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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광복회 학술연구원장 |
1. 들어가는 글
최근의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우리의 동아시아 지역 질서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동북아균형자론 혹은 이와 결부된 한미동맹 문제, 중국과의 연대 나아가 일본과의 우호관계 등 동북아시아에서 급속히 변화하는 국제질서에서 우리의 위상을 찾는 작업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동아시아 질서가 중국의 경제대국으로의 부상이나 미국의 독단적 우월주의 등으로 인해 구조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화된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에 따른 우리의 역할론을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인식의 원류를 근현대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찾아보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1909년 안중근이 여순의 옥중에서 저술한 「동양평화론」도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망국의 과정을 겪고 있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고민했던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구상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20세기초 망국의 위기에 처하여 안중근을 비롯한 한국의 지식인들이 처한 딜레마는 국력의 열세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느냐의 문제였다. 러시아로 대표되는 서양 인종에 대항하여 한중일 등 동양인종의 단결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인식되는 상황아래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는 일본의 한국 침략은 종래의 한중일 협력의 기반을 붕괴시키고, 한일간 전쟁의 상태로 나아가게 하는 평화의 파괴였다. 따라서 안중근으로서는 이토 히로부미 사살이 단순히 한국의 독립만을 위하는 것이 아닌 한중일 등 동양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조치이자, 일본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거사였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로 명성황후 시해, 고종황제 폐위, 을사늑약과 정미늑약 강제체결, 군대 해산,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원한다고 세계를 속이고 결국은 동양평화를 방해한 것 등의 이유를 들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개전 당시 일왕의 선전포고문에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양세력에 맞서 황인종인 동양 삼국이 힘을 합쳐 아시아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안중근은 이를 계기로 일본이 말로는 동양평화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한국을 식민지화 하려는 과정이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잘못이 저질러진 데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고 보아 그를 제거하는 것이 동양 평화에 기여한다고 보았다. (「안중근 공판기록」, 『안중근유고집』, 256-258쪽.)
안중근은 일본의 ‘동양평화’주장의 허구성을 비판하면서 당시 한국이 처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였으며 미래의 동북아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일종의 미래상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다시 거론되는 것은 그만큼 현금의 국제정세가 당시만큼이나 치열하고 복잡하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한중일간의 평화회의의 개최 등 공동체 구성을 위한 안중근의 인식에서 21세기 이후 미래의 동아시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당시 국가간 전쟁과 식민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북아 평화를 위한 선언적 의미를 띠었으며, 이상주의적 측면이 강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100년이 지난 현재의 동북아 현실을 돌이켜 볼 때 안중근의 구상은 한중일 모두에게 여전히 하나의 지역적 과제로 남아있는 동북아 평화구축을 위한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안중근이 옥중에서 저술한 「동양평화론」은 1909년 사형선고를 받고 저술에 착수하여 미처 완성을 보지 못한 초고 단계의 저술이기는 하지만 이를 현재의 동북아 현실에 비추어 미래의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과 지역 국가 간 화해와 교류협력의 확대를 위한 비전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 하겠다.
본 주제에서는 「동양평화론」 집필 당시의 시대적 배경, 이토를 처단한 의거의 전말, 유작으로 남은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에 대해 살펴보고, 특히 「동양평화론」의 영향과 당시 각국의 반응을 조명해 보려고 한다.
2. 시대적 배경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이어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사정은 당시의 국제정세와 연관이 있다. 특히 러시아의 동진정책과 일본의 대륙진출이 그 지역을 중심으로 충돌하여 남북만주와 한반도를 두고 서로 각축을 벌인 곳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제정 러시아는 수 세기 간에 걸친 동진정책 끝에 중국 흑룡강 북쪽 시베리아 전역을 점령하고 1858년 아이훈(愛琿) 조약을 맺어 이를 합법화하였다. 이와 함께 흑룡강을 아무르강이라 명명하고 아무르州 총독부를 설치하여 시베리아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1860년에는 흑룡강 하류 남부의 烏蘇里江 동쪽의 연해주까지 병합하는 북경조약을 맺게 된다.
이후 러시아는 태평양 방면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연해주 남단의 중요 항구인 블라디보스톡 군항을 확보하면서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철도를 부설하였다. 이어서 우스리스크에서 흑룡강성을 관통하는 東靑철도를 부설하고 하얼빈을 만주경략의 거점도시로 건설하였다. 또한 동청철도의 南支線을 요동반도의 남단인 대련과 여순까지 연결하려 획책하였다.
한편 메이지유신 후 대륙진출 정책을 추진하던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 한반도에서 청나라 군대를 구축하면서 여순과 대련을 점령하고 북쪽으로는 봉천까지 진출하여 요동반도를 차지하였으며,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나가사키(下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는 중국 진출을 노리던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3국간섭’을 통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의화단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출병한 러시아는 여순과 대련을 租借하고 그곳에 부동항인 여순 군항을 건설하여 극동해군함대의 근거지를 만들었다.
일본으로서는 청일전쟁까지 치르면서 확보하려던 요동반도와 남만주 경영에 실패하자, 러시아와의 일전을 치르게 되니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해전에서 기선을 잡은 일본은 막대한 병력을 희생하면서까지 치른 여순공방전을 통해 난공불락의 여순항을 함락시켜 승세를 굳히고 1905년 9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아래 포츠머드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이 지역에 정예군단인 관동군을 기반으로 관동도독부를 설치하고 장차 만주경영에 착수하였다.
이 시기에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의 표적물이 된 이토 히로부미가 그곳에 출현하게 되는데, 마침 러시아의 대장성 대신인 코코프체프가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극동지역 순시차 하얼빈을 방문하는 일정에 맞추기 위한 행보였다.
3. 의거 전말
국권피탈을 눈앞에 둔 1909년 초 망명지 연해주 연추(煙秋)에서 단지동맹을 맺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 회장이 된 안중근은 조국의 독립회복과 동양평화 실현을 위해 힘쓰던 중 그해 10월 들어 마침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대신 코코프체프와 만나 동양침략정책을 협상하기 위해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중근은 이때야말로 나라와 동포의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전날의 의병 국내진공작전의 전우였던 우덕순(禹德淳)과 같이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 중도에 포그라니치나야에서 유동하(劉東夏)를 통역으로 합류시킨 후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일행은 그곳 국민회 회장인 김성백(金成伯)의 집에 유숙하면서 조도선(曹道先) 동지와도 합류하였다. 이들은 밤새워 거사계획을 논의하고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톡의 『대동공보』 주필 이강(李剛)에게 거사계획과 자금조달에 관해 우덕순과 연서하여 편지를 썼다.
10월 24일 아침 일행은 의거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채가구(蔡家溝)에서 내려 여관에 투숙하였다. 10월 25일 안중근은 거사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채가구와 하얼빈 두 역에서의 거사계획을 세웠다. 우덕순과 조도선이 채가구 거사를 맡고,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되돌아와서 이곳에서 거사를 준비했다.
김성백의 집에서 유동하와 그날 밤을 묵은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역사적인 아침을 맞았다. 오전 7시경 유동하와 같이 하얼빈역에 간 안중근은 연소한 유동하를 타일러 돌려보내고 단신으로 역 구내 찻집에 들어가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 동안 채가구역에서 거사를 계획했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러시아 경비병이 수상하다고 여겨 여관에 구금되면서 기회를 놓치고 그 다음날 체포되고 말았다.
오전 9시, 미리 삼엄한 경계망을 편 하얼빈 역두에 한국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멈춰 섰다. 대기중이던 러시아 대장대신 코코프체프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기내에 들어가 이토를 영접했다. 약 20분 뒤 이토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려 군악을 울리며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고 이어 각국 사절단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받기 시작하였다.
안중근은 러시아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토가 10여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안중근은 찰나를 놓치지 않고 브로닝 권총을 꺼내들고 그를 향해 발사하였다. 제1탄이 이토의 가슴을 명중시키고, 제2탄도 그의 흉부를 맞추었다. 제3탄이 그의 복부를 관통하자 이토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만약 쓰러진 자가 이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뒤따르던 일본인을 향해 세 발을 더 쏘았다. 이토를 수행하던 하얼빈 일본총영사 川上俊彦과 궁내부 비서관 森泰二郞, 만철 이사 田中淸太郞이 중경상을 입고 차례로 쓰러졌다. 절묘하게도 이토 일행과 뒤섞여 수행하던 코코프체프 일행은 단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이토가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코리아 후라(대한국 만세)를 3창하고 태연하게 러시아 헌병장교에 의해 체포되었다. 치명상을 입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20여분 만에 절명하였다. 거사 직후 체포된 안중근은 역 구내의 러시아 헌병대 분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의 심문을 받았다. 안중근은 성명을 大韓國人 안응칠(安應七), 연령을 31세, 신분을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으로 자신은 독립전쟁 중 적의 수괴를 처단 응징한 것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안중근은 그날 저녁 8~9시경 일본영사관으로 넘겨져 영사관 지하 감방에 구금되었다.
안중근은 의거 후 여순감옥에서 자신의 떳떳한 일생의 행적을 밝히는 자서전인 「안응칠역사」를 저술하였다. 이어 의거의 뜻을 밝히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일제의 약속 위반으로 집필은 미완성인체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또한 안중근은 의거 후 순국까지 5개월에 걸친 혹독한 일제 신문에서 시종일관 의연하게 일제의 침략과 그 하수인인 이토의 죄상을 나열하면서 한국독립의 회복과 동양평화의 유지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안중근은 생사에 임한 감옥 안에서 담담히 자신의 소회를 나타내는 유묵(遺墨)을 남겼는데, 알려진 것만도 56종 이상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大韓國人 安重根’의 이름과 함께 유명한 단지장인(斷指掌印)이 찍혀있다.
4.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안중근은 의거 후 여순감옥에 수감되어 1909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인 1910년 3월 15일 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자서전을 쓰고 제목을 「안응칠역사」라 하였다. 「안응칠역사」는 안중근 의사 순국 80주년이 되는 1990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한문으로 된 원문 내용과 함께 국역본을 간행함으로써 안 의사의 행적과 사상, 그리고 의거를 이해하는 원전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만 그 서술에 있어 생존 동지들의 신변을 위해 가능한 관련 인물들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거나 아예 생략한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하얼빈의거 동지인 우덕순에 대해서는 1908년 여름 국내 6鎭지역 진공 의병활동 대목에서 언급을 피했고, 1909년 2월 연추에서 행한 단지동맹 부분에서는 그 때 동맹으로 성립한 ‘동의단지회’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1907년 8월 초 군대해산의 참상을 목도하고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하얼빈의거까지 3년여 동안 ‘안중근’이름 대신 ‘안응칠’로 행세하였기에 그 이름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 자서전의 집필을 마침과 전후하여 「동양평화론」을 기고하였다. 안중근이 오랫동안 구상했던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한 시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910년 2월 17일 이전임에는 틀림없다. 이는 안중근이 2월 17일 히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을 만나 “나는 지금 옥중에서 동양정책과 전기를 쓰고 있는데 이것을 완성하고 싶다. 또한 나의 사형은 빌렘신부(프랑스인 홍석구 신부)가 나를 만나기 위해 오게 되었다고 하나 그를 만날 기회를 얻은 뒤 내가 믿는 천주교가 기념으로 지정한 날, 즉 3월 25일에 집행해주기 바란다.”라고 한데서 알 수 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체제를 序文, 前鑑, 現狀, 伏線, 問答으로 잡았다.
1910년 3월 15일 「안응칠역사」를 완성한 안중근은 「동양평화론」 집필에 박차를 가해 3월 18일 서론 부분을 완성하였다. 3월 25일로 예정된 자신의 사형 집행일을 「동양평화론」 집필이 끝나지 않아서 15일 정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일제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안중근의 요구를 묵살하고 3월 26일 사형을 집행하여 결국 「동양평화론」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러한 안중근의 유고는 그가 순국한 후 극비로 취급되어 가족에게도 보이지 않고 즉시 압수되어 한국통치 자료로만 활용하였다.
안중근의 유고는 60년이 지난 1969년에야 세상에 드러났다. 처음 동경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崔書勉) 원장이 1969년 4월 동경 고서점에서 입수한 『안중근자서전』이란 제목의 일역본이었다. 유고 그대로의 등사본은 그 후 다시 10년이 경과된 1979년 9월 재일교포 金正明 교수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연구실 ‘七條凊美 문서’ 가운데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등사본을 합책한 『安重根傳記 及 論說』이라 제명한 것을 발굴함으로써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은 미완성의 「동양평화론」과 그밖에 그가 남긴 언행을 통해 그의 독립사상과 동양평화론을 정리하면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3국이 각기 서로 침략하지 말고 독립을 견지하면서 단결하여 서세동점의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때 이룩될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반면 이토를 비롯한 일제 침략자들이 내세우는 동양평화론은 겉으로는 같은 것 같으나 그 내용과 논리는 판이한 것으로 그들은 황화론(黃禍論)을 빌미로 동양의 패권을 잡아 그들의 동양 각국에 대한 침략주의를 합리화시키려는 것으로 인식, 그를 정면 반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중근은 공판정에서 이토의 총살에 대해 “동양의 평화를 지킨다.”라는 정의의 응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학자 박은식은 『안중근전』의 서론에서 “안중근을 그의 역사에만 근거하여 논한다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지사(志士)’일뿐 아니라 한국의 국구(國仇)를 갚은 열협(烈俠)이 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말(志士와 義士)은 안중근을 다 설명하기에 부족한 것으로 생각한다. 안중근은 세계적인 眼光(안목)을 갖고 스스로 ‘평화의 대표’를 자임한 것이다.”라고 논찬하고 있다.
또한 박은식은 『안중근전』의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 “안중근이 평시에 대성질호하여 우리 국민에게 고한 것은 단합주의(團合主意)이다. 우리 동포들은 이것을 잊지 않았는가. 아! 안중근이 손에 칼을 쥐고 좌우에 있다.
안중근의 애국애족의 독립정신과 동양평화를 위한 높은 뜻과 사상은 그가 주장한 ‘국민의 단합주의’의 구현으로부터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안중근의 애국애족의 독립정신과 동양평화를 위한 높은 뜻과 사상은 그가 주장한 ‘국민의 단합주의’의 구현으로부터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는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지금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환난을 동양인종이 일치단결해서 극력 방어해야 함이 제일의 상책임은 비록 어린 아일지라도 익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순연한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깎고 友誼를 끊어 스스로 방휼(蚌鷸)의 형세를 만들어 어부에게 이득이 되게 하는가. 韓淸 양국인의 소망이 크게 절단되어 버렸다.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議論이 한청 양국인의 폐부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의 앞잡이가 될 것이 명약관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몇 억 황인종 중의 허다한 유지와 강개남아가 어찌 수수방관하고 앉아서 동양 전체의 까맣게 타죽은 참상을 기다릴 것이며 또 그것이 옳겠는가. 그래서 동양평화를 위한 義戰을 하얼빈에서 개전하고 담판하는 자리를 旅順口에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니 諸公은 눈으로 깊이 살필지어다.
요약컨대 안중근은 서세동점이라는 시대 속에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을 방법을 강구하는데 「동양평화론」을 서술하는 목적이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동양평화론」을 완성하지 못하였으므로 뒷부분의 현상, 복선, 문답 편에서 안중근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그 내용의 대체적인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 구체적 내용은 소노키(園木) 통역생이 「安重根 園木通譯生の 談 東洋平和論」을 그의 딸이 최서면에게 제공함으로써 확인된 바 있다. 이후 대체적인 「동양평화론」의 내용을 담은 사료인 「청취서」를 통해 그 실체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복선(伏線)에서 안중근이 언급하려고 한 것은 1910년 2월 14일 히라이시(平石) 고등법원장과의 면담을 하였을 때 나눈 대화내용일 것으로 추측된다. 즉 일본이 세계 각국의 신용을 얻는 일, 일본의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일본의 약점을 보완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대체로 복선의 내용이 「동양평화론」의 핵심으로 보인다.
5. 안중근 傳記 발간
하얼빈 의거 이후 국내에서는 물론, 의거현장에 속한 만주와 의거 책원지가 되었던 연해주 그리고 중국 본토, 미주 하와이 등지에서 서로 잇달아 안중근의 전기가 나왔다. 그것도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각 지역 한인사회에서 역사학자 朴殷植을 비롯하여 桂奉瑀, 洪焉, 李建昇, 金澤榮, 鄭沅, 鄭淯 같은 韓國과 中國의 저명한 학자와 문인에 의해 논찬되어 독자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중국인들의 평가와 수많은 추모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안중근은 중국인들의 반제국주의 투쟁 에너지를 제공하였고, 오늘날까지도 한중우호의 상징적인 인물로 각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평화세력의 성장에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이 안중근을 신불(神佛)로 섬겼다는 일본의 기록에서 보듯, 그는 한국근대사 속의 신적 존재로 추앙을 받았다. 김구는 그를 사당의 신주에 비유하여 한국인의 정신적 기둥으로 삼았으며, 대표적인 사회주의 사상가 김산(장지락)도 그를 독립운동의 모델로 삼았다. 안중근은 좌우 독립운동세력의 간극을 메우는 동시에 사상적 행동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통일한국을 지향하는 한민족에게 남과 북에서 동시에 존경을 받는 안중근은 평화통일을 지향할 수 있는 사상적 에너지이자 우리 민족정신의 자산으로 역사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국을 앞두고 안중근 자신이 저술한 遺稿는 순국 즉시 일제에 의해 압수되어 나라 잃은 한국민에게는 물론 유족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극비 속에 그들의 한국식민통치 자료로만 이용되었다. 아울러 국내외에서 간행된 여러 문인 학자들에 의한 전기를 비롯한 관련 저술들도 예외 없이 탄압대상이 되어 압수되었고, ‘불온문서’로서 유포가 금지되었다. 게다가 일제 당국이 작성한 심문 자료와 공판기록 조차도 오랫동안 일반이 접근할 수 없는 비밀문서로 취급되었다. 다행히 1970년대 말부터 일본과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주목할 만한 문헌들이 조사 수집되고 현지답사도 빈번해진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다만 하루 속히 의사의 묘소를 발굴하여 국내에 안장하는 일이 최대의 숙원사업으로 남아있어 안타깝게 한다.
6. 각국의 반응과 영향
일제강점 아래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안중근에게서 자신의 역할모델을 구하고자 했다. 반제국주의 투쟁에 일어섰던 근대중국의 인사들에게 있어서도 안중근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안중근의거는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먼저 해외의 독립투사들과 한인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의 위대성을 찬양하고 안중근의 유지를 계승 발전시킬 것을 다짐하면서 반일 독립투쟁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는 안중근 순국 후 러시아지역의 한인들이 개최한 안중근 추도회에서 거류민회 서기 조창호가 “사정은 여하튼간에 국가의 독립에 한 줄기의 서광을 비추었다는 점에서 생각하면 이 이상 기쁜 일은 없다” 라고 한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해외 한인들과 달리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무력에 의해 장악된 국내 현실 속에서 한국인들은 안중근의거의 정당성을 공개적으로 칭송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침묵 속에서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다만 국내에서도 서북학회·대한매일신보 등 사회운동세력, 천주교·개신교 계통의 종교세력, 의병·유생·학생세력이 안중근의 의거를 직·간접적으로 지지하거나 환영하였다.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국내 어느 신문보다 적극적으로 안중근의 주장과 재판관련 상황을 보도함으로써 안중근의 사상과 행동을 국내에 소개하였다. 국내 의병들 또한 안중근의거를 크게 기뻐하면서 자신들이 이토를 처단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이후 이들 의병은 안중근의 활동무대인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을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한국 황실과 정부는 이토의 장례식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소동을 벌였다. 민간의 附日人士들은 이른바 ‘국민사죄단’ 파견을 시도하였다. 이를 보는 일제는 이들이 국민사죄단의 파견을 구실로 사욕을 채우려고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제의 한국침략 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단정하여 결국 파단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부일인사들은 이토 추도회를 개최하고 송덕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또한 이런 부일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더욱 일제에 충성을 보이는 수단으로 안중근과 그의 의거를 악용하고 이토를 광적으로 추도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안중근의거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독립운동이냐 매국활동이냐라는 선택의 길을 제공하는 시금석이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의거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세력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고,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세력은 일제의 주구가 되어 한국을 일제의 식민지로 기꺼이 바치기까지 했던 것이다.
또한 안중근의거는 국제사회에서 크나큰 반향을 일으켰다. 예를 들면 중국의 유명한 문호인 노신은 안중근의거를 듣고 호놀룰루의 『자유신보』에 “4억 중국인은 부끄럽게 여기고 죽어야 한다.”라는 표현을 빌려 안중근의거의 위대성을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정세와 자국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러·청·미·불·독 등 주변 열강의 안중근의거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으며, 이토 이로부미의 죽음에 동정을 표하기도 하였다.
안중근의거 직후 중국인들은 안중근의 담력과 애국정신을 존경했지만, 안중근이란 인물 및 그의 의거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안중근 및 그의 의거를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중근에 관한 전기, 특히 박은식의 『안중근전』은 동양평화사상을 소개하
여 중국인들에게 안중근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영웅임을 인식시켰으며, 한중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공감대가 형성되어 향후 중국인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안중근의거는 중국인들이 한국에 대한 관심과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고 한인지사들이 중국 혁명인사들과 친교를 맺고 ‘남사(藍社)’ 같은 혁명단체에서 활약할 수 있게 된 상황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노령지역 한인의 안중근의거에 대한 인식과 반응은 『대동공보』에 잘 나타나 있다. 『대동공보』는 안중근 구출운동을 전개하였고, 이것이 불가능해지자 안중근의 유지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대동공보』는 미주의 중국계 신문에 보도된 기사와 일본인의 안중근의거에 대한 인식을 적극 보도함으로써 안중근의거의 정당성을 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투쟁의 근거를 안중근의거에서 찾고 있었다. 『대동공보』가 폐간당한 후에는 『권업신문』이 뒤를 이어 계봉우의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연재하여 안중근의 유지를 계승하기도 하였다.
미주지역에서의 안중근의거에 대한 인식은 『신한민보』와 『신한국보』에서 엿볼 수 있다. 『신한민보』는 ‘영웅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었는데 안중근이야말로 재미한인이 기다리던 영웅’이라는 평가를 보이고 있다. 특히 『신한민보』는 이토의 죄상을 열거하여 드러내는 동시에 안중근의거의 정당성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신한국보』도 안중근을 열사로 칭하면서, 안중근의거는 천리(天理)를 따른 것이라는 인식을 가졌다. 이외에 한인교보사도 호외로 안중근의 이토 처단을 소개하면서 이토가 한국의 한 애국지사에 의해 처단되었다고 흥분을 감추지 않으며 독립은 지금부터 회복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중국 서간도지역에서 발행된 신흥학우단의 기관지 『신흥학우보』에서는 한글로 박은식의 『안중근전』을 역재하여 신흥학우단의 사상적 동력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후 『독립신문』에서는 1914년 출판된 박은식의 『안중근전』을 4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재중 한인들의 안중근의거에 대한 인식은 안중근전기의 저작과 유포 등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때로는 연설회로, 때로는 연극이나 영화, 사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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