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국설과 임나=가야설을 중심으로-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토론 : 정경희(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본성’ 전시, 우리 역사서 삼국사기 등은 무시하고
허위투성이인 일본서기의 기록들을 옳다고 하고서 인용 전시하고 있다."
"‘임나=가야설’은 가짜투성이인 일본서기의 기록들을 중심으로
고대 야마토왜(倭)가 가야를 점령하고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 전시회의 임나일본부설
-분국설과 임나=가야설을 중심으로-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목차> 1. 들어가는 글 2. 일본·남한학계의 ‘임나=가야설’과 북한학계의 ‘분국설’ 3. 왜 사료 이름을 축약해 표기했는가? 4. 사라진 가야 건국 사료들 5. 연표에서 사라진 가야의 다섯 임금 6. 고구려, 백제, 신라는 야마토왜의 신공왕후에게 항복했는가? 7. 서기 366년과 369년의 《일본서기》 기사가 사실? 8. 일본 내에서도 나오는 신공왕후 창작설 9. 나가는 글 |
1. 들어가는 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야본성-칼과 현’이라는 이름의 가야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전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전시의 설명문과 연표, 지도 등은 일본극우파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선전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국고로 운영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본 극우파가 주창하는 정한론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을 추종하는 행태는 이 문제에 대해 관점을 갖고 있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무엇인가? 그 내용은 간단하지만 그 함의는 작지 않다. 일본 극우파가 주창하는 황국사관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정한론 차원에서 고대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면서 ‘임나=가야설’을 주장했다. 369년부터 562년까지 가야는 곧 임나였는데, 그 유일한 근거는 《일본서기》뿐이었다. 이 내용이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자 《삼국사기》는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만들었는데, 지금 가야전시는 이 논리에 따라서 《삼국사기》를 부인하고 《일본서기》를 따르는 해설, 연표, 지도로 채워져 있다.
그간 남한강단사학계는 역사는 자신들이 한다는 논리로 일반 국민들은 물론 대학 사학과 이외의 정치학·지리학과 등 여러 학문분야를 모두 배제시키고 역사해석을 독점했다. 그리고 일반국민들 다수를 역사해석에서 일체 배제한 후 자신들이 생각하는 역사학만 생산, 유통시켰다. 이들은 일반 국민들은 물론 대다수 정치가·고위관료들을 자국사에 무지하게 만드는 ‘역사의 사맹화(史盲化)’ 작업을 추진했는데, 그 결과 지금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자국사에 무지한 정치가·고위관료들이 대다수인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
이는 해방 후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제거되고, 유물론을 추종하던 사회경제사학자들이 월북하면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역사학계를 독점한 결과 발생한 현상이었다. 광복된 나라에서 그 나라를 식민지배하던 침략자들이 만든 역사관이 계속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일제 식민사관을 옹호하는 여러 카르텔의 힘이었다. 가야전시회에 대해서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의 논조가 흡사한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카르텔은 한국사회에서 유일하게 좌·우도, 보수·진보도 없는 유일한 것으로서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전은 바로 이 카르텔이 일본 극우파의 임나일본부설이 어디까지 점령했는지를 말해주는 물증이다.
2. 일본·남한학계의 ‘임나=가야설’과 북한학계의 ‘분국설’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은 ‘임나=가야설’인데, 이 논리가 허황된 역사관이라는 점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임나=가야’의 영역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메이지시대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만들어 퍼뜨렸다는 사실에서도 순수 역사학이 아니라 제국주의 선전논리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른바 ‘임나=가야설’의 진원지는 정한론을 주창한 일본군 참모본부였던 것이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1882년 《임나고고(任那稿考)》 및 《임나명고(任那名稿)》 등 두 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또한 일찍이 임나=가라(가야)설을 주창한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는 〈가라고(加羅考)〉에서 임나가 곧 가라(가야)라면서 《일본서기》 〈신공황후(神功皇后)기〉를 근거로 신공황후가 신라를 비롯한 삼한과 가라를 정벌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임나=가라’를 지금의 김해 일대로 비정했다. 만주철도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또한 임나일본부 관련기사가 나오지 않는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하면서 ‘임나=가라’의 강역을 나카 미치요처럼 김해 일대라고 주장했다. 그 후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김해를 남가라라고 한정하면서 임나일본부, 즉 임나를 다스리는 치소(治所)는 경북 고령에 있었다는 논리로 임나 강역을 경남에서 경북까지 확대시켰다. 그 후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일제 패전 후 쓴 ????임나흥망사(1949)????에서 임나의 강역을 경상남북도에서 충청도·전라도까지 확대시켰다. 지금 한국의 고대사학자들이 임나의 중심을 고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마니시 류의 학설을 추종하는 것이고, 가야(임나)가 충청·전라도까지 걸쳐져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스에마쓰 야스카즈의 학설을 추종하는 것이다. 다만 임나라고 직접 지칭하면 국민들이 그 속셈을 알아차릴 것 같으니까 ‘임나=가야’라는 전제를 깔고 “가야 강역이 충청·전라도까지 확장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스에마쓰는 ‘임나=가야’라는 전제 위에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여러 지명들을 한반도 남부에 끼워 맞췄다. 스에마쓰는 패전 후 일본인 학자들 사이에서 역사학이 제국주의 침략도구로 악용되었다는 반성이 일고 있을 때 더욱 퇴행된 임나일본부설을 내놓은 것이다. 패전으로 실의에 빠진 일본국민들에게 ‘일본제국은 다시 한국을 점령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제시한 것이다.
이런 지명비정에 대해서 와세다대 출신의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는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에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고전적인 정의를 내린 사람은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스에마쯔 야스까즈(末松保和)였다”고 높이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명 비정은 스에마쯔의 설을 따랐다”라고 말했다. 김현구 교수에게 ‘특별한 경우’는 없었으니 스에마쓰설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김현구뿐만 아니라 김태식 홍익대 교수는 “그 후 말송보화(末松保和:스에마쓰 야스카즈)는 기존의 지명 고증을 비롯한 문헌고증 성과에 의존하면서 한국·중국·일본 등의 관계사료를 시대순에 따라 종합함으로써 고대 한일간 대외관계사의 틀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최초로 학문적 체계를 갖춘 이른바 「남한경영론(南韓經營論)」을 완성시켰”다고 극찬했다. 스에마쓰는 고대 야마토왜가 경상남북도 및 충청·전라도 일부를 차지했다면서 이를 고대 야마토왜의 남조선경영론(南朝鮮經營論)이라고 명명했는데, ‘남조선’은 북한에서 사용하는 용어라면서 ‘남한’으로 바꿔 남한경영론이라고 그대로 추종한 것이다.
이에 대한 북한 학계의 견해는 완전히 다르다. 북한 학계는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가야계가 일본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소국, 분국, 식민지라는 분국설을 주창하고 있다. 북한의 김석형은 1963년에 《일본서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등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일본열도에 진출해서 세운 분국(分國)이라는 분국설을 주장해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임나일본부설을 기초에서 무너뜨렸다. 김석형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의 지명을 한반도 내에서 찾는 스에마쓰 등의 지명비정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했다.
“이와 같은 일본학자들의 비정은 억지를 면치 못한다. 당시의 야마또 군대가 경상, 전라 두 도를 무인지경으로 돌아쳤다고 전제하고 그 일대 고지명에 비슷한 글자가 여러 글자 중에서 하나라도 있으면 주어 맞춘 것에 불과하다”
스에마쓰의 지명비정을 ‘고전’ ‘학문적 체계’라고 추앙하는 남한 강단사학자들과 이를 “억지를 면치 못한다”라면서 ‘허황하다’고 비판하는 김석형 중에서 무엇이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북한은 1963년 일본학계에 큰 충격을 중 김석형의 ‘분국설’에 이어 재일교포 출신 학자 조희승이 등장해 광범위한 문헌 고증과 유적·유물고증을 통해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가야계가 일본 열도에 진출해 세운 분국이며, 일본 열도 내 임나의 위치는 오까야마(岡山)라고 특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실로 이 분야에 대한 남북한 학계의 차이는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일 정도로 큰 차이가 난다.
그러나 남한은 아직도 나가 미치요·쓰다 소키치·이마니시 류·스에마쓰 야스카즈같은 식민사학자들의 망령이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나라다. 북한은 1961년에 ‘한사군=한반도설’을 폐기시키고, ‘한사군=요동설’을 확립한데 이어 1963년에 ‘임나=가야설’을 폐기시키고 임나는 가야가 일본열도에 세운 분국이라는 분국설을 확립시켰는데, 남한은 그로부터 50여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일본 제국주의가 퍼뜨린 ‘한사군=요동설’과 ‘임나=가야설’이 정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다. 이런 황국사관이 아직도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사관을 옹호하는 남한 사회의 여러 카르텔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언론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전시(가야본성)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가야가 서기 1세기에 건국했다는 내용은 그대로 전시하되 고대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369년 이후는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시회 첫머리에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에서 가야가 서기 1세기에 건국했다는 고고학 사료들인 파사석탑과 거북무늬 모양의 흙방울토기를 전시한데 대해서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왜 신화를 사실인 것처럼 전시했느냐는 비판이었다. 두 신문은 가야는 서기 1세기가 아니라 3세기에 건국했다는 일본인 식민사학자들과 그 한국인 추종학자들의 논리를 근거로 파사석탑과 거북무늬 모양의 흙방울토기 전시를 비판한 것이었다. 한국사회에서 드문 조선과 한겨레의 좌우합작 공세를 견디지 못한 국립중앙박물관은 거북무늬 흙방울토기는 치워버리고, 파사석탑에는 ‘신화’라는 딱지를 붙여놓았다. 그 결과 가야전시(가야본성)은 입구부터 출구까지 일본 극우파 역사관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삼국유사》 파사석탑 조는 서기 48년 허황후가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파사석탑을 가져왔다고 쓰고 있는데 이 사실은 연표에서 사라졌다. 김수로왕의 장남은 김해 김씨의 시조이고, 차남은 허황후의 성씨를 딴 김해 허씨의 시조이다. 그런데 1세기의 가야건국이 부인되면서 700만 가락종친들은 시조를 잃게 되었다. 졸지에 아버지, 어머니도 없는 사생아로 전락한 셈이다.
3. 왜 사료 이름을 축약해 표기했는가?
국립중앙박물관의 연표의 근거로 사용한 사료 이름을 명기하는 방식을 보자. 모두 여섯 사료의 이름을 적어놓고 있다. 등장한 순서부터 거명하면 ‘사기’, ‘승람’, ‘유사’, ‘서기’, ‘릉비’, ‘남제서’다. 이 전시회는 학자들끼리의 학술발표회가 아니라 일반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기획전시다. 역사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는 관람객들도 그 내용을 쉽게 알 수 있게 배려해야 했다. 그러나 ‘사기’, ‘승람’, ‘유사’, ‘서기’, ‘릉비’, ‘남제서’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관람객이 얼마나 될까?
왜 이렇게 모호하게 표기했을까? 바로 ‘서기’ 때문이다. 서기는 《일본서기》를 뜻하는데, 《일본서기》라고 표기할 경우 일반 관람객들이 왜 《일본서기》를 가야사 연표의 사료적 근거로 써 놓았는지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속이기 위해서 ‘서기’라고 축약해서 쓴 것이다. 《일본서기》만 축약해서 쓸 수는 없기 때문에 나머지 사료들도 모두 축약한 것인데, 이런 방식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과 그 한국인 제자들이 즐겨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위의 사료는 순서대로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삼국유사》, 《일본서기》, 《광개토태왕릉비》, 《남제서》란 뜻이다. 그 사용빈도를 살펴보면 《삼국사기》가 스물한 번, 《삼국유사》가 일곱 번, 《동국여지승람》이 두 번, 《일본서기》가 여섯 번, 《광개토태왕릉비》가 한 번, 《남제서》가 한 번이다. 특기할 것은 《일본서기》는 369년에 처음 등장해서 562년까지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게다가 《삼국사기》는 중요한 내용은 삭제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내용들은 게시한 반면 《일본서기》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 근거인 369년 조를 비롯해서 일본 극우파들이 주장하는 주요 내용들이 그대로 전시되고 있다. 이 전시회는 《일본서기》를 선전하기 위해서 기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4. 사라진 가야 건국 사료들
연표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42년 수로왕 가야 건국(유사), 이진아시왕 가라국 건국(승람)’이란 부분이다.
‘42년 수로왕 가야 건국(유사)’이란 설명은 이 내용이 《삼국유사》에만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준다. 실제로 대다수 국민들은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금관 가야국을 건국했다는 사실이 《삼국유사》에만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서기 42년 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했다는 기사는 《삼국유사》보다 150여년 전에 편찬된 《삼국사기(1145)》 에 이미 나온다.
“(김유신의) 12세 조상 김수로는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후한 건무 18년 임인(서기 42)에 귀봉(龜峯)에 올라 가락9촌을 바라보고 마침내 그 땅에 나라를 열고 국호를 가야라고 했다가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상)”
김부식은 《구삼국사(舊三國史)》를 비롯해 그때까지 전해지던 여러 사서를 근거로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삼국유사》보다 150여년 전에 편찬된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서기 42년 가야 건국기사가 분명히 기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삭제하고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것처럼 사료를 호도한 것이다.
‘이진아시왕 가라국 건국(승람)’이란 연표는 더 심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라는 대가야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승람’은 성종 12년(1481)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을 뜻한다. 이진아시왕이 가라를 건국했다는 기사가 마치 조선 성종 때 처음 나오는 것처럼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도 일찍이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 고령군’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고령군은 대가야국이다.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혹은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에 이르기까지, 무릇 16세 520년이었다. 진흥대왕이 침략해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으로 삼았다(《삼국사기》 〈지리지〉 신라 고령군)”
《동국여지승람》의 기사는 바로 《삼국사기》의 이 기사를 근거로 쓴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23년(562)조의 대가야 멸망기사와 함께 고찰하면 가야는 16세 520년 동안, 즉 서기 42년~562년까지 존속한 왕조다. 따라서 당연히 《삼국사기》를 인용해 이진아시왕의 대가야 건국기사를 써야 하는데, 한참 후대의 《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한 것이다. 이 내용은 《고려사》 〈지리지〉 ‘고령군(高靈郡)’ 조에도 나온다.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인데,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혹은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에 이르기까지, 무릇 16세 520년까지 이르렀다. 신라 진흥왕이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으로 삼았다(《고려사》 〈지리지〉 고령군)”
《고려사》는 세종 31년(1449)부터 문종 1년(1451)까지 편찬한 고려의 정사다. 뒷 왕조가 앞 왕조의 역사서를 편찬하는 동양 유학사회의 전통에 따라 편찬한 정사로서 고려가 남긴 여러 사료를 근거로 편찬했다. 뿐만 아니라 《세종실록》 〈지리지〉 고령현 조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삼국사기》·《고려사》·《세종실록》이란 세 왕조의 정사에 모두 대가야 이진아시왕의 건국 기사가 나오는데, 이런 정사들을 모두 배제하고 가장 후대에 편찬된 조선의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을, 그것도 ‘승람’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제시한 것이다.
더구나 가야본성의 연표는 ‘이진아시왕 가라국 건국(승람)’이라고 해서 ‘대가야국’이 아니라 ‘가라국’이라고 적고 있다. 과연 《동국여지승람》은 ‘가야국’이 아니라 ‘가라국’이라고 적고 있을까? 《동국여지승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뜻하는데, 그 〈경상도〉 ‘고령현’ 조를 살펴보자.
“본래 대가야국이다. 시조 이진아시왕〔내진주지라고도 한다〕부터 도설지왕까지 대략 16대 5백20년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고령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분명히 ‘대가야국’이라고 나오는데, ‘가야본성’ 연표는 멋대로 ‘가라국’이라고 바꾸었다. 왜 그랬을까? 《일본서기》에 대입해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일본서기》에 가야가 아니라 가라라고 나오므로 그를 따른 것이다. 한겨레 신문 기자 노형석은 가야전시에 왜 파사석탑과 거북무늬 물방울 토기를 전시했느냐고 비판한 「검증 안된 유물까지 ‘묻지마 전시’…관객 우롱한 가야전」이란 기사에서 “‘가야’라는 말은 고려 초에야 등장했고, 가야 시대 사람들은 이런 국호를 전혀 알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일본서기〉〈삼국지위지동이전〉’등에는 ‘임나’ ‘가락’ ‘가라’ ‘안라’같은 소국들이 나온다면서 “이 소국 이름들이 바로 당대 가야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불렀던 말이다”라고 보도했다.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면 학자고 기자고 거짓말을 예사로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어느 구절에 ‘임나’ ‘가락’ ‘가라’ ‘안라’같은 소국들의 이름이 나오는가? 《일본서기》를 유일한 근거로 ‘가야’라는 국명이 없었다라고 주장하려다가 《일본서기》만 쓰면 너무 속이 뻔히 드러나니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이런 국명들이 나오는 것처럼 독자들을 속인 것이다.
‘48년 허황옥, 가락국 도착. 수로왕과 혼인(유사)’라는 연표도 마찬가지다. 어디에서 왔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라고 나오고, 같은 책의 〈탑상 제4 금관성파사석탑〉조에도 “시조 수로왕의 비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서기 48)에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야유타국이 어디인지는 더 살펴봐야 할 과제지만 사료에 명기되어 있는 아유타국을 게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야가 3세기에 건국되었다는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황국사관을 추종하다보니 허황후의 아유타국 도래 기사를 믿지 못할 신화로 격하시키기 위해서 출자(出自)를 생략한 것이다.
5. 연표에서 사라진 가야의 다섯 임금
이 전시회의 문제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야본성’ 연표에는 가야왕의 계보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 연표의 가야왕계 |
42년 수로왕 가야 건국(유사) 48년 허황옥,가락국 도착,수로왕과 혼인(유사) 199년 3월 가락국 수로왕 158세로 사망, 세조 거등왕 즉위(유사) 253년 가락국 거등왕 사망,마품왕 즉위(유사) 291년 가락국 마품왕 사망,거질미왕 즉위(유사) 346년 가락국 거질미왕 사망,이시품왕 즉위(유사) |
이는 모두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왕계’에서 따온 것이다. 연표는 ‘① 수로왕(재위 42~199)/② 거등왕(재위 199-253)/③ 마품왕(재위 253~291)/④ 거질미왕(재위 291~346)/⑤ 이시품왕(재위 346~4O7)’까지 다섯 왕만 기록하고 있다. 굳이 ‘수로왕 158세에 사망’이라고 명기한 이유 역시 가야 건국기사를 허구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옛 사료에는 수많은 함의가 담겨있다. 정통성에 문제가 되는 국왕들은 삭제하고 그 재위연대를 다른 국왕에게 덧붙이기도 하는 등 여러 표기방식들이 있다. 김수로왕의 생몰연대 및 재위기간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가야전시의 가야왕계는 《삼국유사》 기록의 절반만 써 놓았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왕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왕계’ |
① 수로왕(재위 42~199) ② 거등왕(재위 199-253) ③ 마품왕(재위 253~291) ④ 거질미왕(재위 291~346) ⑤ 이시품왕(재위 346~4O7) ......‘가야본성’ 전시에서 삭제된 왕들................ ⑥ 좌지왕(재위 4O7~421) ⑦ 취희왕(재위 421~451) ⑧ 질지왕(재위 451~491) ⑨ 겸지왕(재위 491~521) ⑩ 구형왕(재위 521~532) |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왕계’는 시조 수로왕부터 마지막 구형왕까지 열 임금의 이름과 재위기간까지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본성’ 전시회는 ‘⑥대 좌지왕, ⑦대 취희왕, ⑧대 질지왕 ⑨대 겸지왕 ⑩대 구형왕’까지 다섯 임금을 누락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야본성’ 전시회에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있으면 모두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을 추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보면 정확하다. 이 역시 369년에 고대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했다는 황국사관을 추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금관가야의 5대 이시품왕 재위 연대인 346년~4O7년 사이에 369년이 있다. 《일본서기》에서 가락국을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주장하는 해로서 《일본서기》에 다르면 369년에 가야는 멸망했으므로 이시품왕 이후의 왕계는 생략한 것이다. 《일본서기》의 허구에 가득 찬 내용을 신봉하는 것이다.
6. 고구려, 백제, 신라는 야마토왜의 신공왕후에게 항복했는가?
국립중앙박물관 ‘가야본성’의 ‘가야와 왜’에 대한 설명을 보자.
“가야와 왜의 교류는 지리적인 이유로 일찍부터 있었지만, 4세기 이후 백제가 급부상하면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왜와의 교류를 주도하던 가락국은 366년 왜가 백제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자 입지가 좁아졌고…”
이 설명문의 근거는 어느 사료일까?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이런 내용이 단 한자도 나오지 않는다. 모두 일본 극우파들의 경전인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서기 366년은 인덕(仁德) 54년이다. 그런데 ‘가야본성’에서 말하는 366년은 신공 46년이다. 《일본서기》의 신공(神功) 46년을 서기(西紀)로 환산하면 246년인데, 일본극우파 학자들은 두 갑자(甲子) 120년을 더해서 366년이라고 우긴다. 《삼국사기》의 서기 246년은 백제 고이왕 13년이고, 서기 366년은 근초고왕 21년이다. 어떤 학자가 “《삼국사기》의 고이왕 13년(246)에 벌어진 사건은 120년을 더해서 근초고왕 21년에 벌어진 사건으로 봐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그런데 《일본서기》를 경전으로 떠받드는 일본 극우파들과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일본서기》에 246년으로 기록된 사건은 366년의 일이라고 우기는데 가야본성 전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런 허황된 논리가 통용된다.
공주 무령왕릉 지석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무령왕이 사망한 해와 달까지 정확하게 기록한 《삼국사기》는 믿을 수 없다면서 연대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는 모두 사실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황국사관의 근거는 《일본서기》 신공(神功:진구) 조이다. 신공 왕후가 신라를 정벌했고, 고구려·백제왕까지 모두 신공 왕후에게 항복하면서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는 이른바 삼한정벌 기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뒤이어 신공이 신라를 공격해 가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는 일왕 중애(仲哀)가 재위 9년(200)에 사망하고 이듬해부터 그 부인 신공이 정사를 대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애 9년 10월 신공왕후는 신라정벌에 나섰다. 《일본서기》는 야마토왜군이 상륙했다는 보고를 들은 신라왕의 거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신라왕은)이에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으니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이라 이른다. 또한 성왕(聖王)이 있는데, 천황이라고 이른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들어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 흰 기를 들어서 스스로 항복했다(《일본서기》 신공(神功)기 중애 9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200년은 신라 내해 이사금 5년이다. 여기에 두 갑자 120년을 더한 320년은 신라 흘해 이사금 11년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내해 이사금 5년(200)이든 흘해 이사금 11년(320)이든 야마토왜가 신라를 침범한 사실은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그 당시 일본 열도에는 국가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같은 해 고구려, 백제도 야마토왜에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고구려, 백제 두 나라 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日本國)에 항복했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를 엿보고는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영외에 와서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금후로 길이 서번(西蕃)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일본서기》 신공(神功)기 중애 9년)」
《일본서기》 〈신공기〉는 일본(日本), 일본국(日本國)이란 국호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670) 12월조는 “왜국이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해가 뜨는 곳과 가깝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670년에 일본(日本)이라는 국호가 생겼다고 말하고 있는데, 《일본서기》는 그 470년 전인 서기 200년에 일본이라는 국호가 이미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두 갑자 120년을 더해도 320년에도 일본이란 국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 왜(倭)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주석을 단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는 〈제순(帝舜) 본기〉와 〈하(夏) 본기〉 주석에서 “또 왜국을 무황후(武皇后)가 이름을 고쳐서 일본국이라고 했다”고 거듭 말하고 있다. 측천무후 무조(武曌)는 664년부터 당나라를 섭정하다가 690년에는 당나라를 주(周)나라로 고치고 705년까지 황제로 직접 통치했다.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국호 일본의 유래는 무후의 섭정기간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이 무렵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서기 200년이든 서기 320년이든 야마토왜의 신공(神功)왕후가 신라, 고구려, 백제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일본서기》 기사는 사실이 아니다. 또한 현재는 이 기사를 사실이라고 보는 학자는 일본에서도 찾기 힘들다. 그런데 이 기사는 사실이 아니지만 《일본서기》 〈신공기〉의 나머지 기사는 사실이라는 것이 일본 극우파 및 이들을 추종하는 남한 강단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이다. 근거는? 물론 없다. 자신들이 머릿속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유일한 근거다.
7. 서기 366년과 369년의 《일본서기》 기사가 사실?
《일본서기》 〈신공 46년(246)〉의 기사를 보자. 《삼국사기》는 그 내용이 간결하고 육하원칙에 따라 핵심만 적은 반면 《일본서기》는 내용이 장황하기 때문에 핵심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 핵심은 이런 내용이다.
「(신공 왕후가)사마숙녜(斯摩宿禰)를 탁순국(卓淳國)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탁순국왕이 사신에게 2년 전 백제사람 구저(久氐)·미주류(彌州流)·막고(莫古) 세 사람이 사신으로 와서 동방(東方)에 있는 일본(日本)이라는 귀국(貴國)으로 가는 길을 물으면서 길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는데 탁순국도 동쪽에 귀국이 있는 것은 알지만 길은 모른다고 답했다. 사마숙녜가 종자 이파이(爾波移)와 탁순 사람 과고(過古)를 백제에 보내자 백제 초고왕(肖古王)은 크게 환대하면서 철정(鐵鋌) 40매와 비단 등을 내려주면서 “우리나라에는 귀중한 보물이 많은데 귀국(貴國)에게 바치고 싶어도 길을 몰라서 뜻이 있지만 따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사신에게 부탁해서 공물로 헌납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일본서기》 〈신공 46년 3월 조)」
이 기사는 둘로 되어 있다. 전반부는 백제가 탁순국에 가서 일본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간사였던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탁순국을 대구라고 비정했고,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김현구 등은 이를 그대로 따랐다. 창원으로 보는 남한 학자들도 있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그때 존재하지 않은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해양 제국 백제가 일본 열도로 가는 길을 몰라서 내륙인 대구나 창원까지 가서 일본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는 허황된 내용을 일본과 남한의 역사학자들만 사실이라고 신봉한다.
이 기사의 후반부는 야마토 사신 사마숙녜가 종자들을 백제로 보내면서 발생한 내용들을 기록한 것이다. 이파이 등이 백제 초고왕이 바친 공물을 가지고 돌아와 지마숙녜(志摩宿禰)에게 고했다는 것이다. 사마숙녜가 왜 갑자기 지마숙녜로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백제 초고왕이 야마토왜에게 철정 40매와 비단 등을 공물로 바치면서 ‘공물로 헌납하고 싶다’고 한 내용을 가야전시에서 “왜와의 교류를 주도하던 가락국은 366년 왜가 백제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자 입지가 좁아졌고…”라고 써놓았다. 공물을 헌납하는 것은 신하의 나라가 황제의 나라에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 초고왕이 야마토왜에 공물을 바쳤으므로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 이듬해에 이런 기사가 뒤따른다.
“(신공 47년) 여름 4월, 백제왕이 구저, 미주류, 막고를 보내 조공을 바쳤다”(《일본서기》 〈신공 47년 여름 4월〉)」
일본 극우파들과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서기 247년조의 이 기사에 120년 더해 서기 367년 기사라고 우긴다. 《일본서기》의 백제 초고왕이 《삼국사기》의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재위 346~375)이라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조공에 한이 맺힌 책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해 신라도 공물을 바쳤는데, 야마토왜에서 두 나라의 공물을 조사하니 신라의 공물이 백제의 공물보다 우수했다. 조사해보니 신라에서 백제의 공물을 빼앗아 신라의 공물인 것처럼 바꾸어 바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웅장언(千熊長彥)을 사신으로 보내 신라를 꾸짖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가 말하는 야마토왜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상국이다. 367년은 신라 내물 이사금 12년이고, 백제 근초고왕 22년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 이사금 12년 조에는 아무 기사가 없고, 〈백제본기〉 근초고왕 22년 조에도 아무 기사가 없다. 대신 〈백제본기〉 근초고왕은 한 해 전(366)에 신라에 사신을 보냈고, 〈신라본기〉 내물 이사금 조도 같은 해 백제인이 내빙했다고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신라와 백제가 서로 교류한 이런 내용은 일본 극우파들과 남한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야마토왜는 백제·신라의 공물을 조사하고 꾸짖는 황제국이라는 것이다. 이런 기사 뒤에 드디어 369년 야마토왜가 가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를 가야전시 연표에 버젓이 기록했다.
가야본성의 연표는 “369년 가야 7국(비사벌,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백제·왜 연합의 공격을 받음(서기)”라고 써 놓았다. 이 연표의 369년 조가 일본 극우파에서 신봉하는 황국사관의 핵심 기사다. 《일본서기》 〈신공 49년(249)〉조의 기사인데, 이 기사를 근거로 일본 극우파들은 고대 야마토왜가 가야에 임나를 설치했다고 우긴다. 먼저 이 기사의 내용을 검토해보자. 《일본서기》 신공 49년은 서기 249년인데, 일본과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120년 끌어 올려서 369년의 일이라고 우긴다.
「49년 봄 3월에 (신공왕후가)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카가와케(鹿我別)를 장군으로 삼고, 백제 사신 구저(九氐) 등과 함께 군사를 다스려 건너가게 해서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군사 숫자가 적기 때문에 신라를 공격해서 깨트릴 수 없습니다. 다시 사와쿠코로(沙白蓋盧)를 보내 군사증원을 요청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신공황후는)곧 모쿠라콘지(木羅斤資:목라근자)와 사사나코(沙沙奴跪)〔이 두 사람은 성을 알 수 없다. 다만 모쿠라콘지는 백제의 장군이다〕에게 정예로운 군사를 이끌고 사와쿠코로와 함께 파견해 탁순에 모두 모여 신라를 공격해 깨트리고, 이로 인해 비자발(比自㶱)・남가라(南加羅)・녹국(㖨國:탁국?)・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 7국을 평정했다. 군사를 서쪽으로 돌려서 고해진(古爰津)에 이르러 남쪽 오랑캐〔南蠻〕인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도륙해서 백제에게 주었다」
이 기사의 요지는 신공왕후 섭정 49년에 신공왕후가 아라타와케(荒田別), 모쿠라콘지(木羅斤資) 등의 장수와 군사들을 보내 신라를 정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를 정벌했는데, 정작 점령한 곳은 신라가 아니라 비자발 등 7국이라는 희한한 내용이다. 이것이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신공왕후가 신라 정벌한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신라가 백제의 조공품을 빼앗아 바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유일했던 전쟁 사유다. 신공왕후는 천신(天神)에게 기도하고 2년 후인 49년(249) 신라 정벌에 나섰다는 것이 《일본서기》의 내용이다. 신라를 공격했는데, 엉뚱하게 점령한 곳은 가야라는 것이고, 나아가 남쪽 오랑캐인 침미다례를 도륙해서 백제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 다음에 이런 내용이 이어진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도 군사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 4읍이 자연히 항복했다. 이때 백제왕 부자가 아라카와케, 모쿠라콘지 등과 의류촌(意流村)〔지금은 주류수기(州流須祇)라고 한다〕에서 서로 봤는데, (초고왕은) 기쁘고 감동해서 예를 두텁게 해서 보냈다. 오직 치쿠마나가히코(千熊長彥)와 백제왕은 백제국에 가서 벽지산(辟支山)에 올라 맹약했다. 다시 고사산(古沙山)에 올라 반석 위에 앉았는데, 백제왕이 맹세하기를 “풀을 펼쳐서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를 취해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반석 위에 자리 잡아서 맹세함으로써 길고도 멀도록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지금 이래 천추만세(千秋萬歲) 동안 끊어지지 않고 다함이 없이 항상 서쪽 울타리(西蕃:서쪽 오랑캐)로 칭하면서 춘추로 조공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치쿠마나가히코(千熊長彥)와 함께 도읍 아래 와서 두텁게 예우하고 또한 구저 등을 딸려 (야마토에) 보냈다」
일본과 남한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일본서기》의 초고를 근초고왕이라고 해석한다.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가 벽지산에 올라가 야마토에 영원히 조공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는 내용이다. 《일본서기》 주석에서 목라근자(모쿠라근자)에 대해 ‘백제의 장군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백제 분국의 장수든지 백제에서 야마토왜로 파견한 장수로 해석할 수 있다.
〈신공 49년조〉를 일본 극우파들과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은 서기 369년에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설치했고, 남쪽 침미다례 등을 백제에게 주자 백제 근초고왕이 아들 근구수와 함께 야마토왜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라고 해석한다.
과연 369년에 그런 일이 있었을까? 369년에 《삼국사기》는 어떤 일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4년(369)’조의 기사이다.
“근초고왕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민호(民戶)를 약탈했다. 왕이 태자(근구수)에게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급하게 습격하여 이를 쳐부수고 5천여 명의 목을 베고 전리품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에 한수(漢水) 남쪽에서 왕이 친히 군사를 사열했는데, 기는 모두 황색을 썼다”
《삼국사기》는 369년에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가 고구려의 2만 군사와 격전을 치러 5천 명의 목을 베고 전리품을 장병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수 이남에서 군사를 사열하면서 사용했다는 황색 깃발은 황제의 깃발을 뜻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고국원왕 39년(369)조도 고국원왕이 2만 병력으로 백제를 공격했지만 패했다는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와 《삼국사기》 〈근초고왕 24년〉조가 모두 사실일 수는 없다. 고구려 대군을 꺾고는 황제의 깃발을 휘날리며 군사들을 사열하는 《삼국사기》의 근초고왕과 야마토에서 온 치쿠마나가히코(千熊長彥)에게 영원히 조공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근초고왕이 같은 군주일 수는 없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둘 중의 하나는 거짓이다.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보다 8년 전인 서기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古事記)》 〈신공황후기〉에는 가라 정벌 기사 자체가 없다. 불과 8년 전에 간행한 역사서에는 황국사관의 근거가 되는 이 중요한 기사가 빠져있다. 서로 손발이 맞지 않는 이유는 《일본서기》 기사가 조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남한의 김현구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남부경영의 주요내용은 모두 369년 목라근자의 소위 ‘가야7국 평정’ 내용을 전제로 해서만 그 사실이 성립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8. 일본 내에서도 나오는 신공왕후 창작설
그러나 정작 일본 내에서도 신공왕후 자체가 조작된, 가공의 인물이라는 견해들이 나오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고대사를 전공한 도쿄대학 명예교수 이노우에 미즈사다(井上光貞:1917~1983)는 “4세기의 조선 문제의 초점은 남한의 변한 지역의 확보인데, 《기기(記紀:일본서기·고사기)》에서 말하는 신라는 아직 조연이었다”면서 “따라서 신공 황후의 신라 정벌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현구 교수의 와세다대 지도교수였던 미즈노 유(水野祐:1918~2000)는 고대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극우파 식민사학자지만 일 왕계가 만세일계가 아니라 세 왕조가 서로 교체되었다는 이른바 삼왕조 교체설을 주장한 인물인데, 그 역시 신공왕후는 조작된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대략 “중애(仲哀:주아이)천황의 왕조를 응신(應神:오진)천황이 멸망시켰지만 《기기(記紀)》의 편찬자는 천황의 계보를 만세일계처럼 조작하기 위해서 중애와 응신 사이를 연결할 가상의 여자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신공왕후다”라는 것이다.
역사저술가인 이자와 모토히코(井沢元彦)는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의 계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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