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각장애인 일러스트레이터 미긍주혜
‘두 개의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어. 마비된 오른손으로 단추를 채울 수 있게 해달라고. 이젠 그 손으로 긍정의 그림을 그리고 있지.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두 개의 달을 불러줄게요. 진실하고 절실한 소원이라면 이루어질 거야. 반드시!’
4월의 어느 봄날, 자택에서 만난 작가 미긍주혜(40) 씨는 자신의 대표작인 ‘두 개의 달’로 본인을 소개했다. 25세에 교통사고로 뇌병변장애 1급 판정을 받은 미긍주혜 씨는 사고 이후 시력이 떨어지고 오른쪽 시선이 차단된 채 겹쳐 보이는 ‘복시’가 찾아왔다. 작품에서 보여주듯 달이 두 개로 보이는 이유다. 또 뇌손상으로 인해 오른손 마비까지 왔다.
5%의 살아날 확률을 뚫고 붙잡은 생명은 재활로 시작한 그림을 그리며 차츰 희망을 찾아갔다. 차가운 시선 속에서 광대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숨긴 적도 있지만, 장애를 평생 풀어야 할 과제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강주혜는 ‘미긍주혜’가 되었다.
일러스트 작가 ‘미긍주혜’로 활동한 지 10년. 그가 보여주는 삶의 자세와 작품 속 ‘긍정’ 에너지는 정말 놀랍다. ‘아름다운 긍정(美肯)’으로 오늘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미긍주혜 씨의 이야기를 전한다. 느릿느릿, 또박또박 그리고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8개월간 일주일에 100장씩 그리고 나니…
-오래전 끔찍한 교통사고로 큰 장애를 입었는데도 작가로 당당하게 일어섰어요.
=2003년 횡단보도를 건너다 음주 운전 차량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지요. 말로만 들은 사고 이야기예요. 당시 전 죽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차에 치여 8m를 나가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여덟 조각 난 골반, 다리뼈 탈골 등 몸이 산산조각 났어요. 뇌손상으로 시각장애가 오고 좌뇌 손상으로 오른쪽 신경이 마비됐습니다. 1년 반이란 긴 병원 생활을 마치고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2009년 미술반이 없어지면서 일러스트 학원을 다녔는데, 또 교통사고가 났지 뭐예요. 그땐 정말 암담했습니다. 병원에서는 그림 그리면 안 된다고 했지만 새벽부터 미술학원 강사의 낙산공원 작업실을 악착같이 다녔어요. 그렇게 8개월을 일주일에 100장씩 그리고 나니 주변에서 저를 작가라 부르더라고요.
-사물이나 동물, 인물 등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을 그립니다. 일상의 특별함을 전달하고 싶은 건가요?
=특별한 구상으로 멋지게 표현하는 작가들은 얼마든지 있어요. 저는 누구나 쉽게 담아낼 수 있는 것을 담고자 합니다. 그게 바로 ‘삶’이죠. 제가 시각장애로 느끼게 된 두 개의 세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에는 글귀를 더해 전달하고 있어요.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가 있다면요?
=그림에 짧은 말을 곁들임으로써 저의 감성을 담아낼 수도 있고 그림의 주제를 위트 있게 표현할 수도 있지요. 저의 생각을 더 깊이 전달하기 위해서예요.
-그림마다 ‘아름다운 긍정 美肯’이란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미긍(美肯)’이란 필명은 어디서 시작된 건가요?
=이런 몸으로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얘기에 주변 사람들이 미친 거 아니냐며 농담을 했어요. 그래서 필명으로 삼기로 했죠. 기왕 미쳤다는 소리 듣는 거 긍정에 미쳐보기로.(웃음) 그리고 미치도록 아름다운 긍정 ‘미긍(美肯)’으로 일어섰습니다.

발달장애 직장인 위한 그림 작업도
-작가로서 작품 전시, 책 발간, 강연, 기업체와 협업뿐 아니라 그림으로 ‘휠체어 퍼스트 운동’이나 ‘시각장애인 안내견 우리가 지켜요’ 등 캠페인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어요.
=2013년 <광대의 꿈>이란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고, 전시한 작품을 모아 그림 에세이집을 냈어요. 그 뒤 2016년에 <나가세>, 2017년 <사샤삵>이란 이름으로 두 차례 개인전을 더 열었고요. 협업 전시도 몇 차례 했는데, 최근인 201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젊은 작가 7인展>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은 장애에 대한 이해 자체를 안 하려고 합니다. 전 비장애인이었다가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어요. 중간자 입장에서 매개체로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해요. ‘휠체어 퍼스트 운동’이나 ‘시각장애인 안내견 우리가 지켜요’ 그리고 올 초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함께한 발달장애 직장인을 위한 안전 책자의 삽화 작업도 같은 맥락이에요. 그런 관점에서 장애이해 교육은 아주 중요해요.
-장애이해 교육과 아이들 미술치료에 특별히 애정을 쏟는 이유가 있나요?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가 뭔지 아세요? 바로 ‘포기 장애’예요. 제가 장애에 부딪히고 이겨내기 위해 마비된 손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이 쉽게 포기하는 모습을 바로잡고 싶어요.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도전을 택하기 바라요. 그림 그리기를 함께 하는 이유요? 그림으로 마음을 치유한다고 하지요. 마음의 짐을 그림으로 내보내며 에너지를 공유하고 있어요. ‘미술 심리치료’인 거죠. 제가 마음의 짐을 그림으로 덜어냈듯 아이들도 그렇게 되길 바라지요. 제 그림 수업의 특징을 하나 알려드릴까요? 지우개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꾸밈없이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기 아주 좋죠. 지우개를 쓰면 지우기 바빠서 한 작품을 완성하기 힘들거든요.
-관련 자격증도 갖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장애이해 교육강사·미술심리상담 1급’ 자격증을 땄어요. 이 또한 저에겐 도전이었죠. 똑바로 볼 수 없는 제 시력은 청력을 더욱 예민하게 해주더군요. 글 대신 소리로 수업을 들었어요.
-온라인 채널로도 다양하게 소통하고 있어요.
=페이스북으로 알게 된 30대 소연 양은 출근길에 버스에 깔려 다리를 절단했어요. 제 방송을 보고 자신도 세상 밖으로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최근 네이버밴드로 소통하는 알츠하이머로 고통받는 한 중년 여성이 제 글과 그림으로 에너지를 얻고 있다는 댓글에 감사해서 책과 기념품을 강원도의 집으로 보내드렸어요. 이렇게 함께 ‘공생’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싶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배운 삶의 지혜
-그림을 그리면서 배운 삶의 지혜가 있을까요?
=진심, 진정성은 통하는 거 같아요. 그러려면 내 경험을 토대로 캐릭터를 만들고, 자료를 찾아 내 이야기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시각장애 아티스트’란 소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장애’란 단어가 처음엔 불편했어요. 그래서 저도 장애를 감추기에 급급했죠. 제 작품 중에 <광대의 꿈1>을 보면 아실 거예요. 그림 속 화려하게 치장한 광대가 바로 저예요. 그림 위에 적힌 글귀를 들려드릴게요. ‘첨으로 혼자 줄을 타는 나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차가운 시선들. 네가 혼자 할 수는 있겠냐는 손가락질들, 야유들…. 유난히 밝은 광대 분장 속의 나는 두려움을 들켜선 안 돼!’ 하지만 깨달았죠. 제 감성을 전달하려면 지금의 힘든 상태를 통해 나를 보여줘야 한다는 걸요. 그러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나에게 장애란? 어쩌면 평생 풀어내야 할 어려운 과제물일지 몰라요.
-작가의 하루가 궁금해요.
=일찍 일어나는 편입니다. 조용한 상태가 집중이 잘되거든요. 요즘은 새벽 6시부터 두 시간 책을 읽고 있어요. 물론 시각 때문에 쉽지 않지만 글을 쓰려면 다른 작가들의 글을 보며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해서요. 같은 책을 두 번씩 읽고 있습니다. 오전에 글을 쓰고 오후엔 그림 작업을 구상해요.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데 감사하며 하루를 채워나갑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요.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고 있나요?
=앉아 있기만 하면 몸이 계속 틀어져요. 손 마비는 물론 목과 척추도요. 2019년 6월부터 만보 걷기를 하고 있어요. 집 주변의 서울 보라매공원 걷기 트랙을 매일 돌아요. 요즘은 열세 바퀴는 거뜬하게 돕니다. 만보기로 1만 4000보 정도예요.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게 진정한 장애”
-요즘 무슨 작업을 하나요?
=받으면 기분 좋고 힘이 되는 이모티콘을 만들고 있어요. 일명 ‘미긍 마우스’지요. 올해가 쥐의 해잖아요. 쥐가 긍정의 힘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어줄 거예요. 총 40컷으로 구성했고요. 카카오톡, 네이버밴드, 네이버 등에 공개됩니다. 마감이 4월 말까지인데, 아직 10개를 더 작업해야 해요. 지금 이 시간에도 마감에 쫓기고 있어요.(웃음)
-올해 세운 계획은 뭐예요?
=제가 겪어온 일을 글에 담아 그림 에세이집을 내볼 생각이에요. 내년 출간 예정이고요. 첫 에세이집이 그림 중심인데, 이번엔 글의 비중을 늘리려고요. 이를 누리소통망(SNS)에 올렸더니 그걸 본 밴드 운영자의 권유로 지금 밴드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어요. (미긍의 장애극복 그림 에세이 누리집 : https://band.us/@xmas798) 책이 발행되는 시기에 맞춰 유튜브도 본격적으로 해볼 생각이에요. 제 이야기를 방송으로 들려드릴 거예요.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장애인 친구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나요?
=이건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몸이 불편해서 할 수 없다는 것도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거 아닐까요.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게 진정한 ‘장애’입니다. 여기 시각장애, 마비된 손으로 긍정의 글과 그림을 담는 미긍이 있습니다. 장애인 작가라는 타이틀을 벗어 비장애인 그림작가들과 경쟁해 2018년 ‘일·생활 균형 한 컷’ 공모전(고용노동부)에서도 당선됐습니다. 어떤 일이든 도전하고 노력해보세요. 분명히 당신만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겁니다. 이상 아름다운 긍정을 보여드리는 그림작가 ‘미긍’이었습니다! (출처=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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