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발가락 떨어져 나가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묘사
권세 좋고 부유한 집안 장남으로 태어나 자란 한하운
추천한 시인의 월북 이후 사상범 몰려 호된 홍역 치러
덫에 걸린 짐승 비명처럼 그의 시구들은 아프고 또 아파
한하운의 일생에 나타나는 어머니와 세 명의 여인
[특집·집중탐구-03]
한하운-지옥에서 새를 키운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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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하운 시인 |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파랑새」 全文… 많은 이들이 한하운의 작품을 말할 때 「보리피리」를 먼저 꼽는다. 개인적 취향일 지도 모를 일이지만, 필자는 정형의 운율이 순식간에 중독성을 일으키는 이 「파랑새」로 그의 문학을 각인하고 있다. 파랑새는 천형(天刑)의 인생을 산, 범인(凡人)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시인의 일생과 의식 세계를 대변하는 마지막 상징물이라는 느낌이다. 눈만 뜨면 썩어들어가고 떨어져 나가는 육신을 감내해야 하는 나환자의 지옥 같은 삶 속에서 그는 기어이 파랑새 한 마리를 키워낸 또 다른 의미에서의 장인(匠人)인 것이다.
한하운은 1920년 3월 10일 함경남도 함흥군 덕천면 쌍봉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태영(泰永)이며, 본관은 청주(淸州). 1936년 17세 나이에 처음 한센병 진단을 받고, 1939년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 (현 서울대학교부속병원)에서 확진된다. 역경 속에서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했다. 함경남도청 축산과에 근무했으나 1945년 한센병 악화로 일을 그만두고 투병하며, 1950년 성혜원, 1952년 신명보육원 등을 설립·운영하였고, 1953년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으로 취임하여 나환자 구제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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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특이한 이력과 작품의 진위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정리가 말끔하지 않다. 우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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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농림학교 시절의 한하운(좌) |
한하운은 시인이다. 그는 놀라운 시를 남긴 시인이 분명하지만, 자전적 소설 「고고한 생명-나의 슬픈 반세기」를 꼼꼼히 읽다 보면 소설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는 이리농업학고 1학년 때부터 ‘밤에는 외국 번역 소설에 취미를 붙여 덮어놓고 읽었다.’고 기록한다. ‘소설에 있어서 불란서 작품과 북구라 파 작품에 심취했다.’거나 ‘작가에 있어서는 오늘의 발자크, 앙드레지드나 헤르만 헤세를 제일 좋아하였다.’는 대목도 있다. 그리고 ‘단편소설 「어머니」, 「두견새」를 잡지 『조강』, 『삼천리』에다 각각 투고하였으나 아무 소식도 없었다.’는 경험도 표현하고 있다.
한하운의 작품에는 가슴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독특한 대목들이 있다. 나환자들이 아니고는 도저히 표현할 재간이 없는, 떨어져 나가는 손가락·발가락 이야기다. 아무리 썩어 문드러졌어도 자기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일은 기막힌 상황이다. 뜻밖으로 그의 묘사는 담담하다.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 어디 양지 터를 가려서/ 깊이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손가락 한 마디」 全文)
손가락·발가락 떨어져 나가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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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시집 『한하운 시초』 표지 |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에도 떨어져 나가는 발가락 이야기가 나온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는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全文)
* 지까다비=일본식 버선
서정이 넘치는 그의 시어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손가락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거나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는 대목은 읽는 이의 가슴을 후벼파다가 기어이 폭발하는 강력한 폭탄이다. 단순히 시적 표현의 기술이 아닌, 생생한 체험의 산물인 까닭에 이런 시구는 새삼 그가 세상으로부터 멸시를 받던 난치병 환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우치게 한다. 처절한 삶 속에서 길어 올린 수많은 서정의 시어들에 섞인 기막힌 진술은 다시 한번 불가사의를 느끼게 한다.
한하운의 천재성을 발견하게 하는 시는 따로 있다.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가//라랴 러려/ 로료 루류/ 르리라 -「개구리」 全文… 단 두 줄의 시이지만, 놀라운 재치는 물론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무심하게 울고 있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앉은 그의 뇌리에는 나병의 시름도 인간의 희로애락도 모두가 사라진 무구한 시심만이 남아 있다. 그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한 마리의 미물 개구리로 변한 그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득도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한하운은 나병이 발병한 뒤에도 스스럼없이 일본으로 중국으로 유학을 다닌다. 물론 그가 그러고 다닐 만큼 집안이 여유로웠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반생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부계(父系-한종규 韓鍾奎)의 가문을 살피면 대대로 선비의 집안으로 과거를 3대나 계속하여 급제한 집이며, 함흥 지방에서는 떵떵거리고 권세 좋게 살던 집안이다. 어머니(김사엽 金姒瞱)는 함경남도 굴지의 대부호의 이남일녀의 막내 귀염 딸로 자라났고…’ 또 이런 설명도 있다. ‘동경의 2년 나머지 생활은 나의 지금까지의 반생에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사촌들이 넷이나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나까지 끼어서 다섯이나 되었다.’ 사촌들까지 그렇게 여럿이서 동경으로 유학을 할 수 있을 만큼 최소한 한하운의 집안은 넉넉했다는 얘기다.
권세 좋고 부유한 집안 장남으로 태어나 자란 한하운
지난 2010년 (재)인천문화재단에서 편찬한 『한하운 전집』(문학과지성사 刊-868p 양장본)과 <한하운 온라인문학관>, 각종 언론에 보도된 기사들에서 드러난 한하운의 캐릭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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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하운 전집-2010년 |
한하운이 투병과 습작을 하면서 시를 쓰고 그 시를 도화지에 써서 문인들이 자주 다니던 다방에서 판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의 이색적인 행동은 대개 비웃음과 천대를 받았지만, 더러 사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무렵 팔려고 내놓은 시들은 ‘파랑새’, ‘비 오는 길’, ‘개구리’ 등이었다. 그런 별난 행동으로 인해 한하운은 당대 유명한 시인을 만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첫 시집이 26편의 작품을 묶은 ‘한하운 시초(詩抄)’다.
한하운의 시를 정음사에서 시집으로 묶어 세상에 처음 알린 이는 월북시인 이병철(李秉哲)이었다. 이병철은 1949년 이화여중 교사직을 사직하고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신천지』를 편집하면서 한하운 시인을 추천했다. 1950년 남로당 서울시 문련예술과사건에 연루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한국전쟁 상황 속에서 6월 28일 출옥하여 7월 25일 의용군 동원 연설을 하고 가족을 데리고 9.28수복 때 월북했다.
이병철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한하운의 등단 이력은 훗날 호된 홍역의 빌미로 작용한다. 그의 작품 「데모」가 시빗거리의 단초가 됐다. …뛰어들고 싶어라/ 뛰어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江물 속으로/ 물구비 파도 소리와 함께/ 萬歲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물구비 제일 앞서 피빛 기빨이 간다/ 뒤에 뒤를 줄 대어/ 목쉰 조선사람들이 간다//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쌀을 달라! 自由를 달라!는/아우성소리 바다소리// 아 바다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데모」 全文
추천한 시인의 월북 이후 사상범 몰려 호된 홍역 치러
사람들은 한때 전위시인으로 이름을 알린 이병철이 한하운이란 가상 인물을 통해 다시 서울로 잠입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병철을 통해 연상되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세상이 한창 시끄러울 적, 1953년 10월 15일 서울신문사 편집국에 한하운이 불쑥 나타났다. 당시 사회부 데스크였던 오소백 부장과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한하운은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나갔다. 기자들이 들여다본 종이에는 시가 한 편 적혀있었는데, 그 유명한 「보리피리」였다.
…보리피리 불면/ 봄 언덕/ 故鄕 그리워/ 필- 닐니리/ 보리피리 불면/ 꽃 靑山/ 어린 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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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구 백운공원에 있는 「보리피리」 시비 |
그런데 이 기사는 오히려 한하운에 대한 의심을 부추겼다. ‘좌익 선동가’의 시를 쓴, 얼굴 없는 시인에 대한 비난이 계속 이어졌다. 파장이 일자 이 기사를 다룬 오소백은 서울신문사를 그만두게 된다. 국회와 다른 언론들은 「데모」를 두고 공산주의자들의 ‘적색 선동’이자 ‘빨치산의 남침 신호’라는 원색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좌익 선동가’의 시를 쓴, 얼굴 없는 시인에 대한 비난이 계속 이어졌다. 막 휴전이 끝난 전쟁 직후의 사회는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 차 있었고 한하운은 그 먹잇감이 됐다.
극적인 반전은 그로부터 약 한 달쯤 뒤에 일어난다. 1953년 11월 20일 개최된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하운에 대한 질의가 이어지자, 바로 다음 날인 21일 한하운이 건장한 풍채를 이끌고 치안국 조사실에 나타난다. 장시간의 조사가 이뤄졌고, 22일 치안국장은 기자들 앞에서 뜻밖의 발표를 하게 된다. ‘한하운은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과 ‘한하운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조사 결과였다. 『한하운 전집』은 시 「데모」를 ‘1946년 3월 13일 함흥에서 일어난 함흥 학생들의 붉은 군대와 그 주구(走狗)에 항거한 붕기 사건에 바치는 노래’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하운은 어느 날 갑자기 천형의 수인이 된 현실을 부정하거나 고통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 비명을 시로 승화시키는 일에 매달린다. 덫에 걸린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그의 시구들은 아무리 읽어도 아프고 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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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생각」 친필 초고 |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全文…나병(癩病=한센병)은 유전 질병이 아니다. 한하운은 자신이 처한 지옥 같은 현실을 얼마나 부정하고 싶었던지, 부모마저도 문둥이로 만들어 자신을 ‘문둥이 새끼’라고 표현한다. 자신을 ‘문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말을 부정하고 싶어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라고 외친다.
덫에 걸린 짐승 비명처럼 그의 시구들은 아프고 또 아파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억겁을 두고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벌이올시다 벌이올시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나」 全文 …그러다가 이번엔 자신을 사람도 짐승도 아닌 ‘버섯’이라고 외쳐보기도 하고, 억겁을 나누고도 남을 ‘벌(罰)’이라고도 부르댄다. 반복되는 ‘아니올시다’의 운율 고랑에 눈물이 그득하다.
아무리 곱씹어도 자신의 불행이 죄일 것만 같은 사념은 드디어 ‘벌’이라는 결론을 좀처럼 벗어나기가 힘들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罰)이올시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 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벌(罰)」 全文
…한 번도 웃어 본 일이 없다/ 한 번도 울어 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 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 가는 시장끼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짓궂게 왔다가는 포만증(飽滿症)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메워 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 데도 없는 낯선 이 길머리에/ 쩔룸쩔룸 다섯 자보다 좀 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키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웬 땅을 덮는 것이냐// …/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 얼른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자화상」 全文
한하운의 일생에 나타나는 어머니와 세 명의 여인
자료에서 언급되는, 한하운의 일생에 깊숙이 관여한 여인들은 어머니를 빼고 세 사람 정도다. 우선 「반생기」에 R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어려서부터 사귀었던 누이동생의 친구인 Y여고보 R이라는 소프라니스트’다. 수기 소설 안에서 R은 그야말로 지고지순한 첫사랑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나병이 발병한 한하운의 치료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한다. 금강산에서 방학기간 내내 병수발을 들고, 주사를 놓아주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면서, 썩어 문드러지는 육신을 보고도 변치 않는 사랑을 실천하는 R은 한하운의 이별 권유나 동반자살 제의도 완강히 거절한다.
두 번째 여인은 북경 대학에서 만난 S라는 여학생이다. S 역시 한하운을 지극히 사랑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R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낀 한하운은 어느 날 재발한 나병의 환부를 보여주며 자신의 병증을 숨김없이 고백한다. 그다음 날 S는 ‘중화(中貨) 300원과 금반지를 내밀고서는 이 돈은 병 치료에 쓰라는 것이었다. 금반지는 자기의 기념으로 언제까지나 간직하여 달라’고 하고 사라진다. 그리고 그 며칠 후 신문에 ‘모 여대생이 실연 끝에 음독자살’이란 기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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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포 장릉공원묘지에 세워진 한하운시인길 안내판 |
충격 속에 ‘몽고의 사막이며, 남쪽으로 양자강, 상해, 남경, 소주 땅’을 방황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 R은 변함없는 사랑을 표현하며 혼인을 종용하지만, 한하운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R은 한하운의 약을 구하기 위해 경성(서울)을 다녀온 일로 함흥 형무소에 갇힌 소식을 끝으로 두 사람의 인연은 끝난다. 「반생기」에 등장하는 R이나 S는 실존 인물일까, 아니면 소설 속 가공인물들일까. 다소 각색된 대목이 없지 않겠지만, 「반생기」가 수기(手記) 소설로 알려진 이상 아주 터무니없는 허구는 아니지 싶기도 하다.
한하운의 세 번째 여인은 1950년대 초 성계원에서 결혼해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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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하운이 살던 십정동 자택 |
1950년 3월 한센병에 걸린 채 부평에 온 시인 한하운은 1959년 완치라고 할 수 있는 음성 판정을 받고도 1975년 2월 간경화로 죽기 전까지 부평구 십정동에 살았다. 그는 잡지나 계몽지에 나병에 대한 잘못된 세상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활동한 사회사업가로서 살았다. 그의 이력을 보면 그가 당당한 풍채에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인재였음을 넉넉히 알게 된다.
한때 한하운 문학관 건립 이야기가 활발하게 논의됐다는 부평역사박물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잘 모른다”는 건조한 답변만 돌아왔다. 더 이상의 논의가 없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없다”고 잘라 말하던 담당 직원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묻어있었다. 한하운을 이용하여 뭔가를 도모하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는 소문과 관련이 있는지, 그의 이력과 문학을 둘러싼 적지 않은 논란과 연관돼 있는지는 짐작할 단서가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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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하운 시인의 묘지 전경 |
필자가 경기도 김포 장릉공원묘지에 있는 그의 묘지를 찾은 것은 늦은 봄이었다. 소박한 묘지 뒤 안내판에는 연보 액자를 중심으로 왼편에는 그의 대표작 「보리피리」, 오른편에는 「전라도 길」 액자가 각각 붙어있었다. ‘시인한하운태영지묘(詩人韓何雲泰永之墓)’라는 비석 뒷면에도 그의 대표작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었다. 뭇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위대한 시인의 파란만장한 일생만큼이나, 불어오는 봄바람이 날씨 때문만도 아니게 을씨년스러웠다.
묘역을 빠져나오는 길에 문득 고은 시인과 한하운 시인의 ‘일대 인연’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 시인은 자신이 중학교 3학년이던 1949년 어느 날 하굣길에 우연히 주워서 읽은 시집 『한하운 시초』(정음사)가 “빛으로 다가왔다.”고 술회하곤 했다. 한 시인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간에 그의 작품이 또 다른 걸출한 시인의 영혼을 송두리째 불 질렀다면, 그것만으로도 실로 위대한 것 아닌가. 한평생 지옥 속을 살면서도 기어이 파랑새를 키워낸 한 사내의 쓸쓸한 흔적들이 못내 아리다.
-글·안 휘(문학의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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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하운 유택에 현시된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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