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영백 편집위원(정치학 박사) |
한일관계에 있어서 문재인 정부는 5년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더 나은 합의를 얻어내려 애쓰지도 않았고 그저 반일 정서에 올라타 정치적 이익만 챙겼다. 한일관계 파탄에 따른 부담은 온전히 다음 정권의 몫이 되어버렸다. 문재인 정권이 위안부 합의, 징용 피해자 배상 등 한일 정부 간의 합의와 조약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일본 정부나 일본 국민들은 한국에 대해 엄청난 불신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번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의 기대를 넘어선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일본은 이제 한국 정부를 믿을 수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일본이 어느 정도의 수위로 사죄하고 반성해야 할지에 대한 부담감도 생겼다. 윤 대통령의 결정에 대한 일본 주류의 반응은 윤 대통령이 정치적 부담을 안고 내린 결정에 일본이 화답해야 하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본 피고 기업은 어떤 타이밍에서든 자발적으로 선의의 증표라는 것을 반드시 내놓을 것이라고 했다.
![]() |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수상이 정상 회담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한일관계의 역사적 퇴행은 안 돼
외교는 현실인데 그것을 펴는 두 나라가 목표의 최대치만 강조하면 외교는 분쟁 해결의 수단의 기능을 상실한다. 한 나라의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는 다른 상대에게는 가장 불만족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가 약간씩 불만을 갖는 것이 외교다. 5천만 한국 국민과 1억 2천5백만 일본 국민이 모두 박수를 칠 해법은 없다. 양국 국민이 ‘이 정도면 됐다’ 하는 선을 찾아가는 것이 외교다.
야당과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야 협상력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야당이 소위 진보라면 한일관계의 역사를 뒤로 후퇴시켜서는 안 된다.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에서 보여준 한일관계의 역사를 보자. 1998년 10월 8일 도쿄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오부치 총리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 선언’에 합의했다. 당시 일본 국민들과 정치인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일제 치하 우리가 받은 고통을 얘기하면서 일본 국민도 고통을 받았다고 했다. 일본과의 비참한 역사는 채 50년도 되지 않는데 반해 1500년의 교류와 역사의 무게를 생각하자고도 했다. 이에 오부치 총리는 식민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엄청난 손해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한다고 화답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문화 개방을 결심했다. 일본에서 오히려 ‘겨울연가’ 열풍이 일어났고 그것이 한류의 출발점이 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던 2004년 2월에는 서울 장충체육관과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일본의 국기(國技)인 스모 경기가 열렸다. 일본 문화의 상징으로서 일본 국민들의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무술을 넘어선 문화인 스모대회가 해외에서 개최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스모 한국 공연은 2002년 김대중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한일 월드컵 개최 성과를 이어가고 양국 교류의 활성화를 위해 만든 ‘한일 공동 미래 프로젝트’ 사업으로 추진된 제1호 안건이었다.
일본도 국내 정치가 있고 자국민의 여론이 있다. 배타적 경제수역 등 한국과 일본이 가까이 있으므로 해서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갈등도 있다. 거기다 과거사 문제는 우리의 냉철함을 무디게 하는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문제이고 국제정치와 냉엄한 현실적 이해득실 앞에서는 냉철해야 살아남는다. 얼마 전 끝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일본이 우승했고 한국은 예선 탈락했다. 그것도 일본에게 대패를 당하면서. 한국 선수들의 기량은 과거처럼 무조건 일본을 꺾어야만 한다는 당위와 의욕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는 수준이었다.
야당과 국민적 비판을 무릅쓴 전략적 선택
윤 대통령은 강제징용해법에 있어서 높아진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맞게 대승적 차원에서 선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도 한국은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하고 일본은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것이 그의 인식이다. 한국의 국격에 맞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량(GDP)에서 곧 우리가 일본을 앞지를 것이라는 전망 속에 현재 한국은 3만 5천 불이고 일본은 3만 9천 불 정도이다.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강국이 된 지금, 다른 나라에 대한 굴욕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을뿐더러 국격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행위다.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는 우리는 일본을 당당하고 자신 있게 대해야 한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연일 무력 시위를 하고 중국 시진핑은 사상 첫 3연임을 통해 팽창주의를 노골화하는 가운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북·중·러가 서로 밀착하며 새로운 냉전의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에 한미일 공조를 통한 북한 대응, 중국 견제와 인도 태평양 지역의 신안보질서 구축이 시급해졌다. 징용문제에 발목 잡혀 한일관계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윤 대통령의 결단은 그래서 전략적이다.
첫째, 한국이 마주한 경제 안보 복합 위기를 돌파하려면 과거에만 얽매일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의 도발에 대응해야 하는 한미일 협력 무대에서 계속해서 일본과 충돌하고 갈등을 빚는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국익을 저해하는 일이다. 한일 간 전략적 대화가 궤도에 오르면 중국의 군사 확장에 대한 외교적 억지력은 커질 것이고, 같은 목소리를 내는 한일에 대해 중국은 무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일 간의 전략적인 협의는 동북아 안전보장의 핵심적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둘째, 한일정상회담만 있는 게 아니라 4월 한미정상회담, 5월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등 외교무대가 줄줄이 이어진다. 윤석열 정부는 이를 통해 한미일 안보협력체제를 공고화하고 더 나아가 향후 글로벌 중추 국가 실현을 위해 한일의 지역 및 글로벌 차원의 협력 기반을 마련하려고 한다. 한국의 결단으로 협상력이 커졌다. 다음 달 방미에서 우리 정부는 한미일 공조와 관련해서 미국에 강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미래 세대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역사적 결단
윤 대통령의 한일정상회담을 왜 우리 스스로 폄훼하나. 길거리에 쓰여있는 현수막의 글귀도 야당의 논평도 한결같이 ‘거창하고’ 금방이라도 나라가 결딴이라도 날 것 같은 표현이다. 글이나 말에 절제가 없다. 하고 싶은 의도는 글과 말의 절제에서 빛난다. ‘굴종 외교’ ‘삼전도 굴욕’ ‘이완용의 부활’ 등 차마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아픈 과거의 기억과 단어들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참을 수 없는 역사 인식의 천박함과 가벼움이다. 한일 문제는 여야의 정쟁으로 갈음할 수 없는 우리만의 고유의 역사이고 영역이다.
한일관계는 누가 뭐래도 이제 전환의 시기에 왔다. 감정적으로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이다. 윤 대통령은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편한 길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반일 감정을 국내 정치에 활용하지 않음으로써 대통령으로서의 책무를 다했다. 우리가 할 일은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 간의 정상회담이 갖는 의미를 찾고, 그 협력과 상생의 의지를 바탕으로 한 내용들을 장단기적으로 어떻게 풀어가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차분히 따져 보는 일일 것이다.
한일의 자존심 대결은 결코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간의 교훈이다. 서로 협력하여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두 나라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다. 과거의 잘못은 비판적으로 성찰하되 과거의 일로 현재의 국제정세를 오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 미래를 위한 선택에 있어 비겁함으로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정치권이 할 일은 일본의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윤 대통령의 선제적 외교에 힘을 보태는 것이지, 자극적인 언사나 적대적 민족주의로 국내 여론을 선동하며 국격을 깎아낼 일은 아닌 것이다.
출처 : 모닝포커스(http://www.morningfocus.net)
[ⓒ 미디어시시비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