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 문화의 정수, 탑본’ 아름다운 기록을 만나다

민족·역사 / 안진영 기자 / 2019-10-08 15:01:17
광해군 부터 고종 까지 300년, 조선왕실의 탑본 45점 일반에 첫 공개
▲ 태종대왕 헌릉 신도비 뒷면 탑본. 숙종21년 제작한 것으로 뒷면의 상단 태종헌릉지비(太宗獻陵之碑)’라는 제액(題額)과 건립 내력, 개국공신,·정사공신,·좌명공신,의 명단을 기록했다.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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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의 탑본(탁본)은 문예에 뛰어난 찬자(撰者)가 글을 짓고, 이를 당대의 명필이 쓴 것을 최고의 장인이 돌을 다듬어 글자를 새기고, 이를 탑본하여 아름다운 문양으로 직조된 비단으로 꾸민 조선 왕실문화의 정수이자 조선의 귀중한 기록유산이다.

왕릉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각(碑閣)의 비석(碑石)과 죽은 이의 생애를 기록하여 땅에 묻은 지석(誌石) 탑본이 498점이며, 조선왕실의 창업과 관련한 곳과 국난을 극복한 곳 등 기념비적 장소에 후대 왕들이 글을 짓고 비석을 세워 탑본한 것들도 58점 전해지고 있다. 조선왕실이 주도하여 비석과 지석을 제작할 당시에 이를 탑본해 보관했기 때문에 당대의 글씨와 장황(粧潢) 의 아름다움 그리고 이를 제작한 수준 높은 기술 등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모되거나 왕릉을 옮기면서 옛 비석을 땅에 묻기도 하고, 또는 옛 비석을 깎아 글을 새로 새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장서각의 탑본을 통해 그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지석은 땅에 묻기 때문에 발굴을 하지 않는 이상 원형을 파악할 수 없으나 장서각의 탑본을 통해 그 크기와 글씨의 확인이 가능하다. 

 효종대왕 영릉(寧陵) 청화백자 지석. 조선 현종 14년 영릉을 천봉하면서 청화백자 지석을 시험 삼아 번조한 것이다.천릉할 때 천릉의 내용을 포함한 지문을 새롭게 판석에 새기고 동시에 같은 내용을 청화백자로 구워서 매안하였다  사진=한국학중안연구원


특히 이번 특별전에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효종 영릉을 천릉할 때 함께 묻기 위해 제작한 청화백자 지석 3편이 최초로 공개된다. 왕릉의 지석은 보통 큰 판석으로 만드는데, 제작하고 옮기는 과정에서 많은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효종의 영릉을 여주로 천릉하면서 시험적으로 도자기로 지석을 만들었다. 청화백자 지석 제작 과정 중 시제품 3편을 만들어 왕이 직접 어람하여 왕실에 보관했던 것을 후에 영조가 다시 어람하여 왕릉 지석을 도자기로 만들 것을 지시했다는 기록이 의궤에 나오는데 이와 일치하는 3편의 청화백자 지석 원본 시제품을 이번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전시의 또 하나의 백미는 탑본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준 비단 장황이다. 이번 전시물을 통하여 300년의 조선왕실의 장황 형식을 연대기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복숭아·석류·포도·연꽃·난초 등 아름답고 다양한 문양으로 직조된 비단으로 꾸민 탑본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그림, 글씨, 서화에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족자·병풍·두루마리·책첩 등의 형태로 꾸미는 장황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용어가 그동안 혼용되어 왔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탑본의 장황과 관련된 의궤 등의 문헌을 통해 관련된 용어들을 정리했으며, 오늘날 출처가 분명하지 못한 채 제작된 족자 장황에 전통적인 모범 답안을 제시해 현대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시각화했다.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靖嬪李氏, 1694~1721) 묘비를 제작하기 위하여 영조가 직접 글을 썼다. 표격지는 이때 비문을 정사하여 한 글자씩 오려 방안지에 배열한 것이다. 표격지 내용은 현존하는 비문과 같으나 몇 글자가 빠지거나 바뀐 곳이 있다. 비석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정빈 이씨(靖嬪李氏, 1694~1721)의 묘비를 위하여 영조가 직접 쓴 표격지(標格紙)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한편, 조선왕실의 창업과 관련된 장소에 세워진 기적비(紀蹟碑) 탑본은 북방지역과 관련한 조선왕실의 새로운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이며 대부분 북한의 개성·함경도 지역에 소재하고 있고 이 비석의 탑본은 숙종~고종 대에 이르는 왕실 추숭사업의 결과이다. 특히 북한에 소재하는 비석의 경우 현재 비석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문헌의 기록과 장서각의 탑본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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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영 / 문화예술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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