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趙芝薰)을 시인의 길로 이끈 이는 요절한 형 조세림
3인 시집 『청록집』 발간으로 ‘청록파(靑鹿派)’ 별칭 얻어
‘선비정신’ 실천 위해 끈질기게 노력한 참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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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문학관 입구 전경 |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조지훈(趙芝薰)을 시인의 길로 이끈 이는 요절한 형 조세림
“조지훈(본명 조동탁) 시인이 문학을 한 것은 세 살 위인 형 조세림(趙世林 본명 조동진)의 영향이었어요. 그 형의 문학적인 재주가 뛰어났다고 하거든요. 조 시인은 일제 강점기, 12세 때 형 세림이 주도하여 만든 ‘꽃탑회’라는 소년회에 참여해 마을 소년들과 함께 『꽃탑』이라는 등사판 문집을 내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 형이 21살 나이에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형이 만약 살아계셨다면 조지훈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요. 조세림은 동생 조지훈에게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그랬구나. 오후 4시가 다 된 시간에 도착한 문학관에는 관람객이 아무도 없었다. 『문학의봄』을 미리 검색해보았든지 “계간지를 내고 계시더군요.”라며 기꺼이 문학관 해설에 직접 나서준 양희 관장(시인)의 설명을 듣던 중 귀에 꽂힌 조지훈의 형 조세림 이야기에 귀가 번쩍 띄었다. 자연스럽게 조세림의 사인(死因)이 궁금해졌다. 총 대신 글로 일제에 항거하던 조지훈의 동지이기도 했던 조세림은 ‘꽃탑회’를 불온 단체로 규정한 일제 경찰의 취조를 받고 나온 후, 어금니를 뽑았음에도 울화를 참지 못하고 통음(痛飮)을 하다가 수풍(首風)으로 허망하게 요절하고 말았단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살아온 ‘계기’라는 게 있다. 대학교 재학시절 우연히 그의 문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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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문학관 현판 |
주실마을은 유교문화권 전통 마을답게 들어가기 전부터 매우 잘 정돈된 풍광을 펼쳐 보여주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도로 폭이 좁은 주실 2교를 건너서 저만큼 보이는 문학관 건물과 널따란 주차장은 대뜸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 느껴졌다. 주차장엔 딱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그 옆에 차를 대고 내렸더니 주차장이 잘 갖춰졌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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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문학관은 미음(ㅁ)자로 지어진 독특한 한옥 형식의 건물이다 |
지훈문학관은 미음(ㅁ)자 형으로 지어진 독특한 한옥 건물이다. 입구로 들어가서 전시실을 한 바퀴 돌면 출구가 나오는 형식으로 관람로가 꾸며져 있다. 다각으로 비치는 조명 아래에 드러난 전시물들 속, 두렷이 나타난 굵은 뿔테안경을 쓴 굵직한 조 시인의 외모가 푸근하다. 전시관 안에 나지막한 볼륨으로 퍼지는 그의 대표작 ‘승무(僧舞)’ 시 낭송을 들으며 벅찬 감정으로 시인 조지훈을 만난다.
<봉황수>는 조지훈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는 커다란 대문
조지훈이 태어난 마을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전경이 배 모양이고 산골 등짝이 서로 맞닿아 이루어졌다고 하여 주실(注室) 또는 주곡(注谷)이라고 부른다. 그는 1920년 음력 12월 3일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에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이며 한의학자인 해산 조헌영(趙憲泳) 선생과 모친 유노미(柳魯尾)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 한학자였던 할아버지 조인석으로부터 한문을 깊이 배웠다는 게 양희 지훈문학관 관장의 설명이다. 아마도 지훈의 지식인으로서의 소양과 고상한 품격이 형성된 뿌리가 아니었을까 짐작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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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 생가 |
그가 1939년 3월 『문장』 3월호를 통해 세상에 처음 내놓은 시는 <고풍의상(古風宜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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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 가계도. 맨 아래 왼쪽이 조세림 |
봉황수(鳳凰愁)//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산새도 비들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어느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을 밟고/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줄을/모르량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전문(全文)
조선왕조의 고궁을 제재로 하여 민족의식을 나타낸 초기 대표작의 하나인 이 시에 시인이자 학자, 지사였던 조지훈의 모든 것이 함축돼 있다. 얼핏 산문시 같은 형태이나, 4박율 중심의 율격미가 정연하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정일품 종구품/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눈물이 속된 줄을/모르량이면 봉황새야 구천에 호곡하리라.’ …이보다 더 진한 민족시가 또 있으랴 싶은 절창이다.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가 단절된 서러움이 절절하다. 고전적 교양미가 오히려 식민시대 주권 상실의 울분을 폭발시키면서 비장감을 흥건히 풍긴다.
3인 시집 『청록집』 발간으로 ‘청록파(靑鹿派)’ 별칭 얻어
지훈문학관은 소년 시절을 거쳐 습작기(1936~1939), 추천 시기(1939~1940), 자아 확립기(1941~1942), 자아 갈등기(1942~1943) 등으로 나누어서 일제 치하 질곡의 세월과 함께 시인으로, 지식인으로 성장한 조지훈의 삶을 소개한다. 일제가 침략 야욕에 불타올라 극한상황으로 치닫던 시기, 친일 문학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가입을 강요받던 지훈은 “추천 시 몇 편 쓴 내가 무슨 시인이겠느냐”며 붓을 꺾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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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훈문학관은 습작기, 추천 시기, 자아 확립기, 자아 갈등기 등으로 구분, 조지훈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
지훈이 왕성한 창작과 사회활동의 정열을 불태운 시기는 해방 이후 비로소 시작된다. 1946년 3월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이 되고, 4월에는 청년문학가협회 고전문학부장을 맡는다. 그리고 잇달아 그 유명한 공동 시집 『청록집』(을유문화사)을 간행한다. 광복 후 최초의 창작시집인 『청록집』은 1939년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문장(文章)』 지를 통해서 등단한 박두진·박목월·조지훈 3명의 시인이 함께 참여한 공동 시집이다. 박목월의 <청노루>라는 시에서 따온 이름인 『청록집』에 조지훈은 <봉황수>, <고풍의상>, <승무>를 포함한 열두 편의 시를 발표한다. 이 출판으로 인해 세 사람은 ‘청록파(靑鹿派)’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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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록파 3시인, 조지훈-박목월-박두진 |
한국전쟁 땐 ‘문총구국대’ 조직, ‘종군작가’로 참전
지훈은 1948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인생의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아태 후인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대구에서 ‘문총구국대’를 조직하여 ‘종군작가’의 이름으로 전선에 뛰어든다. 지훈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이후인 10월 서울을 거쳐 국군과 함께 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1952년 첫 시집 『풀잎 단장』(창조사)을 출간하고, 1953년에는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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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의 첫 시집 『풀잎 단장』 |
‘조지훈’ 하면 떠오르는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무엇일까. 그의 글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대쪽 같은 선비 기질이 숨어있다. 그가 1960년 3월 『새벽』에 발표한 〈지조론〉은 아직까지도 ‘선비정신을 되새기는 타산지석’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지조론〉에서 친일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행세하고, 정치인들이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는 당대의 세상 모습을 냉철한 지성으로 비판한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 확고한 집념)이요, 고귀한 투쟁”이라고 설파한다. 이어서 그는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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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 가족-뒤에 서 있는 여성이 부인 김난희 여사 |
‘선비정신’ 실천 위해 끈질기게 노력한 참지식인
조지훈은 창작에만 몰두한 시인이 아니었다. 시대적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하면서 불의에 끝내 타협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한 참지식인이었다. 주옥같은 시어에서 볼 수 있는 우리말의 탁월한 직조(織造)기술자의 영역을 훨씬 벗어난 큰 사상가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해방기 조지훈은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일제에 대해 완강한 저항정신을 지녔던 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문화자유회의 한국지부’ 창설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의 흔적을 관통하는 ‘민족’과 ‘자유’라는 두 개의 키워드는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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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인 양희 관장으로부터 문학관 해설을 듣는 필자 |
조지훈은 타고난 선비였기에 ‘한국문협이든 자유문협이든 부패한 이승만 정권에 협력하여 국가 예산을 받아 쓴 조직들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인협회가 4.19혁명 직후 임시총회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에 협력한 회원들의 징계를 상정한 일’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혁명 초기 지지 의사를 감추지 않았던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도 그는 끝내 시시비비하는 선비의 눈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남긴 말과 글을 놓고 단세포적인 해석을 동원해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일은 본질을 꿰뚫지 못한 가당찮은 실수일 것이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이 발행하는 민족문화연구 제90호(2021.2.25.)에 실린 김건우(金建佑 대전대학교 교수)의 특집 논문 「조지훈의 문학세계와 학문 세계-전후 지식인 사회와 조지훈의 위치」의 맨 마지막 대목을 잠시 빌려오자.
“…시기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감지되지만, 그는 전체적으로 일관된 길을 걸었고, 그런 면에서 한국 전후 지성사에서 보기 드문 존재였다. 자신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 있었으나, 시대의 좌표축이 변화해감에 따라 다른 좌표값을 가지게 되었다. 조지훈의 ‘민족’은 마치 ‘부유하는 기표’처럼 완성된 술어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위치는 시대가 변하는 것을 가늠하기에 가장 적절한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문학관을 돌아 출구로 나오는 길에 스피커에서 다시 나지막한 낭송이 들려왔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 <낙화(落花)>였다.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주렴 밖에 성긴 별이/하나 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머언 산이 닥아서다//촛불을 꺼야하리/꽃이 지는데//꽃 지는 그림자/뜰에 어리어//하이얀 미닫이가/우련 붉어라//묻혀서 사는 이의/고운 마음을//아는 이 있을까/저허하노니//꽃이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전문(全文)
‘동탁(東卓)’ 조지훈 시인이 후학들에게 시사하는 가르침의 본질은 무엇일까. 누군가의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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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관에 전시된 조지훈의 사진기록과 저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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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관 앞에 선 필자 |
* 글 : 안 휘/소설가·시인·평론가
* 사진 : 이 영/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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