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심층 탐구(02)] ‘이문구(李文求)를 찾아서’

문화·예술 / 안재휘 기자 / 2023-09-06 09:25:11
눈물 나게 아픈 이야기를 웃으며 읽게 만드는 기막힌 재주 타고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실무 간사로서 탄압받는 문인 뒷바라지 도맡아
스승 김동리와의 의리 끝까지 지킨 군자요, 선비이자 대인
"문학관도, 문학상도, 무덤도 만들지 말라” 유언…깊은 교훈

 

 

 [특집] 심층 탐구-‘이문구(李文求)를 찾아서

 

 

▲소설가 이문구

애초에 그렇게 시작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대단히 유명한 소설가였으니, 설마 그 언저리에 가서 몇 사람 붙들고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으리라 어림하고 떠난 길이었다. 해가 제법 짧아졌음을 의식하고 달려갔는데도, 거기 가을 맛이 깊이 물든 충남 보령 청라저수지(청천저수지)는 이미 일몰을 맞이할 채비를 마친 듯했다.

 

명천(鳴川) 이문구(李文求 1941.4.12~2003.2.25)의 의식 한복판에 뿌리로 있었을 화암서원(花巖書院)을 먼저 보고 싶었다. 화암서원은 1610(광해군 2) 창건된 서원이다.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이자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李芝菡) 등의 위패를 봉안했다. 이문구는 이지함 선생의 후손이다.

 

서원은 오봉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타고 내려와 청라저수지가 훤히 내다보이는 남향 자리에 있었다. 새뜻한 단청과 간판을 달고 우뚝 서 있는 솟을대문이 인상적이었다. 사진을 찍고 오른쪽에 세워진 안내문을 읽고 있는데, 스무 살 안팎으로 보이는 빨간 스웨터 차림의 여성이 지나갔다.

 

뭣 좀 물어볼게요. 소설가 이문구 선생의 집필실이 이 근처에 있다고 들었는데, 혹여 어디인지 아십니까?”

 

다짜고짜 던진 내 질문에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고개를 살짝 가로젓던 그녀가 뜨악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문구잘 모르겠는데요.”

 

그녀는 허름한 내 행색이 낯설었던지 그 말을 남기고 총총 지나쳐 갔다.

 

이문구를 기억하는 분 인근에서 한 사람도 못 만나

 

그게 시작이었다. 웬만한 집들은 고요했고, 사람이 있을 듯하여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돌아오지

▲화암서원 솟을대문

않았다. 부근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이문구를 물었지만 안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에게 소중히 기억되는 인물이 향리의 남은 이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는 데 대한 서운함 같은 게 일어났다. 2010년이던가, 문학관 건립계획이 무산된 이후 시나브로 잊혀간 한 걸출한 소설가의 쓸쓸한 삶이 문득 코끝에 스치는 냉랭한 저수지 물바람만큼이나 시렸다. 보령시가 매입하고도 폐허로 방치하고 있다는 이문구의 청라저수지 인근 집필실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이문구의 대표작으로 운위되는 연작소설집 관촌수필(冠村隨筆)의 무대였던 갈머리 마을을 보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요즘 여행이란, 모르는 길에서 내비게이션 가리키는 대로 따라가는 것 말고 길잡이를 따로 삼을 방도가 없다. 그날 야속하게도 나의 내비게이션은 도시의 뒷골목으로만 이끌 따름 한사코 갈머리 마을의 풍광을 제대로 안내하지 못했다. 일종의 열패감 같은 게 가슴속에 일렁거렸다. 그렇구나. 속 시원하게 알려진 정확한 이유는 없다. 언론을 통해 소개된 이문구 문학관 건립 불발 사연은 그저 물음표 몇 개만 남기고 있는 게 전부다. 기념비적 작품들을 남기고 간 작가가 이렇게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잊혀가고 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데뷔작 다갈라 불망비」…독특한 매력 지닌 여승의 환속 스토리

 

소설가 이문구는 나를 소설 문학에 매료되도록 이끈 블랙홀 같은 존재다. 그의 가계(家系) 자체가 그렇게 비극적이었고, 시대의 모순에 맞서서 치열하게 살아낸 사내라는 것을 제대로 안 것은 한참 뒤였지만, 그의 등단작 다갈라 불망비는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았었다. 문학도인 나의 형이 집으로 사다가 나른 문예지 과월호, 그러니까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 19659월호에 게재된 이 작품은 10대 초반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와 가슴에 문학을 평생의 숙제로 품게 만든 일종의 도화선이었다.

 

다갈라 불망비는 진여암이라는 여승당에 있던 연묘(속명 국희)라는 여승의 드라마틱한 환속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나중에도 그렇지만, 이 소설에는 직접 체험과 주변인들의 일상에서 소재를 발굴해서 쓰는 이문구의 작법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열 살에 전쟁고아가 된 나는, 또한 그 사변 통에 홀로된 이모를 따라 입산하여, 진여암에서 이모 손이나 거들어주며 얻어먹고 자란사내다. 나이가 들자 여승당 진여암 주지가 여승들만 있는 절에 화자를 더 두기가 걱정스러웠던지 내보내는 바람에 추성면 지서의 담무사 경비소 사환으로 있다.

 

 현대문학에 실린 다갈라 불망비 

소설은 화자가 취재 여행을 온 소설 지망생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연묘의 환속 스토리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우체국 배달부 황 씨로부터 연묘 스님에게 온, 발신자 이름도 적혀있지 않은 두 번째 편지를 몰래 뜯어보니 연묘가 살아있는 동안만 나도 열심히 살겠음. 이 종이의 여백엔 다른 또 하나의 피안을 그릴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화자는 진여암 바로 위에 있는 선나암에서 공부하는 한 말쑥한 차림의 학생(청년)이 틈틈이 진여암 앞에 있는 큰 바위에 구멍을 파고 있는 이상한 행동을 떠올린다.

얼마 뒤 세 번째로 온 발신지 불명의 편지는 연묘. 집에서 입대 영장 받아놨으니 즉시 상경하라는 전보 와서 몸만 떠나. 연묘가 살아 있는 동안만 열심히 살 생각으로.’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황 씨로부터 다시 온 편지에 외아들이기 때문에 휴가가 없는 대신 육 개월 후면 의가사 제대를 할 수 있고여백을 내준 백지에 그리랬던 피안은 어느 정도 채색되었느냐는 글이 적혀있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소설은 여섯 달이 지난 뒤 진여암으로 찾아온 청년이 주지 성초 스님을 찾아가 연묘를 데려가겠다

▲이문구의 출생지역임을 알리는 유일한 흔적
고 고하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성초 스님의 하문에 연묘는 청년의 주장을 부정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다가 낭떠러지로 달려가지만 칡덩쿨에 걸려 넘어지고, 주지는 윤회로다. 그만두자 그만두어.”하며 장문을 닫아버린다. 연묘는 하산하는 청년의 발자국을 밟으며 따른다. 그 후 아궁이 앞에서 뒤늦게 발견된 청년의 첫 번째 편지에는 연묘. 나는 오늘부터 바위에 입을 만들어주겠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뚫겠습니다. 바위의 심장이 보일 때까지.’라고 적혀있었다. 그 편지를 보고 나서야 청년과 연묘 사이에 일어난 사랑 이야기의 전모를 알게 된다. 청년이 떠난 여섯 달 동안 이번에는 연묘가 새벽마다 도량석 앞에 목욕하러 간다며 남몰래 바위로 가서 구멍을 더 크게 파고 있었던 것이다.

 

숨은그림찾기, 추리소설 맛까지 잘 품은 단편 소설의 백

 

이 소설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은 것은 여승의 파계라는 특이한 소재도 그렇지만 작가로서 이문구가 고안해낸 독특한 구성 때문이다. 조금도 긴장하지 않도록 이야기보따리를 슬슬 풀어내는 능란한 서사 기법과 함께 서술 도중에 슬쩍슬쩍 드러내어 줄기를 다 알게 해주는 신비한 구성이 깊은 감동을 일군다. 그리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숨은그림찾기, 또는 추리소설의 맛까지 적절히 잘 품고서 깊디깊은 감상을 던지는 단편 소설의 백미다.

 

▲ 관촌수필

그러나 소설가 이문구의 소설이 본격적으로 농익은 그만의 향기를 한껏 풍긴 작품집은 역시 관촌수필우리 동네. 연작 형태로 된 이 두 책은 그의 문학을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게 한 독특한 문향(文香)을 풍기고 있다.

 

관촌수필이 자타가 공인하는 이문구의 대표작이 된 것은 수필 형태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생전에 작가 스스로 독자들에게 권한 바도 있지만, 시종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겪고 보고 느낀 일을 정직하게 담아내는 게 특성인 수필의 형식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감동을 깊이 박히도록 만드는 순기능을 한다. 작품집은 일락서산(日落西山)을 비롯한 여덟 편의 중·단편을 연작 형식으로 담고 있다. 그중 이문구 자신의 가계 이야기를 담은 일락서산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는 인상적인 작품이다.

 

일락서산[日落西山-해는 서산으로 지고]은 고색창연한 이조인(李朝人)으로서 화암서원의 직원(直員 총괄관리인)이었던 할아버지 이야기가 중심이다. 신정을 맞아 성묘를 위해 13년 만에 고향을 찾은 주인공은 예전 모습을 잃어버린 마을의 모습을 아쉬워하며 회상에 잠긴다. 항상 엄하셨던 할아버지, 좌익사상을 품었다가 희생된 아버지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유년 시절의 다양한 추억들을 떠올린다. 집안에 들어와서 가족처럼 함께 살던 10살 연상의 옹점이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토정 이지함 할아버지가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400년 묵은 왕소나무와 칠성바위, 부엉재, 범바위를 비롯한 사라져가는 옛것들을 향한 아쉬움이 흥건하다. 다시 찾은 고향에서 사라진 것들에 대한 절절한 미련 끝에 스스로를 실향민이라고 일컫는 화자의 모습이 유사한 경험을 가진 독자들에게 진득한 공감을 일으킨다.

 

수필 형식의 자전적 소설

겪고 보고 느낀 일들 해학 곁들여 정직하게 담아내

 

▲ 이문구의 조부 이긍직
화무십일[花無十日-열흘 가는 꽃은 없네]은 북에서 피난 온 윤 영감네의 며느리 솔이 엄마가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함께 도망친 뒤 아들 학로는 목을 매고, 영감네는 도망간 며느리와 손주를 찾아 떠나게 된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행운유수[行雲流水-떠가는 구름과 흘러가는 물]10살 이상 어린 나에게 누나처럼, 친구처럼, 어머니처럼 자상하고 다정하게 굴어주던 옹점이에 대한 추억담이다. 전쟁터에 간 남편이 전사하고 난 뒤 소식이 끊겼던 옹점이가 떠돌이 약장수 패거리 속 가수가 된 모습을 본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녹수청산[綠水靑山-푸른 산과 푸른 물]은 여남은 살 연상인 대복과 순심이의 파란만장한 사랑 이야기다. 공산토월[空山吐月-빈 산이 달을 토하고]은 고향 마을에서 신석공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신현석 씨 이야기다. 그는 공산정권 치하에서 관청 서기가 되었다가 국군이 다시 점령한 후에 붙잡혀 고문당하고 수년간 징역을 살기도 한다. 관산추정[關山芻丁-관산의 고무래]은 어릴 적 친구인 복산이의 아버지 유천만의 이야기다. 그는 왜정 때 징용으로 끌려가 고생을 심하게 한 덕으로 병을 얻어 여기저기 아프다는 핑계로 가장 역할을 포기한 사람이다. 여요주서[與謠註序-여러 사람 사이에 떠도는 소문]는 친구 신용모가 중꿩을 잡아 팔고 있는 어린아이를 도와주었다가 야생동물보호법 위반으로 벌금을 뒤집어쓰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저도 야생동물, 아니 야생 인간이라면서 판사에게 대드는 모습이 고소(苦笑)를 부른다. 월곡후야[月谷後夜-월곡의 밤에서 아침까지]는 겁탈을 당한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가 임신했다가 낙태한 사건을 둘러싸고 동네 청년들이 피해자 아버지와 돈을 주고 합의한 범인 김선영을 협박하여 마을을 떠나가게 하는 에피소드가 중심이다.

 

▲ 화암서원 앞 청라저수지(청천저수지)

 

이문구의 문장 특성 중 먼저 눈에 띄는 대목은 것이었다.’거였다.’로 줄여 쓰는 스타일이다. 다른 작가 중에도 더러 사용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이문구가 이를 가장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대표적인 작가일 것이다.

 

하지만 이문구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최대의 장점은 충청도 사투리를 누구보다도 폭넓게 활용한 문학가라는 점이다. 작품 속에서 그가 구사하는 충청도 사투리는 해학이 번뜩이는 그의 작품들을 한껏 풍요롭게 만드는 독보적인 영역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해학적 요소를 맛깔나게 만드는 사투리는 그의 문학에서 스토리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문구 소설에 등장하는 언어는 충남 방언, 상징어와 비속어, 나아가 이문구 개인어의 활용 등 순우리말로 볼 수 있는 고유어가 유난히 많다. 특히 이문구 소설에서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선용이 두드러진다. 그는 지역어, 개인어, 상징어 등 우리말을 능숙하게 활용했다. 이런 활용은 소설에서의 생동감과 현장감을 살리는 구체적 표현과 결부된다. 또한 어휘 구사의 풍부함과 인물 묘사의 구체화를 실현하는, 쉽게 흉내 내기 힘든 표현기법이다. 이문구가 소설에서 사용한 개인어, 나아가 거침없는 비속어들은 한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롭다. 그는 작품에서 주뒹이, 작것, 급살맞을 늠, 육시럴 , 대갈빼기, 급살맞어 뎌질 것, 볼텡이, 쇠똥 밟은 상판, 싹동배기, ‘씹구멍에 말뚝을 박아 죽일 년’, 자빠졌어, 창사구, 헌털뱅이 등의 비속어 활용과 가풀막, 개뚝배미, 거스름, 거추없다, -개뷰, 꽃빛, 버덩, 도리기, 봄부치, 비닭이, 뒤슬뒤슬하다, 말쉬바위, -사리, 살강, 응이, 종주먹, -할래 등정감이 가는 우리말들을 풍성하게 응용한다. 그것은 보령 지역어와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산업화로 잊혀가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담화 기제의 장치로 깊이 작용하고 있다. 그는 눈물 나게 아픈 이야기를 웃음을 참고서는 읽을 수 없도록 하는 아주 기막힌 재주를 타고난 특별한 소설가였다.

 

눈물 나게 아픈 이야기를 웃으며 읽게 만드는 기막힌 재주 타고나

 

요설체가 많은 그의 소설 문장에서 더욱 농익은 맛이 나게 만드는 것은 샘솟듯 유려하게 버무려지는 풍성한 의성어·의태어들이다. 웃음에 대한 표현만 잠깐 들여다보자. 얼른 간들간들 웃어가며(녹수청산 131), 깔깔/ 껄껄/ 낄낄/ 킬킬 웃었다, 비죽비죽 웃고 있다(장한몽), 신들신들 웃기만 했었다(행운유수 83), 실금실금(관촌 185), 사블사블 웃었는데(관촌 207), 실픗실픗 웃었고(관촌 170), 치륵치륵 소리죽여 웃곤 했다.(관촌 164), 킬룩킥룩 웃었다.(이 풍진 세상을), 히득히득/ 히뜩/ 히뜩히뜩 하고 웃었다, 히믈히믈 웃으며 가볍게 이끌렸다.(지혈), 히엿히엿하게 웃고(관촌수필 3), 히죽히죽/ 히쭉거리다, 히히/ 히히덕 거리다, 힐힐 웃었다, 흘흘 웃었다……. <충남대학교 한영목 교수의 논문 이문구 소설어와 충남 방언을 인용했습니다.>

 

이문구는 1941412일 충남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 387번지(현재 충남 보령시 대천2) 갈머리

▲ 이문구의 부친 이익규

에서 5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이 갈머리가 바로 관촌수필의 배경이 된 관촌(冠村)이다. 이문구가 스스로 이조인(李朝人)이라고 묘사한 그의 할아버지 이긍직은 양반 명문가인 토정 이지함의 후손임을 긍지로 삼아 평생을 꼿꼿한 선비로 살았다. 이문구는 할아버지로부터 한문 수학을 비롯해 가장 큰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이익규는 부친의 사고체계와 삶의 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지 않았다. 해방기 대다수 지식인이 그랬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에 심취했다. 이익규는 아마도 상당히 깊고 투철한 사상가였던 모양이다.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이 아니면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았던 이긍직과 반대로 이익규는 노동자·농민들을 주로 상대했고, 대중 앞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즐겨 할 만큼 적극적인 운동가였다. 그는 남로당 보령군 총책을 맡게 되는데, 그 일이 곧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는 시발점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결국 이문구의 아버지 이익규는 예비검속을 당해 끔찍하게 총살을 당하고 만다. 이어서 아버지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둘째 형은 맞아 죽고 셋째 형은 서북청년단에 붙잡혀 산 채로 수장을 당하는 참극이 일어난다. 진작에 맏형이 일제에 의해 징용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으니 네 아들 중 이문구만 남게 됐다. 그해 겨울에는 집안에 일어난 참변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줄초상이 나면서 멸문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졸지에 빨갱이의 자식이 된 이문구는 형언키 어려운 수모를 당하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험한 욕설을 들어도 화를 참던 인내심 강한 모습을 증언하기도 했다.

 

타고난 문재(文才)의 발동이었을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그는 작가가 되는 길만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1959년 중학교 졸업 후 상경해 막노동과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김동리, 서정주 등에게 수학한다.

 

재능 알아본 김동리,

학기말 시험 시제로 이문구 작품 논하라제시

 

▲ 이문구와 김동리

김동리는 한눈에 이문구의 재능을 알아본 듯하다. 기말고사에 이문구의 습작품을 학생들에게 제시하고 이문구 소설 무엇을 논하라라는 시제를 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김동리가 이문구를 일러 등단은 가장 늦게 될 테지만, 소설은 가장 오래 남을 것이라고 했다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도 있다.

 


스승의 예언처럼 정말로 이문구의 등단은 순탄치 않았다. 좀처럼 등단이 되지 않는 이문구를 어느 날 김동리가 불러서 물었다. “신춘문예라도 한번 작품을 내 보지 그러냐?” 그러자 이문구는 계속 내고 있는데, 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스승은 껄껄껄 웃으면서 하기야 네 복잡한 문장을 나 말고 끝까지 읽어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 내가 등단 절차를 밟아줄 테니 작품 가져오너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문구는 1965년에 가까스로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1차 추천작 다갈라 불망비를 현대문학에 싣게 된다. 김동리는 추천사를 통해 문단이 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를 얻게 되었음을 밝힌다.

 

등단 이후 이문구는 왕성한 문학 활동을 벌이게 된다. 사람과 어울리기를 태생적으로 좋아하는 기질에다가 그 어떤 인물과도 잘 어울리며 포용할 수 있는 품이 넓은 특성이 광범위한 대인관계를 형성하면서 다양한 교제가 이뤄진다. 작가들과 위아래 허물없이 어울리면서 그는 활동반경을 넓혀갔다. 하지만 창작활동만큼은 절대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실무 간사로서

탄압받는 문인 뒷바라지 도맡아

 

1972년에 일어난 10월 유신은 그를 다시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다. 61명의 문인이 10월 유신에 반대선언을 했고,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한 뒤 문인 간첩단사건을 조작 발표한다. 작가들은 197411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해 저항하게 되는데, 월간 한국문학의 편집장이던 이문구는 협의회의 실무 간사를 맡게 된다. 그는 김지하 시인 구명 활동을 비롯해 탄압받는 문인들을 뒷바라지하는 역할을 주도했다. 이문구가 움직이면 참여문학이 아닌 순수문학 쪽에서도 몰래 큰돈을 마련해줬다. 덕분에 중앙정보부를 10번 이상 들락거려야 했다. 그런 가운데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역시 그의 처참한 가족사였다.

 

그러던 중 이문구는 돌연 1977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훗날 알려진 바로

▲ 이문구와 부인 임경애 여사
19751월부터 12월까지 중앙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오자룡때문에 23일간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난 뒤 내려진 하방 조치 때문이었다. 중정은 이문구가 소설 오자룡에서 당시 신설된 방위세를 비꼰 것을 시비해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혐의를 씌웠다. 그나마 이문구가 더 이상 험악한 처분을 받지 않은데는 스승 김동리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후문이 있다.

 

경기도 화성에 살면서 이문구는 또 다른 연작소설인 우리 동네시리즈를 집필한다. 1980년 정치적 변혁기에 그는 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정치활동규제법대상자가 된다. 1984년엔 실천문학사 발행인에 취임하게 되고,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가 된다.

 

스승 김동리와의 의리 끝까지 지킨 군자요, 선비이자 대인

 

이문구는 스승 김동리와의 의리를 끝까지 지켰다.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문학적 아버지를 냉혹하게 비판하자 탈퇴해 버린다. 김동리는 1988829일 보수문학단체인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으로서 참석한 국제펜클럽대회에서 축사를 통해 구속 문인 석방 운동을 비난해 반발을 샀다. 이때 김동리에게 항의하러 온 작가들과 학생들을 막아선 것도 이문구였다. 이문구는 1995년 김동리가 타계하자 김동리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김동리 문학상까지 제정했다. 그는 1999년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에 취임한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서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일은 골 깊은 갈등에 휩싸인 문단의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이데올로기보다는 사람이 늘 우선이었다. 자기를 감시하는 담당 형사와도 형제처럼 허물없이 지내며 활발히 소통한 이문구는 특별한 친화력을 지닌 큰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서 그는 특히 문인들이 생계 걱정 없이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한국문화예술인복지조합등의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집착했다.

 

하지만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일념으로 세상의 통합을 꿈꾼 이문구의 소망은 뜻하지 않은 위암 발병으로 미완의 과업이 되고 만다. 그는 2003225일 만 62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이문구 담당 형사까지 함께 어울린

작가들의 윷놀이

다음날 서울대병원 영안실에는 한국문단이 통째로 옮겨와 있었다. 하루 만에 500명이 넘는 문상객이 찾아온 상가는 선비의 지조와 덕을 평생의 금과옥조로 여긴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살았던 이문구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국문단 사상 최초로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인협회, 한국펜클럽, 소설가협회 등 4개 문인단체가 공동으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명천 이문구 선생 문인장>을 치렀다. 이문구의 40년 지기 친구인 소설가 박상륭은 캐나다에서 18시간을 날아와 그는 군자였고, 선비였으며, 대인이었다는 말로 고인을 회고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기념문학관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갈머리 생가터에 개인 문학관을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관내 통합문학관을 세우고자 하는 보령시의 계획이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청라저수지 화암서원 근처의 오두막 집필실에 남겨져 있던 유품의 보관에 대해서도 유족들과 갈등이 생겼다는 말도 들린다. 그러다가 돌연 모든 계획이 중단되고, ‘이문구 문학관이야기는 모든 곳에서 사라진다. 그 진짜 세세한 사연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문학관도, 문학상도,

무덤도 만들지 말라유언깊은 교훈

 

뒤늦게 문학관을 짓지 말라는 게 고인의 유언이었다는 말이 돌았다. 그는 내 죽으면 화장을 하

▲ 시대의 걸출한 소설가 이문구를

배우고 기리는 일은 오롯이 

후학들의 몫이다

되 유골은 단 한 줌도 남김없이 납골 묘역(고향 관촌마을 뒷산)에 뿌리고, 내 이름을 내건 어떤 문학상도 만들지 말 것이며, 장례 문제로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돈푼깨나 있는 명망 작가들이 살아있을 때 요란스레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관을 만들기도 하는 시절에 이문구 선생은 왜 이름 석 자마저 감추려고 한 것일까. 살아있을 적 어린 나이 야만의 역사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경험을 겪고도 굴하지 않고 소설가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 소중한 이정표를 세운 이문구는 깊고도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기념물은 그가 한사코 짓지 말라고 했으나, 그를 따라 배우고 기리는 일은 남은 후학들의 몫이다.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소설가 지망생들이라면 반드시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필수과목이라고 생각한다.

 

보령시청으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2010년에 추진하다가 중단된 이문구 문학관건립 문제에 대한 추가논의 같은 게 없을까요?” “이문구 문학관이요?” “.” 담당자는 수화기를 잡고 누구에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없습니다.” 냉랭한 목소리였다. “앞으로 재추진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도 없나요?” “. 없습니다.” 그는 귀찮다는 듯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가슴속에 찬바람이 휭 하고 일었다.

 

/소설가 안 휘(문학의봄 주필)

 

 

 

이문구(李文求) 작가 연보

 

이문구

 

1941년 충남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 387번지 관촌부락에서 41녀 중 4남으로 출생.

19506.25전쟁 발발과 함께 남로당 보령군 총책이었던 부친과 두 형을 잃음.

1956년 모친 사망으로 가장이 됨.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진학. 스승 김동리와 만남.

1966현대문학에 단편 '백결'이 추천되어 등단

1968년 단편 이삭(사상계등 발표.

1970월간문학편집장. 장편소설인장한몽창작과 비평에 연재. 단편 이 풍진 세상을(신동아), 암소(월간중앙, 등 발표.

1972장한몽으로 제5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중편 해벽(세대), 단편 추야장(월간중앙), 대표작 관촌수필연작의 1, 2, 3 발표.

1973월간문학편집장을 사임한 뒤 한국문학편집장. 연작소설 관촌수필4, 5등 발표

19741118일에 발족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실무 간사가 됨. 백면서생등 발표.

1975한국문학편집장 사임.

1976년 단편 관촌수필 6,7중편 엉겅퀴 잎새발표. 임경애와 결혼.

1977년 한진출판사 편집장으로 취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으로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단편 관촌수필 8,으악새 우는 사연(‘우리 동네 황씨로 개제) 발표, 우리 동네 김씨(한국문학)를 발표하면서우리 동네연작 시작.

1978년 단편 우리 동네 리씨(한국문학), 우리 동네 최씨(창작과 비평), 우리 동네 정씨(문학과 지성) 발표.

5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수상작 우리 동네 리씨’)

1979년 중편 우리 동네 유씨(YWCA) 발표. 실천문학편집위원 취임.

1980년 단편 우리 동네 강씨(실천문학), 우리 동네 장씨(창작과비평,소설 김주영발표. 정치활동규제법에 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묶임.

1981년 단편 우리 동네 조씨(세계의문학) 발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이사 피선.

1982년 단편 변사또의 약력(문학사상), 강변의 빈터발표. 1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음.

1983년 정치활동 규제자에서 해금. 시인에 동요 25편 발표.

1984년 장편 산너머 남촌농민신문에 연재. 단편 강동만필1, 명천유사발표. 7, 한진출판사 편집고문 사임. 실천문학사 발행인 취임.

1985년 단편 강동만필2발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집행위원.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1988년 동시집 개구쟁이 산복이(창작과비평사) 간행. 민족작가회의 탈퇴.

19891(스포츠서울사), 산너머 남촌(창작과 비평사) 간행. 7회 요산문학상 수상.

1991년 단편장곡리 고욤나무(우정 반세기), 유자소전(세계의 문학) 발표.장곡리 고욤나무로 제9회 흙의 문예상 수상. 펜문학상 수상.

1992년 제2회 서라벌문학상 수상. 장편 매월당 김시습(문이당) 간행.

1993년 제8회 만해문학상 수상.

1994더더대를 찾아서, 장척리 으름나무발표.

1995년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이사. 장동리 싸리나무발표.

1996년 문학의 해 집행위원회 출판 홍보분과위원장

1998장천리 소태나무발표.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1999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2000[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로 동인문학상 수상

2003225일 위암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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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휘 / 대표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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