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조약 체결 원인이 된 운양호사건도 조선이 먼저 발포한 것으로 왜곡"

민족·역사 / 김영호 기자 / 2019-11-11 11:00:06
흥사단 독도수호 본부에서 정교수가 발표한 주요내용 ④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경복궁침입을 기록한 621일자 조선사(64p1097)

새벽에 일본군이 경복궁 영추문에 이르자, 조선군이 까닭없이 총을 쏘았다.”고 왜곡되게 기록되어 있다.

 

일제가 만든 '조선사', 독립된 나라인 조선의 역사가 아니라 일본사의 일부로서 '조선사'가 쓰여졌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조선사'의 고종부분이다.

 

소제목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다. '한 일'이 아니라 전부 '일 한'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일본과 대립되는 부분은 거의 일방적으로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여 서술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당한 무력충돌에서도 우리 쪽에서 먼저 공격을 한 것으로 왜곡되게 서술되어 있다. 강화도조약 체결 원인이 된 운양호사건(1875)에서도 조선이 먼저 발포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갑오경장 직전인 1894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점령했을 때도 조선군이 까닭없이 먼저 총을 쏘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정도라면 거의 노골적인 날조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측 역사서인 청사고에서도 일본군이 조선왕궁에 들어가 衛兵을 죽이고, 끝내는 국왕 이희(李熙)를 위협하여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으로 하여금 國事를 주관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35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료집임에도 불구하고 12조 밖에 안되는 강화도조약 조문은 '조선사'에 수록하지 않았다. 당파싸움 관련 상소문은 2~3페이지에 달하는 것도 전부 수록한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한반도 해안 어디든 측량을 핑계로 일본군함이 드나들 수 있게 한 강화도조약 제7관이 문제다. 불평등한 정도를 넘어 세계 개항조약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해안 침탈조항을 넣으면서도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라고 속였기 때문이다. 

 

'조선사'는 식민사관 구축의 토대가 된 사료집이다. '조선사'를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료와 면밀히 대조하고 왜곡된 부분을 찾아내어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시급한 과제이며, 식민사관에 빠진 일부 기존학계 주장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겠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다.

 

 

[ⓒ 미디어시시비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김영호 / 편집국장 기자
이메일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