세기 북 큐슈의 이러한 국가 세력을 대표하는 왜왕(倭王)이었을 것이며, 그를 바로 백제 사람으로 보아도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그 무덤의 외형이 전방후원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주인공이 얼마든지 백제 사람일 수 있다. 더욱이 이 무덤의 구조가 횡혈식(고구려, 백제식) 석실을 가졌다. 당시 백제무덤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백제계통의 왕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석형 『고대한일관계사』 한마당, 1988, 301~302쪽
 
  (8) 이종학 : 4세기 말엽, 대화왜(大和倭)의 한반도 출병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사회적, 산업적, 경제적, 군사이론적, 해상세력적 요인에 의한 분석을 통해 불가능했다고 본다. 비문의 왜는 신라의 미사흠(未斯欽)이 사신으로 갔다가 잡혀있는 것을 박제상에 의해 탈출한 왜와 동일하며, 그 왜는 가야로부터의 도래인으로 주로 구성된 부족국가인 대마도 왜이며, 동원 가능한 병력수는 1,000명 내외로 고증한다. 대마도가 대화왜(大和倭)로 귀속된 것은 664년 이후로 생각한다. 이종학 「광개토대왕비문의 왜의 실체에 대한 신고찰」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15,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94, 173쪽
 

  (9) 이형구 : 『일본서기』에는 왜(倭)가 신라를 침범한 사례가 적게 기록돼 있으나, 한 차례도 『삼국사기』와 중복되지 않는다. 두 책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의 즉위년 이전에 왜가 신라를 침범한 것은 모두 20차가 된다. 그러나 왜가 주로 여름철을 이용하여 신라를 자주 침범하였다 하더라도 왜구의 해상 수송문제인데, 고고학상으로는 4, 5세기의 왜는 고분(古墳)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당시 왜의 형편으로는 불과 24인 정도의 인력을 수송할 정도의 나룻배 밖에 없었던 점으로 보아 실제로 동원된 인력은 극히 소규모의 왜구였다. 그리고 그들은 주로 신라의 변경(해안선 일대)이나 도서 지방을 노략질하는 정도였으며, 그나마 모두가 신라군에 의하여 궤멸되었든가 아니면 겨우 살아남은 극소수의 잔병만이 퇴각하는 정도였다. 이형구 『광개토대왕릉비』 새녘, 2014, 199쪽
 

  이상에서와 같이 왜에 대한 제 견해를 소개하였다. 특히 왕건군이 당시의 왜가 해적(海賊)이라는 주장에 대해 일본 측이 반론을 제기하자 논쟁이 시작되었다. 왕건군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에 대해 답했다. 
  첫째, 왜를 국가의 군대로 보지 않고 해적으로 보는 것이 합당한가? 이에 대해 왕건군은 “비문 중의 11개 왜(倭)자는 4차례의 사건을 기술한 것으로써 3차는 왜인의 침입에 관한 것이다. 십몇년 동안 3차례 침입하였다는 것은 그 차수가 많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왜가 늘 침입하고 소란을 피웠다는 것을 증명할 뿐, 왜국에서 파견한 군대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잦은 침입은 왜기 바로 행적을 종잡을 수 없이 출몰하는 해적떼임을 증명해주며, 왜와 반도 남부의 제국(諸國)간에는 국가적 성격의 지배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만약 반도 남부의 제국(諸國)이 모두 이미 왜국의 신민(臣民)으로 되었다면 무엇 때문에 왜국이 늘 군대를 파견하여 저들의 신민을 공격하겠는가?” 王健群, 「광개토왕비문중의 왜의 실체」 『고구려발해연구-광개토호태왕비 연구 100년』2, 서일범 옮김, 고구려발해학회, 1996, 449~450쪽
라고 오히려 반문하였다. 일본이 말하는 소위 대화(大和)정권의 군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답변이다.
  둘째, 광개토왕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5만 군대를 출동했다는 것은 그만큼 왜가 해적이 아니라 강대한 군대가 아닌가? 이에 대해 왕건군은 “고구려가 ‘보기5만’으로 ‘왕구신라’한 것은 왜의 세력이 강대하였음을 말해 주겠으나 그들이 대화정권의 군대라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으며, 이를 과장하여 왜구가 한때 장기간 반도의 남부 제국을 지배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견해는 타당성이 없는 것” 王健群, 「광개토왕비문중의 왜의 실체」 『고구려발해연구-광개토호태왕비 연구 100년』2, 서일범 옮김, 고구려발해학회, 1996, 452쪽
이라고 단정하였다.
  셋째, 『송서(宋書)』에 왜의 연이은 다섯 왕이 남조(南朝) 송에 상표(上表)하여 한반도 남부 제국의 군사 통치권을 요구하였다는 기록에 대하여 왕건군은 “문자상으로 볼 때, 왜왕 진이 남조 송에 상표하여 한반도 남부 제국의 군사지배권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다만 진(珍)의 개인적인 소망에 불과한 것으로 그 어떠한 사실 근거도 없다....그가 한반도를 지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송(宋)은 그의 자칭(自稱) 관직을 제수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를 ‘안동장군 왜국왕’으로만 봉하였을 뿐이다.” 王健群, 「광개토왕비문중의 왜의 실체」 『고구려발해연구-광개토호태왕비 연구 100년』2, 서일범 옮김, 고구려발해학회, 1996, 456~457쪽
고 반박하였다.

 

 

3. 신묘년조 기사의 재해석과 왜의 실체

 

이른바 신묘년조 해석에 중대한 고비를 맞게 만든 것은 비문 조작설이다. 이런 비문조작설이 퍼지기 오래 전에 초기의 한국학자들은 일본의 쌍구본을 의심 없이 대본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의 비문조작설이 국내외 학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비문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이형구는 일본측의 소위 ‘辛卯, 丙申년 기사’에 대한 해석이 결국은 왜를 주어로 놓고서 “왜(倭)가 백제 신라를 파(破)하고, 그들을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라는 식으로 임의로 왜곡하였다고 보고, 현재의 ‘而倭以’(이왜이)가 원형이 아니라, ‘而後以’(이후이)로 추정하여 변조설을 구체화하였으며, 이형구 박노희 「광개토대왕릉비의 소위 신묘년기사에 대하여-僞作 ‘倭’字考」『동방학지』29, 연세대국학연구원, 1981, 28쪽 ;李亨求 朴魯熙 『廣開土大王陵碑 新硏究』 同和出版公社, 1996,113쪽 이하; 이형구 박노희 『광개토대왕릉비』 새녁, 2014
 서영수도 논란이 많은 渡海破(도해파)의 海(해)에 변조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이를 ‘渡王破’(도왕파)로 설명하였다. 서영수 「신묘년기사의 변상과 원상」 『고구려발해연구』2, 1996,  422쪽
 
  따라서 필자는 이른바 신미년조 기사를 중심으로 하여 ‘倭(왜)’와 관련된 글자들 중에 일제에 의해 의도적인 위작이나 변조가 있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而倭以’(이왜이)를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글자로서의 倭(왜)와, 역사로서의 倭(왜)가 이치에 합당한지를 심도 있게 다루고자 한다. 

 

  1) 이형구의 신묘년조 倭(왜)자 위작설

이형구는 「倭(왜)자 위작설(僞作說)」을 1981년에 처음 발표하였다. 이 논문의 핵심은 신미년조의 倭(왜)자를 부동하는 기정자(旣定字)로 고착해두고 주어가 누구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倭(왜)자 자체를 부정하여 새로운 글자를 찾아낸데 있다. 그 답이 後(후)이다. 그러니까 ‘而倭以’(이왜이)가 아니라, ‘而後以’(이후이)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而後以’(이후이)가 현재의 ‘而倭以’(이왜이)로 변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상으로는 “왜[왜구]가 백제나 신라 또는 가라를 파할만한 실력을 갖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또한 서법상으로도 倭(왜)자는 수많은 의문점과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형구 박노희 『광개토대왕릉비』 새녁, 2014, 270쪽
고 밝혔다. 특히 그는 이 倭(왜)자가 신묘년 기사에 끼어 들 수 있었던 것은 서법상으로 後(후)자가 쉽게 倭(왜)자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어 이를 규명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로 일본 육군참모본부 사카와가 작성한 쌍구가묵본의 맨 끝에 출처가 묘연한 後(후)자 1자가 첨가 되었었는데, 나중에 이 글자가 돌연히 삭제되었다는 사실에서 원형의 後(후)자를 倭(왜)자로 바꿔치기하는 모종의 공작이 진행되었으며, 그런 과정 중에 처음 쌍구가묵한 後(후)자를 비문의 제일 마지막에 잘못 잔류시키는 실수를 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쌍구가묵본의 맨 끝에 이유없이 붙어 있는 後(후)자
쌍구가묵본의 신묘년 기사에 나오는 而倭以’(이왜이)의 倭(왜)

 


  그러면 이형구는 지금의 ‘而倭以’(이왜이)의 倭(왜)자가 허구임을 어떻게 밝히고 있는가?
  우선 그는 비문에 나오는 모든 倭(왜)자를 취합하여 비교 대조작업을 한다. 확인된 倭(왜)자는 비문에 신묘년기사의 倭(왜)자(1면-9행-6자)를 비롯하여 2-6-40, 2-7-15, 2-8-31, 2-8-39, 2-9-36, 2-9-38, 3-3-13, 3-4-13 등 모두 9번 나온다. 이 중에 그는 倭賊(왜적)이나 倭寇(왜구)라는 단어들은 조작해 넣을 수 없는 글자이기 때문에 이 둘을 원형의 倭(왜)자로 보고, 이 두 글자와 신묘년 倭(왜)자와의 비교를 시도한 것이다.

이형구가 인용한 신묘년 기사중의 倭(왜)자 판본들
금자구정의 원탁 왜자
대만 부사년도서관 원탁 왜자
임창순 구장 청명본 원석 왜자

왜1

왜2

왜3

 

이형구가 인용한 다른  倭(왜)자 판본들
금자구정의 원탁 倭賊(왜적)의 倭(왜)자
대만 부사년도서관 원탁 倭寇(왜구)의 倭(왜)자
임창순 구장 청명본 원석 倭寇(왜구)의 倭(왜)자

왜4

왜5

왜6


  이상에 대해 이형구는 왜구의 <왜5> 倭(왜)자는 ‘⺅’ 변과 ‘委’체가 적당한 간격으로 구성돼 있고,  ‘⺅’ 변만 분석해 봐도 곧게 내려 그었다[ㅣ]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묘년 倭(왜)자들은 공통적으로 ‘⺅’ 변과 ‘委’체가 붙어 있고, ‘⺅’ 은 ‘⼻’이 흔적이 있으며, [ㅣ](竪(수))는 하부에서 약간 좌향한 것으로 보았다.
  또 <왜5> 倭(왜)자의 ‘禾’(화)와 ‘女’(여)부가 1:1의 비율로 구성돼 있고, 禾(화)의 木(목)부의 수[ㅣ]는 상하가 거의 같은 직선으로 내려 긋고 있다. 그러나 신묘년의 倭(왜)자의  ‘禾’(화)는 꼬부라져 붙어 있는 듯하고, 마치 六(육)자처럼 보이며, 아래의 ‘女’(여)자도 다른 글자를 고친 것처럼 획이 불안정하다고 분석했다. 이런 이유를 들어 이형구는 倭(왜)자는 변조된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형구 박노희 『광개토대왕릉비』새녁, 2014, 223~227쪽
 
  그러면 본래 어느 글자를 변조했는가? 이형구는 倭(왜)자가 後(후)자를 변조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 근거로 비문의 실제 사용된 後(후)자들을 분석하였다.


이형구가 인용한 비문에 등장하는 後(후)자들 이형구 박노희 『광개토대왕릉비』새녁, 2014, 228~230쪽

대만 부사년도서관 後(후:1-3-6)
임창순 구장 청명본 後(후:1-6-34)
금자구정의 원탁 後(후:2-5-6)

 

이형구는 신묘년의 倭(왜)의  ‘⺅’ 변과 後(후)의  ‘⼻’변은 유사한 흔적이 있고, 만일 원래  ‘⼻’이었다면 능히 위로 연장하여 ‘⺅’로 조작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 변의 하단이 왼쪽으로 휜 것은 倭(왜)보다는 後(후)의  ‘⼻’변에서 자주 보이는 필법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倭(왜)의 ‘⺅’ 변과 ‘委’체가 간격이 없이 붙어 있고, ‘委’방의 필획이 어색하며 떨어져 나간 점이 많이 보이는 것은 後(후)자를 倭(왜)자로 변조할 때 생긴 흔적으로 보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신묘년 기사의 倭(왜)자는 비문의 원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가자(假字)이며, 원문에는 後(후)가 새겨졌을 것으로 주장했다. 따라서 현재의 ‘而倭以’(이왜이)는 ‘而後以’(이후이)로 복원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어 조공(朝貢)의 여부를 중요시 하여 ‘來渡海(래도해)’도 不貢因(불공인)으로 바꾸고, 빠진 글자를 倭寇(왜구)로 보결하였다. 그가 말한 신묘년 기사의 복원된 최종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형구 박노희 『광개토대왕릉비』새녁, 2014, 263쪽
 이로써 신묘년 기사는 倭(왜)가 주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보결문] 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後 以辛卯年來 不貢 因破百殘 倭寇 新羅 以爲臣民
[해석]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는데, 그 후 신묘년부터 불공(不貢)하므로 (광개토대왕은) 백잔(백제) 왜구 신라를 파하고, 이를 신민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형구의  而倭以(이왜이)에 대해 일부 부정적인 지적이 나왔다. 우선 서영수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倭(왜)자를 부정할 수 없고, 탁본의 서체상이나 비문의 문장 구조로 보아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의 지적은 구체적으로 而後(이후)와 以後(이후)를 구별해야한다는 것이다. 서영수 「신묘년기사의 변상과 원상」 『고구려발해연구』2, 1996,  419쪽
 또 일본의 시라사키(白崎昭一郞)는 “而(이)와 倭(왜)에 대해서는 전혀 이론(異論)이 없다. 참모본부 개찬설을 주장한 이진희씨도 이 글자를 조작이라 주창하지 않았다.” 白崎昭一郞 『廣開土王碑の 硏究』 吉川弘文館, 平成5년(1993), 151쪽
고 밝혀 이형구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비문 倭(왜)자 현지사진 촬영본
周雲臺 탁본에 나오는 倭賊(왜적)자 王健群, 『광개토왕비연구』임동석 역, 역민사, 1985, 436쪽

周雲臺 탁본에 나오는 倭寇(왜구)자 王健群, 『광개토왕비연구』임동석 역, 역민사, 1985, 437쪽


<왜만?>
2-9-36

<왜적>
2-8-39


<왜구>
3-4-13

 

  2) 而倭以(이왜이)를 而帝以(이제이)로 바로잡는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형구는 而倭以(이왜이)에 중대한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비문 연구상에 일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이 신묘년조가 광개토태왕이 등극하는 해(391년)이므로 신묘년 등극의 서두는 태왕(太王)으로부터 시작되어야 문장의 이치가 맞다고 생각한다.
  이 신묘년조는 다시 말해 임금이 신묘년에 등극한 이래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등극한 신묘년에 倭(왜)가 등장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비문의 서두에 倭(왜)를 언급할 하등의 정치적 역사적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倭(왜)자가 위작이나 개작의 글자라고 보는 것이다. 이제부터 그 근거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러면 이형구가 倭(왜)자에 의혹을 가졌던 이유와 이를 확인해가는 과정을 다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형구가 비문 내에서 같은 倭(왜)자들을 상호 비교분석한 일이다. 필자도 이 방법을 따르고자 한다.
  비문내 에서 倭(왜)자는 이형구의 지적처럼 모두 9번 나온다. 그 중에 단독으로 있는 倭(왜)자와는 달리 倭賊(왜적)이나 倭寇(왜구)같은 단어는 글자 전체를 없애지 않는 한 임의로 조작이나 변조하기가 어려운 글자들이다. 이형구가 시도한 그 비교법에 따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금자본에 나오는 倭(왜)자의 다른 형태
기본 倭以

<왜불>
3-3-13

<왜구>
3-4-13

<왜인>
2-7-15
<왜적>
2-8-39

<왜이>
1-9-6


  먼저 금자본(金子鷗亭本, 이하 金子本)을 보면, 정상적인 倭(왜)자로는 아무래도 倭寇(왜구)와 倭賊(왜적)의 倭(왜)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글자를 다른 글자로 바꾸지 않는 한, 다른 글자를 변조하면서까지 이 자리에 倭(왜)자를 새길 일본인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왜구나 왜적은 손댈수 없는 원형의 왜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의 倭以(왜이)의 倭(왜)자는 ‘⺅’와 ‘委’가 딱 붙어 있으나, 왜구와 왜적의 倭(왜)자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떨어져 있다. 특히 왜적의 倭(왜)의 ‘⺅’는 위 아래가 반듯[ㅣ]한데, 왜이의 倭(왜)는 아래부분이 좌측으로 기울었다. 겨레얼본의 왜이의 倭(왜)자에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倭以(왜이)의 倭(왜)는 가장 의심스러운 글자이다.

 
필자 촬영본에 나오는 倭(왜)자의 다른 형태(겨레얼본) 『광개토대왕릉비 탁본』(겨레얼본), (사)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4347(2014), 4~32쪽

기본 倭以

<왜불>
3-3-13
<왜만>
2-9-36

<왜구>
3-4-13

<왜적>
2-8-39

<왜이>
1-9-6


  이상을 통해 필자는 왜이의 倭(왜)자에 조작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그 글자의 원형은 임금 帝(제)자임을 밝히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태왕의 즉위년인 신묘년에 왜가 등장할 만한 사료의 근거도 없다.  『삼국사기』(「광개토왕조」)에 의하면, 신묘년에 남벌백제(南伐百濟), 북벌거란(北伐契丹) 등의 말은 있어도 倭(왜)에 대한 정벌 등의 기록은 없다. 다만 신묘년부터 백제를 정벌하였다는 것은 그 다음 渡海破(도해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辛卯年來(신묘년래)의 來(래)는 以來(이래)로의 의미로 새기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 이형구가 이 倭(왜)자가 後(후)의 변조라는 주장은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다. 다만 신묘년의 주어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필자는 이 辛卯年來의 주어는 王(왕)이어야하는데, 이형구가 지적한 그 後(후)자와 가장 유사한 글자는 天帝子(천제자)의 帝(제)자라고 본다. 
  ㉢ 그러면 실제 帝(제)자의 용례(用例)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삼국사기』에는 제(帝)자의 사용례가 없다. 단지 중국 황제의 이름만이 등장할 뿐이다. 예컨대 장수왕의 경우에 ‘安帝封王高句麗王樂安郡公’이라 하여 중국 안제(安帝)가 장수왕을 고구려왕 낙안도공이라고 했다(宋書의 기록)는 것이다. 이는 중국을 높여 제(帝)라 하고, 고구려를 낮추어 왕(王)이라는 사대적 서술체계에 충실히 따른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기이 1」)에는 『국사』(고구려본기)를 인용하여 ‘고구려 시조왕을 동명성제(始祖 東明聖帝)’라 칭하였으며, 남당 박창화 박경철 「南堂 朴昌和의 高句麗에 관한 小考」『남당 박창화의 한국사인식과 저술』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17.10. 참조 :우리 역사와 관련된 南堂 朴昌和先生의 遺稿(이하 ‘南堂遺稿’로 약칭)는 量的으로 매우 큰 규모인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그리고 1989년 “花郞世紀”의 존재가 확인됨을 계기로 그 全貌의 일부나마 世間에 알려지게 되었음은 周知의 사실이다. 이 ‘남당유고’에는 “花郎 世記”를 포함한 新羅史 관련 자료・疆域認識論・史料批判論・百濟史 관련 자료 등 多種・多樣한 내용 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2001년 國史編纂委員會 史料調査室은 이 ‘남당유고’에 대한 사진 촬영과 이의 DB화 작업 이 수행한 바 있다. 또 2012년 ‘의성 조문국 박물관’은 이 國編 DB의 影印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학계의 ‘남당유고’로의 接近性을 제고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발표자의 이번 작업 역시 당 影印本을 바탕으로 수행한 것임을 밝혀둔다. ‘南堂遺稿’ 중 양적으로는 신라사 관련 자료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南堂 高句麗 관련 資料(이하 ’高句麗資料‘로 약칭)’이다. 이 중 가장 유의미한 고구려사 관련 자료 가 2008년 이미 飜譯・出刊되어진 바 있다.  특히 광개토태왕이나 장수왕은 「小獸林大帝紀高句麗史」(16世~20世)(遺稿影印7: 원고지–일본)속에 있다. 광개토태왕을 第十九世 永樂大帝紀로, 장수왕을 第二十世 長壽大帝紀로 적고 있다.
가 남긴 『고구려사 초.략』(「장수대제기」)에는 장수왕(長壽大帝)이 아버지 광개토태왕(永樂大帝)을 ‘선제(先帝)’라고 칭하고, 스스로를 ‘천자(天子)’라 칭한 부분이 있다. “上, 問於<春>太子, 曰;“先帝戒我, 以終身二后. 我已不能守矣. 天子之宮道, 果何如乎.” (상이 <춘>태자에게 이르길; “선제께서 저에게 이르시길 평생 동안 후를 둘만 두고 살라 하셨는데, 저는 이미 그것을 지킬 수가 없이 되었습니다. 과연 천자의 궁중도리는 어떠한 것입니까?”)
 물론 비문 안에는 왕(王) 또는 태왕(太王)이 호칭만이 남아 있으나, 이 사서에는 제(帝)나 천자(天子)의 호칭이 남아 있다는 것은 『삼국사기』와는 다른 계통의 저작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후에 부왕(父王)을 帝(제)라 칭한 데서 ‘而倭以(이왜이)’는 ‘而帝以(이제이)’로 조작이 가능하다고 보아 위작, 변조라고 보는 것이다. 박진석도 고구려시대의 왕은 황제와 같은 신분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태후(太后), 후(后), 왕후(王后)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다고 했다. 박진석 『고구려역사 제문제』 경인문화사, 2011, 430쪽
 비문의 王躬率(왕궁솔)을「고구려국본기」에는 帝躬率(제궁솔)이라고 적고 있다.

 天帝子의 帝(제)자와 倭(왜)자 탁본(금자본)과 그 필순
  ㉣ 금자본이나 대만 부사년도서관본(이하 부사년본)의 倭(왜)자와 帝(제)자를 비교해보면, 금방 두 글자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제의 1번 자리에 왜의 3번을 그리고
2) 제의 2번 첫 자리에 왜의 1번을 그리고
3) 제의 7번 자리에 왜의 2번을 올려 그리고
4) 제의 3번,5번과 4번,6번을 이용하여 왜의 6번, 7번을 그리고
5) 제의 8번을 이용하여 왜의 10번을 그리고
6) 제의 9번을 이용하여 왜의 8번,9번을 그리다.

 

금자본 倭(왜)자의 하단부
금자본 천제자의 帝(제)자 하단부

 

㉤ 倭(왜)의 8번, 9번 사이에 필요 없는 세로획이 남아 있는 것은 帝(제)의 9번 획의 잔영이라고 볼 수 있다. 帝(제)자처럼 아래를 크게 쓴 글자를 ‘하부확대(下部擴大) 자형’이라고 한다. 이는 기존의 상하 균형을 유지하는 서법(書法)을 파괴하는 자형으로 이 帝(제)자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박진석 『호태왕비와 고대 조일관계연구』(연변대출판사,1993)박이정, 1996, 113쪽

 

원형 天帝子의 帝(제) 금자본
帝(제)자를 倭(왜)자로 변조
샤반느탁본 倭以

 

 ㉥ 帝(제)자를  倭(왜)자로 변조한 과정을 추정하여 그려보면, 특히 委(위) 하단부 女(여)자의 가로 획(10번)이 너무 길다는 점이 단서가 되고 있다. 이것은 帝(제)의 8번 가로 획순을 이용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또 倭(왜)의 2번 세로 획도 帝(제)의 7번 세로 획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 특히 1907년 프랑스 동방학자 에두아르 샤반느Edouard Chavannes (1865~1918)가 광개토태왕비를 현지조사하고 탁본을 구입한 것이 소위 ‘샤반느 탁본’ 『通報』제9권제9호(이진희 『廣開土王陵碑の硏究』별책부록 재인용)
인데, 이 탁본에 있는 倭以왜이의 ‘倭왜’가 유독 크게 손상되었다는 것에서도 倭왜자의 변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본래 倭자였다면 변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 帝자였다고 보고, 帝자였기 때문에 倭로 변조하기 쉬었을 것이다
 ㉧ 끝으로 百殘連倭문제이다. 그동안 百殘(連侵)新羅로 보고 해석함으로써 고구려가 왜를 파破하고, 百殘□□□羅의 주어는 왜가 아니라 백제가 되는 것으로 보았으나, 이찬구 「광개토호태왕비문의 신묘 병시년조 기사에 대한 고찰」 『세계환단학회지』 3권 1호, 2016. 6, 139쪽
 이제 帝제를 주어로 보는 경우에는 달라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連侵연침을 ‘連倭연왜’로 수정한다. 이형구의 ‘파백잔왜구’와도 그 뜻이 부합한다. 백제와 왜를 동시에 連破연파했다는 것은 이때의 왜가 북큐슈(北九州)의 백제계 왜였기 때문에 백제와 왜는 자연히 동맹의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破의 주어는 帝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신묘년조 기사 중에 而倭以(이왜이)를 而帝以(이제이)로 바로잡아 주어가 태왕임을 분명히 밝혀, 태왕이 문장의 주어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아울러 百殘連倭(백잔연왜)라 보결한 것은 4세기 태왕 당시의 왜가 북규슈에 있던 백제 계(系)의 왜(해적떼)이기 때문이다. 당시 백제와 왜는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로써 주어인 帝가 밝혀짐에 따라 일제가 그동안 날조해온 임나일본부설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럴 경우 원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일본측 원문) 而倭以 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일본측 해석) 왜(일본)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臣民을 삼았다.
(바로잡은 원문) 而帝以 辛卯年來 渡海破百殘連倭 新羅以爲臣民
(바로잡은 해석) 임금(태왕)께서 신묘년에 등극한 이래로 (수년 간) 바다
를 건너 백제에 이어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보호하고자 하였다.

 


4. 경자년조 기사의 임나가라와 분국설에 의한 임나의 실체


  1) 경자년조 기사의 임나가라

  비문에는 신묘년(391)조 기사(而帝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連倭)  외에도 왜에 관한 중요한 기사가 또 있다. 바로 경자년(400)조 기사이다. 문정창은 新羅城~任那까지의 구절이 고대 한일관계사상 중차대한 사건이라고 큰 의미부여를 했던 곳이다. 문정창 『일본상고사』 백문당, 1970, 649쪽
 마멸된 글자들이 많아 문단 후반부는 해석이 어렵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晨城 倭寇大潰 城大□□□□□□□□□□□□□□□□□九盡□□倭安羅人戍兵新□□□□其□返還□□□□□(3면) □□□□□□□□□□□□□□□ □□□□□□□□□ □道江□□□□□□□□殘倭潰□□□□□蘿人戍兵
▶ 10년 경자(400년)에 교칙을 내리고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라 하였다. 남거성을 경유하여 신라성에 다다르자 그 중도에 왜병이 가득 숨어 있었는데 관군이 도착하여 왜적을 퇴각시켰다. □□□□□□□ (바다 건너) 왜의 등뒤로 와서 배후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성을 모두 빼앗아 항복 받았다. 이에 (현지의) 안라인 수병으로 하여금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 진성을 되찾아 왜구를 크게 궤멸시켰다. (이하 불명)

  여기에 임나가라 즉 임나가 등장한다. 비문의 임나가라에 대해 초기 해석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박시형(1964년)은 “고구려군은 급히 왜적을 추격하여 임나가라 종발성에까지 이르니 그 성이 곧 함락되었다. 여기의 임나가라라는 것은 6개의 가야 제국가운데 하나인 금관가야를 가리킨다.” 박시형, 『광개토왕릉비』 푸른나무, 2007, 233~234쪽
라고 말했다. 그는 그 근거로 강수(强首)가 임나가라 사람(任那加良人)의 후손이었다는 말과, 진경(眞鏡)대사가 임나왕족 김유신의 후손이라는 점을 들었다. 중국의 왕건군도 임나가라를 당시 조선반도 남단의 일개국가로, 즉 6가야중의 하나인 금관가야(金官加耶)로 설명하고, 그 위치를 지금의 낙동강구와 김해로 추정하였다. 王健群, 『好太王碑硏究』,中國 吉林人民出版社, 1984, 218쪽
 이형구도 임나가라를 낙동강 하류의 김해 일대에 있는 금관가야로 보았다. 이형구, 박노희 『광개토대왕릉비 신연구』 동화출판사, 1986, 89쪽
 
  이병도는 비문의 임나가라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변진(弁辰)제국으로 낙동강 방면에 있는 나라 가운데는 중유역(中流域)의 임나(任那), 하(下)유역의 가라(加羅)가 정치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가장 우월한 지위에 있었던 것 같다” 이병도 『한국사대관』보문각, 1964, 62쪽
며 임나와 가라를 구별하고, 임나는 대가야국이라 하고, 가라는 가야(加耶)와 같다고 했다. 이와 같이 임나가라의 위치는 김해를 비롯하여 고령, 또는 창원(임나)과 김해(가라)의 합칭 등으로 보고 있다. 남재우 「광개토왕비문과 송서로 본 왜의 가야인식과 임나일본부」『지역과 역사』35호, 부경, 2014, 44쪽

  『삼국사기』에 나오는 가야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를 비교분석한 최재석은 두 사료에 대해 “가야와 임나에 관한 기사 가운데 동일 시기, 동일 내용의 것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다” 최재석 「삼국사기의 가야와 일본서기의 임나, 가라기사에 대하여」『민족문화』22, 1999, 91쪽
며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결론지었다. 『일본서기』에 가야라는 지명이 없듯이,  『삼국사기』에도 ‘임나’라는 지명이나 연표가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임나가량(任那加良)이라는 말이 ‘강수열전’에만 나올 뿐이다. 최재석도 비문의 ‘임나가라’에서 임나와 가라는 동일한 나라가 아닌 두 나라이며, 임나가량은 임나의 한 지역(지명)인 ‘가량’ 사람이라는 뜻으로 한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최재석 「末松保和의 日本上代史論 批判」『한국학보』53, 1988, 241쪽. 최재석은 末松保和가 말한 ‘한반도 남단의 가야가 곧 임나라는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열도의 임나는 한반도의 가야가 망한지 80년~100년을 더 존속하였으므로 별개의 정치체임이 분명하며, 같은 이유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라도 다른 정치체인 것이다. 
  이처럼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가 한반도에 존재할 수 없는 지명이라고 주장한 최재석은 한국내 국명을 본 딴 지명이 도리어 일본열도를 뒤덮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재석 「가야사연구에서의 가야와 임나의 혼동」『한국민족학연구』1, 1993, 41쪽
 


고대 한일 관계지도(문정창) 문정창 『일본상고사』(「임나론」) 백문당, 1970 지도

왜열도의 가야계통 지명(윤내현)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만권당, 2016, 600~601쪽

 

45 오카야마현 가와카미군 46 오카야마현 기비군
47 오카야마현 아테쓰군 48 오카야마현 쓰쿠보군
49 오카야마현 마니와군 50 오카야마현 도마타군
51 오카야마현 고지마군


  2) 분국설에 의한 일본열도내 임나

  일본에서 임나 연구가 처음 시작된 것은 대개 1893년 간 마사토모(管政友)의 『임나고任那考』로 보는데, 그가 임나 관계의 지명을 한반도로 본 최초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일본의 침략주의를 뒷받침하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더욱이 비문 연구 성과를 이용해 임나의 위치를 획정하는데 결정적 근거로 삼았다는 면에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만권당, 2016, 556쪽

  임나연구는 해방이후에도 일본의 독점이 계속되었는데, 우리는 1960년대 들어서야 일본인들의 임나연구와 임나일본부에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북한은 김석형이고 이를 조희승이 계승하였으며, 남한은 문정창이고 이를 최재석, 이병선이 계승하였다. 전자는 임나의 위치를 오카야마(岡山)현으로 보고 있으나, 후자는 대마도와 그 일대로 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1) 문정창의 대마도설
  먼저 문정창은 『일본상고사-한국사의 연장』(1970)을 집필하며 「임나론」, 「광개토왕훈적비」를 포함시켜 임나문제를 본격 거론하였다. 임나는 대마도뿐만 아니라 일기도(一岐島) 및 주변 도서내 10여 개국으로 이루어진 연방체로서 한반도 이외에서 찾아냈다. 문정창 『일본상고사』(「임나론」) 백문당, 1970, 587쪽
 그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이 ‘한국의 김해 6가야가 일본서기상의 임나연방일 것’ 문정창 『일본상고사』(「임나론」) 백문당, 1970, 592쪽
이라고 호도하면서 감히 임나를 한반도에 강제 상륙시켰다고 비난했다. 이어 최재석도 임나가 대마도(對馬島)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최재석 「末松保和의 日本上代史論 批判」『한국학보』53, 1988, 240쪽
 이어 “임나는 쓰쿠시(筑紫)에서 2천여 리의 위치에 있으며 북쪽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신라의 서남쪽에 있다는 『일본서기』 숭신 65년조의 기사는 지금의 대마도임을 확실히 전해준다” 최재석 『고대한국과 일본열도』 일지사, 2000, 20쪽
고 밝히고, 일본열도와 같이 대마도에도 백제, 신라, 고구려라는 지명(국가명)이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백제가 임나와 임나일본부 관인(官人)을 소집하고 꾸짖고 통제한 수많은 기사는 외면한 채, 일본 관인이 임나왕이 백제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한 사례 한 가지 기사(흠명5년 2월-544)에 의해 일본부가 임나를 집배했다는 주장은 할 수 없다” 최재석 『고대한국과 일본열도』 일지사, 2000, 464쪽
고 말하고, 이로써 임나에 대한 임나일본부의 지배증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병선도  『일본서기』의 ‘임나하한지정(任那下韓之政)’에서 임나는 대마도이고, 하한은 대마 하도(下島)이며, 고대 대마도가 kara(한) 즉 한향지도(韓鄕之島)라고 했다. 이병선 「가야사의 재구와 임나 문제」 『인문연구논집』5, 2000, 18쪽
 『환단고기』(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도 임나는 대마도의 서북경계에 있다(任那者本在對馬島西北界)고 했다. 이에 관하여는 윤창열의 설명이 참고할만하다. 윤창열 「광개토태왕비문과 환단고기의 정합성」『세계환단학회지』5권1호, 세계환단학회, 2018.5, 96~101쪽
 

  (2) 김석형의 일본열도 분국설

  다음으로 김석형은 「삼한 삼국의 일본 렬도 내 분국들에 대하여」(1963)에서 “본토에서 백제, 신라, 가락 등의 세 나라가 발전하게 된 기원 후 시기에 들어와서 이러한 련계는 복잡성을 띠게 되었다. 저러한 삼한 사람들의 집단 거주지-분국(分國)들 중에는 삼국에 신속(臣屬)하는 것들도 있었으나 본래대로 남아 있었던 것도 있었다. 백제, 신라, 가락 삼국의 분국들이 생기었고, 본토와 관계가 멀어진 진한, 마한의 분국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 이는 삼한 시절에나 삼국시절에도 분국(分國)이라는 것이 군사적 정복에 의하여 설정된 것이라기보다도 주로 전통적인 정치 경제적 관계에 기초한 것이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 분국들은 수십 개도 넘었으며 그것들은 쥬고꾸(中國) 중국(中國)은 美作, 備中, 백노, 비전, 비후를 포함한다.
, 이즈모(出雲) 기내(畿內) 기내(畿內) 지방은 대화(大和), 하내(河內), 섭진(攝津), 산성(山城), 근강(近江) 등을 포함한다.
야마토 등에 분포되어 있었으리라고 말하였다. 그러한 곳들의 적은 분국(分國)들은 본국(本國)들의 계통별로 일정한 련합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개개의 분국들이 분산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은 적은 산성(山城)들이 가까운 곳에 몰려 있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김석형 「삼한 삼국의 일본 렬도 내 분국들에 대하여」 『력사과학』1963,1호, 24~25쪽
고 밝혔다. 이 논문이 일본학계에 충격을 주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요시노 마코트(吉野誠) 『동아시아속의 한일2천년사』한철호 옮김, 책과 함께, 2005, 59쪽
 윤내현은 삼국에서 고구려를 포함하여 사국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바 있다.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만권당, 2016, 564쪽 (주6번)

  이런 김석형의 분국설을 계승한 조희승은 대마도가 아닌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그의 결론은 임나가 일본 오카야마(岡山)현에 있다고 했다. 이는 일본 측이 주장하는 바,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연구결과이다. 조희승은 임나의 위치를 네 곳으로 추정했고, 그 가운데 오카야마현 기비(吉備) 일대에 임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임나는 가야의 분국(分國)이라고 결론지었다. 조희승 『북한학자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이덕일 주해, 말, 2019, 205~211쪽
 

  첫째, 가와찌(河內) 일대  둘째, 기비(吉備) 일대,
  셋째, 이즈모(出雲) 일대, 넷째, 큐슈(九州) 일대. 

  나아가 조희승은 가야의 분국(소국)뿐만 아니라, 오꾸군(邑久郡) 일대를 신라 분국으로, 오꾸군의 북쪽에 있는 아까이와 군(赤磐郡)은 백제 분국, 구메군(久米郡)은 고구려 분국으로 밝혔다. 조희승 『북한학자 조희승의 임나일본부 해부』이덕일 주해, 말, 2019, 244~252쪽
 

김해에서 기나이까지 고대항로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칼과 현』2019. 111쪽

임나, 고구려, 백제, 신라 분국의 위치도(조희승)

1)김해-대마도 북-오키노시마-북큐슈-오카야마-기나이
2)김해-대마도 남-이키노시마-북큐슈-오카야마-기나이

 

 

  (3) 계연수의 躡跡而越(섭적이월)의 임나

  그러면 경자년조 기사에서 말하는 임나가라는 어디인가? 필자는 임나가라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임을 입증하기 위해 계연수(桂延壽)의 비문징실을 참고하고자 한다. 이유립에 의하면 이기(李沂)는 당시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왕비를 계연수가 직접 볼 수 있도록 여비를 마련해준다. 계연수는 1898년 5월과 1912년 두 차례 친견하고 결자를 찾아 「광개토왕성릉비문징실」(이하, 비문징실 또는 결자징실) 이유립 『대배달민족사』2, 고려가, 1987, 339~340쪽 ; 『대배달민족사』5, 437~467쪽
을 남겼다. 비문 총 1,802자, 결자 117자, 이중에 138자를 징실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어 제자인 이유립은 이를 토대로 「광개토성릉비문역주」를 남길 수 있었다.
계연수는 1912년에 태왕비를 재답사한 결과 태왕이 왜를 정벌한 비문의 내용이 크게 훼손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1931년 제자 이유립은 계연수의 ‘비문징실碑文徵實’을 세상에 공개한다. 계연수의 「비문징실」에는 이 경자년조 기사에 관련하여 중요한 보결이 이루어졌다. 계연수의 8자 보결(官兵관병 躡跡而越섭적이월 夾攻협공)과 왕건군의 2자 보결(自倭자왜) 王健群, 『好太王碑硏究』,中國 吉林人民出版社, 1984, 圖 4-37
의 倭(왜)를 취한 결과 다음과 같다. 영희 王健群, 『好太王碑硏究』,中國 吉林人民出版社, 1984, 附錄 3
와 김육불 王健群, 『好太王碑硏究』,中國 吉林人民出版社, 1984, 附錄 9
도 官兵(관병)~躡(섭)을 보결한 바 있다.
 倭賊退□□□□□□□□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倭賊退官兵躡跡而越夾攻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8자 보결)
▶왜적을 퇴각시켰다. 관병이 그들의 도망가는 자취를 밝아 <바다건너> 협공하면서 왜의 등에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여기서 문제는 ‘바다를 건넜다’는 해석의 근거이다. 이병선도 ‘바다를 건너서’로 해석하여 躡跡而越(섭적이월)의 越(월)을 곧 渡(도)의 뜻으로 보았다. 이병선 「가야사의 재구와 임나 문제」 『인문연구논집』5, 동의대인문연구소, 2000, 28쪽
 육지에서 퇴각한 왜적의 뒤를 쫓아 바다 건너까지 추격해서 소탕했다는 뜻인데, 그 종착지가 임나가라 종발성이다. 다시 말해, 임나가라는 가야의 분국이지만, 왜적이 임나의 오카야마현까지 숨어 도망갔다가 소탕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정인보는 「비문석략」에서 신묘년조의 渡海破(도해파)에 대해 해석하기를, “고구려 군사가 같은 방식으로 언젠가 바다를 건너가서 왜를 침공했다는 뜻” “渡海破者 句麗之師又嘗渡海往侵” (「비문석략」). 정인보 『조선사연구』하, 문성재 역, 우리역사재단, 2013, 878쪽
이라고 했다. 태왕의 재위 중에 바다건너 왜를 소탕한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인데, 400년 경자년조에서 고구려 수군이 대일(對日) 도해작전을 수행했을 것으로 연상해볼 수 있는 구절이다. 남창희 『한일관계 2천년 화해의 실마리』상생출판, 2019, 108쪽
 이상과 같이 비문에 의해서도 임나(임나가라)의 존재는 한반도가 아니라 바다건너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임나는 왜열도나 대마도 중에서 한곳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고, 둘 다는 물론이요, 더 많은 곳에서 임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결론 –일제의 한반도 임나일본부설은 거짓말이었다.

  일본인의 손에 닿는 유적, 유물마다 조작되고 변조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일제는 36년 동안 한국인에게서 역사의 혼을 파괴해 왔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광개토태왕릉비였던 것이고, 그 중에 신묘년조 기사인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이다. 이병도 조차도 이 구절의 전후문맥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제가 조작의 손질을 뻗친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병도, 앞의『한국고대사연구』381쪽
 필자는 이 구절에 변조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이왜이(而倭以)를 이제이(而帝以)로 바로 잡아 태왕이 이 문장의 주어임을 분명히 하고, ‘이위신민以爲臣民’이 말하는 신민(臣民)의 주체도 왜가 아니고 태왕이므로 임나일본부설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왕건군은 이 구절을 두고 일본 측이 일찍이 가야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여 한반도 남부를 장기간 통치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해왔으나,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단정하였다. 만약 백제가 명확히 왜의 신민이 되었고, 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었다면, 고구려의 대규모 진공시 왜가 나와서 백제를 구원을 하거나 싸움을 도운 것이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라고 반문하면서 ‘임나일본부’의 이론을 세움에 대하여는 그 목적이나 방법을 막론하고 반드시 비판받아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왕건군 앞의 책 150~151쪽
 이처럼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391년과 백제와 왜를 토벌한 396년 당시의 왜의 실체(實體)가 야먀토의 군대조직이 아닌 백제 계열의 해적(海賊)떼임이 분명하고, 400년에 고구려군에 의해 궤멸된 바 있다.
  따라서 일제가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신공(神功)의 왜군이 369년부터 한반도의 남부를 점령하였다는 주장(탁순에 모여 신라를 공격해서 깨뜨리고 이로 인해 비자발(比自)·남가라(南加羅)·탁국(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 7국을 평정했다는 신공49년조 기사)은 같은 해「백제본기」에는 “백제가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5천여 명을 살해하다. 369년 09월” “二十四年, 秋九月, 髙句麗王斯由 帥歩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戸. 王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삼국사기』 「백제본기」2, 근초고왕24년).
이라고 밖에 없는 것에도 알 수 있듯이 도저히 역사적 사실로 성립이 불가능한 허구인 것이다. 최재석도 임나일본부의 토대가 된 『일본서기』의 임나에 관한 기사는 고구려, 신라, 대화왜 군대의 기사처럼 대부분 조작기사라고 단정하고, 최재석, 앞의 「삼국사기의 임나와 일본서기의 임나 가라시사에 대하여」95쪽
 일본측이 주장하는 가야와 임나는 동일지역, 동일국가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일부에서는 가라에서 임나가라로 변화한 것으로 보고 이를 가라(가야)의 발전이 임나가라의 출현의 원인으로 보기도 하나, 고관민, 「광개토왕비를 통하여 본 고구려와 왜」 『고구려발행연구』 14, 고구려발해학회, 2002, 157쪽
 가야와 임나가라는 지역도 서로 다른 별개의 정치체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조희승은 김석형의 분국설을 계승하여 임나는 한반도가 아닌 일본 오카야마(岡山)현에 있다고 함으로써 임나일본부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일본의 주장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획기적인 연구결과이다. 그는 오카야마현 기비(吉備) 일대에 임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임나는 가야의 분국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분국설은 가야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도 일본열도에서 분국통치를 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임나를 비롯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마도나 일본열도 어디에도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볼 때, 지금까지 「진경대사탑비문」에 근거하여 임나를 곧  ‘금관가야’로 본 통설도 부정되고 말았다.
  아울러 비문의 경자년조 기사에도 ‘임나가라’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동안 임나를 한반도내 가야로 동일시해왔으나, 필자는 계연수의 비문징실을 통해 이 기사 중에 마멸된 글자를 ‘섭적이월’로 보결하여 재해석한 바, 임나가라의 임나가 바다건너 일본열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삼국사기』에도 임나가 고유 지명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에서도 한반도에 부재하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따라서 4세기 후반(369)에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임나)에 일본부(日本府)를 두어 6세기 중반(562) 신라에 의해 망할 때까지 남부조선을 경영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은 근거 없는 일제의 거짓 조작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였다.
  아울러 경자년조 기사에 나온 ‘임나가라’의 ‘가라’는 수읍(首邑), 성(城), 나라(國)를 뜻하는 보통명사 이병선 「광개토왕비문의 임나가라 考」 『어문연구』28, 어문연구학회, 2000, 30쪽
이거나 『일본서기』에서는 한(韓)을 가라(kara)로 읽는다. 이병선 「가야사의 재구와 임나문제」 『인문연구논집』5, 동의대인문연구소, 2000, 29쪽
 이때의 가라는 가야(加耶)가 아니다. 즉 한(韓)을 뜻하므로 한반도 가야의 분국으로서의 ‘임나성’ 또는 ‘임나나라’ ‘임나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지』(「동이전」왜전)에 규슈 북부에 있던 ‘구야한국(狗邪韓國)’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를 가야한국, 즉 가야로 보는 것처럼,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만권당, 2016, 570쪽
 비문에 나오는 ‘임나가라’의 ‘가라’나, 『삼국지』에 나오는 ‘구야한국’의 ‘한국’은 ‘임나’나 ‘구야’의 족속이 삼한의 한(韓)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비문 경자년조의 ‘임나가라’는 곧 ‘임나한(任那韓)’임을 밝히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지명 가량포(加良浦), 한포(韓浦)를 ‘가라호’라고 읽고, 한박(韓泊), 한실리(韓室里)를 ‘가라도마리’, ‘가라무로리’ 라고 읽는 것에서도 ‘가라’는 곧 ‘한(韓)’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비문에 『삼국지』의 구야한국(狗邪韓國)처럼 임나한(任那韓)이라고 한자로 쓰지 않고, ‘임나가라’라고 현지 음대로 표기한 것은 광개토태왕의 수군이 일본열도를 정벌했다는 것이 사실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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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휘 / 대표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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