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기쁜 마음(laeto animo)으로 살자.

사상과 철학 / 안재휘 기자 / 2024-12-09 22:40:22
<303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즐거움은 '어떤 상태'라면, 기쁨은 '어떤 행위의 결과'이다.
많이 아는 자의 만족이, 못 배운 사람의 감사에 못 미친다.
만족(滿足), 발목까지 차 올랐을 때 멈추는 것이 바로 '완벽한 행복'이라는 뜻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막 흘러가는 시간들 속에 현기증이 난다. 12월도 벌써 3일이다. 세월의 속도에 멀미약을 먹고 싶은 아침이다. 그래 생각한 것이 우리 성당의 슬로건인 기쁜 마음(laeto animo)으로 살자고 다시 다짐한다. 이건 정신적 태도이다. 작은 기쁨은 사소한 것에 감동하고 기뻐할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인생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실천 속에서는 한 마디 말이라도 다정하게 하고, 주변 사람들부터 염려하며 아껴주고, 바램 없는 편한 미소와 거짓 없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대해준다.

 

기쁨을 잃지 말자. 산다는 것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다. 여기서 ''는 기쁨이고, ''은 즐거움이다. 둘 다 '()'의 감정이지만, '()'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다. 이 쾌감은 고통이나 불편을 동반하지 않은 순수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동물도 느낀다. 그러니 ''보다 ''에 방점을 찍고 하루를 보내자.

 

''는 고통이나 불편이 동반된 쾌감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이 기쁨이라는 감정은 순수한 쾌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불쾌감을 거치고 난 후의 쾌감이다. 그러니까 기쁨의 ''에서 불쾌감은 만족의 지속을 위해 불쾌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자발적 불쾌'라 한다. '자발적 불쾌'가 있을 때 ''는 깊어지고 길어진다. 즐거움은 쉽게 휘발되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되는 이유이다.

 

기쁨과 즐거움에 차이가 있다. 즐거움은 '어떤 상태'라면, 기쁨은 '어떤 행위의 결과'이다. 그러니까 없다가 얻게 되었을 때 오는 것은 기쁨이고, 늘 있는 것은 즐거움인 것이다. 그러니까 기쁨이 즐거움보다 더 강한 감정인 것 같다. 늘 있는 사람은, 없다가 그것을 얻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을 모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40대는 외모의 평준화가, 50대는 지식의 평준화가, 60대는 재산의 평준화가, 70대는 영성, 정신 세계의 평준화가, 80대는 건강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왜 그럴까? 많이 가진 자의 즐거움이 적게 가진 자의 기쁨에 못 미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많이 아는 자의 만족이, 못 배운 사람의 감사에 못 미친다.

 

중요한 것은 만족은 '물의 고임'이라면, 감사는 '물의 흐름'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하면, 마지막 계산은 비슷하고, 모두 닮아가기 때문 같다. 그러니 살다 보면 별 인생 없다. 현재를 즐기는 것이 남을 뿐이다. 만족(滿足)이라는 한자의 뜻을 살펴보면, (滿)가득하다’, ‘차 오르다'라는 뜻이고, ()은 그냥 ''이라는 뜻인데, 어째서 만족에 굳이 발 족()자를 쓸까? 발목까지 차 올랐을 때 멈추는 것이 바로 '완벽한 행복'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만족(滿足)‘이라는 한자를 보면서 행복은 욕심을 최소화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니 발목까지만 따뜻한 물이 차 올라도 온몸이 나른해지고, 발만 시원해도 온몸의 땀구멍으로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일이 떠오른다. 지금껏 종종 목까지 차오르고 머리 끝까지 채워져야 행복할 것이라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말이 나온 김에, 내가 늘 외우는 문장을 공유한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라야 흡족해하는 것이 만족이라면, 자족은 어떠한 형편이든지 긍정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러니까 행복의 비결은 자족(自足)이다. 요즈음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은 끼니를 걱정하는 절대 가난 때문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으로 무엇이나 남처럼 가지려 하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흔히 말하듯 '필요'보다 '욕심'에서 생기는 가난이다. 이럴 때 분수를 알고 자족할 줄 알면 빈곤감이 없어지고 자기에게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처럼 느끼며 살 수 있다.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노동윤리의 몰락에 대한 일화>>를 소개한다. 일찌감치 고기잡이를 다녀온 뒤 선창가에서 졸고 있는 노인 어부에게 도시에서 온 관광객이 이렇게 묻는다. “왜 고기를 더 잡지 않느냐? 더 많이 잡으면 어선도 늘리고, 냉동 창고, 훈제공장을 마련해 큰돈을 벌 텐데요.” 그 질문에 어부는 이렇게 답했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되오?” 관광객은 이 항구에 편히 앉아 햇빛을 즐기고 바다를 보며 꾸벅꾸벅 졸 수도 있다고 답하자 어부는 나는 벌써 그렇게 하고 있어요. 당신이나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로 나를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관광객은 가난한 어부에게서 부러움을 느끼며 그 자리를 떠나갔다. 지금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그것들을 최대한 즐기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다음은 13세기 페르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신비주의 시인인 잘랄루딘 루미가 썼다는 시이다.

 

이 문제 많은 세상을

인내심을 가지고 걸으라.

중요한 보물을 발견하게 되리니.

그대의 집이 작아도, 그 안을 들여다보라.

보이지 않는 세계의 비밀을 찾게 되리니

나는 물었다.

"왜 나에게 이 것 밖에 주지 않은 거죠?"

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 것만이 너를 저것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길 끝에 있는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모든 작가들이 진정한 작가가 되기 전에 미완의 작품을 수없이 완성해야 하고, 모든 새가 우아하게 날 수 있기 전에 어설픈 날개를 파닥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과정을 거치려 하지 않고, 우리는 삶에게 묻는다. "왜 나에게는 이것밖에 주어지지 않은 거야"하고. 그러나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답한다. "이것만이 너를 네가 원하는 것에게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속삭임을 듣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과의 내적인 논쟁에 시간을 허비한다.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자신이 결코 팔을 갖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새의 몸에서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


지금 '절벽 끝"에 몰려 있다고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갑자기 절실하게 만든다. 그 중요한 순간에 생명력이 솟고 우리는 신이 토해내는 숨결이 된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도망칠 곳은 없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하늘을 만들고 자신도 몰랐던 날개가 돋는다. 무엇인가 절실하게 갈구한 모든 순간이 날개였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뒤돌아보는 새는 죽은 새다. 모든 과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날개에 메단 돌과 같아서 지금 이 순간의 여행을 방해한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가는 실이라도 묶인 새는 날지 못한다. 새는 자유를 위해 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 자체가 자유이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한 바람이 데려간다. (류시화 산문집,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서 얻은 생각들이다.

 

잭 길버트의 잘 알려진 시 <변론 취지서>에는 우리는 과감히 기쁨을 추구해야 한다. 쾌락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기쁨 없이는 안 된다/ 이 세상이라는 무자비한 불구덩이에서 고집스럽게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적확한 시인의 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기쁨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기쁨이다. 눈이 녹으면 더러워서, 비가 내리면 단풍이 하수구를 막아서, 봄의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이 모든 계절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삶은 어떤 풍경일까? 한 번뿐인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우리는 고집스레 기쁨을 찾아내야 한다. 기쁜 마음으로!

 

그런 기쁨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좀 버려야 한다. 버린다는 것.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 늘 우리의 서랍이 잘 닫히지 않고, 아울러 마음 또한 붐비고 갈수록 점점 더 비좁아진다. 버림은 고치는 것에 가깝다.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을 고친다는 것은 곧 화를 버리는 일이 아닐까? 동시에 버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잘 골라서 간직하는 것이다. 고르고 또 고르고 또다시 고른 끝에 남은 것만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물건이든 기억이든 사람이든. 버려야 할 것은 고치고 그 끝에 남은 것을 간직하고 가지지 말아야 할 것들에는 애당초 눈을 돌리지 않아야 그 빈자리에 기쁨이 들어선다.

 

 

기쁨/이성부

 

살아갈수록 버릴 것이 많아진다

예전에 잘 간직했던 것들을 버리게 된다

하나씩 둘씩 또는 한꺼번에

버려가는 일이 개운하다

내 마음의 쓰레기도 그때 그때

산에 들어가면 모두 사라진다

버리고 사라지는 것들이 있던 자리에

살며시 들어와 앉은 이 기쁨!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 박한표 교수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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