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자존감은 성숙한 좌절하지 않으며 고통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힘을 준다'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포용하고 양보하며 겸손한 삶을 살아간다'
'사회가 이토록 삭막해진 근본 이유 중 하나가 자존감이 극도로 낮아졌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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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9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박한표 |
"어떤 경우에도/우리는 한 사람이고/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나는 중심의 존재보다는 주변의 존재이고 싶다. 긴 연휴 기간동안 많은 시인과 시들을 만나고 있다. 어젯밤에 만난 이문재 시인의 시를 우선 공유한다.
어떤 경우/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시는 여러 번 한자 한자 천천히 잘 읽어야 마음에 닿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를 잘 읽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가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각박한 세상에,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한가하게 무슨 시 타령이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과연 그럴까? 다음은 이문재 시인이 자신의 시를 말하면서 했던 이야기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기록 중에 경청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수용소에도 티타임이 있었다고 한다. 몇 번 우려낸 형편없는 차였지만 하루에 한 번씩 차가 배급됐다. 티타임에 수용소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 차를 단숨에 들이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차를 절반 남겨 얼굴이나 손발을 씻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자는 동물적 본능에 충실했고, 후자는 최소한의 인간적 몸 가짐을 지키려 애쓴 것이다. 그런데 둘 중 어느 쪽이 더 많이 살아남았을까? 놀랍게도 후자 쪽의 생존율이 더 높았다 한다. 브라이언 보이드(Brian Boyd)가 쓴 <<이야기의 기원>>(남경태 역, 휴머니스트, 2013)의 옮긴이 글에 나오는 대목이라 한다. 이문재 시인은 아우슈비츠에서 찻물을 남겨 자기 얼굴을 씻는 행위가 자기성찰, 즉 시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부라이언 보이드는 시를 포함한 예술은 사치나 장식이 아니라 진화론에서 말하는 적응의 산물이자 인간 생활의 핵심이라 말했다 한다. 예술이 진화와 무관했다면 예술은 벌써 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찻물을 아껴 자기 몸을 청결히 한 사람, 끝끝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언젠가 읽은 이야기를 하나 더 공유한다.
오래 전에 일본 최고의 명문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 학생이 공부를 더하라는 교수와 선배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회사에 취업하기 위하여 '마쓰시다 전기회사'에 입사지원서를 접수시켰다. 그는 지금까지 수석을 놓친 적이 없고 항상 남보다 우수한 성적으로 주위 사람들한테서 부러움의 대상인 천재 학생이었기에 공부를 포기하고 취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남들이 이해 못하는 숨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 천만 뜻밖에도 합격자 명단에 천재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확인하였지만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던 천재는 분명히 수석으로 합격될 것으로 자신했는데, 수석은 커녕 합격자 명단에도 오르지 못한 것이다. 당당한 모습으로 발표를 기대했던 그는 풀이 죽은 채 환호하는 합격자 와 합격자 가족들을 뒤로하고핏기가 없는 얼굴로 힘없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에 돌아온 그는 그날 저녁 평생 처음 맛본 불합격에 따른 좌절감과 자존심이 상한 것을 이기지 못하고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을 하고 잠에 들었다 영원한 잠에 빠지고 말았다. 다음날 가족들은 이미 숨을 거둔 그를 발견하고 큰 슬픔에 빠져 오열하고 있을 때 긴급전보로 '합격 통지서'가 도착하였다. 그는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한 실력으로 합격 했던 것이다. 수석으로 합격하였기 때문에 일반 합격자 명단에 넣지 않고 별도로 적혀 있는 그의 이름을 실무자 실수로 합격자 명단에서 빠뜨린 것이었다. 당시에 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되었으며 회사의 실수로 천재를 죽였다고 비난하는 보도가 연일 쏟아졌다. 그 천재 청년은 '자존심((自尊心, pride)' 때문에 '자존감(自尊感, dignity)'을 포기한 사람이 되었다. 자존감과 자존심은 다르다. 자존감은 '나는 소중하다'하면서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고, 자존심은 '나는 잘났다'면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다.
세월이 흘러 사건이 잠잠할 무렵 한 기자가 그 회사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을 찾아가 인터뷰하며 그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회장은 당시 회사의 실수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 사과 하면서 말하였다. “장래가 촉망이 되는 청년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회사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뜻밖의 말에 기자가 그 이유를 묻자 총수는 말을 이었다. “단 한 번의 실패를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심약한 사람이라면 다음 중역이 되었을 때 만약 회사가 위기에 봉착한다면 모든 것을 쉽게 포기 함으로서 회사를 엄청난 위기에 빠뜨리고 전 사원의 삶이 걸려 있는 회사를 비극으로 끝을 맺는 우를 범할 수 있었을지 알겠습니까?”
자존감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가 있다. 내가 나를 존중해야 남도 존중해줄 수 가 있다. 그런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남의 탓이나 남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포용하고 양보하며 겸손한 삶을 살아간다.
자존감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평가 혹은 믿음'이다. 자존감은 다른 이와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 떨어진다. 일반적으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으로 지적되는 것들은 이렇다.
- 실력을 쌓는 것,
- 작은 성공을 누적시키는 것,
-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제대로 구분하는 것,
-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 외부에서 긍정적 피드백을 요청하는 것 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치가 더 높은 수준에 있음을 믿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가 높음을 스스로 확고히 믿으면, '자기 효능감'이 생긴다. 자기 효능감은 특정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능력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케냐의 마라톤 선수들은 자신의 한계는 없으며, 오늘은 '나의 날'이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높은 자존감은 성숙한 방어기제를 형성하여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으며 고통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힘을 준다. 실패와 고통 속에서 높은 자존감으로 성숙한 방어기제를 통해 또 일어서고 또 일어서게 하는 힘이 자존감이다.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이란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얻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삭막해진 근본 이유 중 하나가 자존감이 극도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내가 더 가졌다고 다른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려는 사람들은 살고 있는 지역, 타고 다니는 차, 들고 다니는 가방 등의 이름에서 자존감을 얻으려 한다. 사람들은 상품이 아니다. 따라다니는 라벨로 다른 이들을, 또 나를 판단할 수 없다. 인정받기 위해, 부러운 눈길을 얻기 위해, 또 가볍게 보거나 얕보는 듯한 눈길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비하는 지 모른다. 나의 인간적 가치는 내가 얼마나 가졌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나의 재산과 재능을 지혜롭게 쓰면서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이 나에게 더 소중한 가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 아직도 나를 거만하게 만드는 그것들을 나에게서 없애기 위해 나는 계속 노력할 것이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껍데기만 사람이다. 동물에 가깝다. 대체 무엇이 자존감을 앗아갔는가? 이문재 시인은 ‘돈이 최고’라는 시장전체주의가 주범이라 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나쁜 자본주의’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있다. 자기성찰 능력이 없는 팽창적 자본주의가 미래를 가로막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는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다른 미래로 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우리 안에 있다. 다름 아닌 시다. 우리는 태어날 때 누구나 시인이었다. 우리에게는 시의 마음이 있다. 우리가 돈에 눈이 어두워 시장전체주의의 미로 속을 헤매는 ‘영혼 없는 소비자’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있다. 시가 그 실이다. 시의 끈을 놓지 않으면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이문재)고 했다.
어제 만난 또 다른 시인 진은영은 "다른 입구로 들어가면 익숙한 공간도 머나먼 곳으로 바뀌는 마술이 있다"고 했다. 다른 출구도 있지만, 다른 입구도 있다. 새로운 다른 입구를 발견하고 전형적인 삶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은 여전히 꽤 괜찮은 일이고 생각만큼 두려운 일이 아니다. 수전 손택은 말한다. “예전에 일어났던 멋진 일 중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인이 되기를 선택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는 겁니다.”
나에게 다른 출구와 입구는 변방(邊方)이다. 변방은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지역"이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그래 변방은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로 인식된다. 낙후된 지역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심을 둔다고 해도 온정주의적(溫情主義的)이다. 마치 사회적약자와 마이너리티에 대해 보이는 관심처럼 말이다. 그러나 신영복 교수는 변방을 낙후되고 소멸 해가는 주변부로서가 아니라, 가능성의 전위(前衛)로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오늘 아침에 말하고 싶은 것은 변방을 공간 개념이 아니라, 변방성(邊方性), 즉 중심부의 주류 담론이 아니라, 비판 담론, 대안 담론을 찾아 보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중심부의 주류 담론인 속도와 효율성이 아니라, 바깥에서 뒤돌아 보자는 것이다. 변방을 찾아가려는 이유이다.
주변과 변방이 더 개혁적이다. 그리고 그들이 중심부로 들어간다.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키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중앙은 퇴행하게 마련이며, 변방에 있던 세력이 다시 중심부를 장악해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나도 주변인이라 그런지 그 말이 좋다. 변방이 새로운 중심이 되는 것은 그곳이 변화, 창조,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심부에 있는 사람은 자기 것을 지키기에 급급하다면, 변방에 있는 이들은 끊임없이 중심으로 가려고 변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그래 변방에 있다면 오히려 기회이다. 그러나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도 스스로 주변인으로 나선다면 더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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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표 교수 |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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