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로 무쇠를 두드리는 것은 노동 행위일 뿐이지만, 누군가의 머리를 때리는 것은 폭력이고 범죄이다.
-깨달음은 지혜이고, 가치의 판단은 자비(사랑)이다
-세상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만큼만 보여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나은 삶의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열쇠를 손에 넣게 되는 것
-여행의 목적지는 종착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를 마음껏 즐기는 것
-내면이 강하지 못한 사
품격에 필요한 것이 품위(品位)이다. 이 품위를 영어로 하면, Decency[ˈdiːsnsi]이다. 이 말은 '사회에서 선하고 도덕적이며 수용 가능한 행동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공손함, 정직성, 공정성과 같은 자질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기본적인 행동 기준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예의 바르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 등이 있다. 칸트의 윤리학에서 최소한의 품위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선행이다. 토마스 홈스에게 품위란 "행동의 품위로, 타인에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는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어떻게 입을 닦거나 이를 쑤셔야 하는지에 대한 사소한 도덕"이다.
보통 사람들의 품위는 완벽한 무언가가 아니라, 일종의 중용이다. 이는 직관과 결단의 결과로, 과시적인 영웅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품위 있는 삶에는 실패가 포함되어 있게 마련이다. 품위는 대립하지 않고 더불어 생각하는 자세에서 나온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각자의 특성과 역량의 결합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엄격한 심판자가 아닌 결과보다 과정에 더 큰 관심을 갖는 행동학자를 필요로 한다. 이런 스피노자의 윤리학으로 행동학으로 읽은 질 들뢰즈는 우리 모두는 관계와 역량, 변용과 변화의 산물로,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긍정적으로 반응한다고 주장했다. 들뢰즈는 영속성보다 연관성과 반응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신체와 그가 처한 환경이 맺는 관계와 그 둘의 지난한 상호작용을 관찰하면서 일반화의 위험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이런 전방위적 관찰이 바로 그가 인간을 사유하는 방식이었다.
거미나 파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변화는 다양한 요인에 의해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한다. 따라서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이런 요인들을 관찰하는 편이 더 좋은 것이다. 이 상호적 관계를 인식하고 타인을 바라볼 때, 성급한 확신은 불확실함으로 바뀌고 한 사람에게 이런저런 꼬리표를 붙이고 싶은 마음을 자제할 수 있다.
망치로 무쇠를 두드리는 것은 가치판단이 필요 없는 노동 행위일 뿐이지만, 망치로 누군가의 머리를 때리는 것은 폭력이고 범죄이다. 모든 존재는 여러 원인과 조건(인연因緣)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연기(緣起)의 세계에 있으며, 이 세계는 만들지 않으면 본래 없는 것이라는 공(空)의 세계이다. 불교의 사실 판단이다. 여기에 가치판단을 하려면, 세상의 법칙이 이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여야 한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사실 판단이며, 자비(慈悲)는 가치판단이다. 깨달음은 지혜이고, 가치의 판단은 자비(사랑)이다. 그러니까 모든 길은 사랑으로 통하고 사랑으로 만난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과 생명에게 편견과 차별을 거두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끌어안고 같이 기뻐하거나 아파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에게 불변하는 자아가 없다'고 말한다. 내 자아는 계속 변한다. 우리의 자아는 불변하는 것이라고 본다는 것은 오온(五蘊-색, 수, 상, 행, 식)이 작동하는 방식과 강도에 따라 요동치는 것일 뿐이다. 인연은 '인(因)'이라는 원인과 조건이라는 '연(緣)'들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은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은 간접적인 조건이다. 그러니까 원인도 중요하지만, 그 '인'을 좋은 조건의 '연'으로 만들어 가는 매일매일의 노력도 그만큼 중요하다. 말장난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판단과 가치판단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투사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사실 판단)이 아니라, 특정한 개인적 관계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그만하면 괜찮다'는 개념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늘,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과거와 현재의 평판에 따라 서로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어떤 관계 속에 얽매여 있지만, 그건 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과는 별개로 관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들의 과거는 다 똑같지 않고 그들의 경험 대부분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전의 관계를 바탕으로 누군가에 대해 '그만하면 괜찮다'거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무의식적인 투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수많은 관계와 생각, 불화, 우정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운명이란 늘 우연을 가장해서 온다"(기 드 모파상). '우연'을 프랑스어로 하면, 'le hasard'이다. 거꾸로 이 단어를 프랑스어 사전으로 찾으면, '우연'이라는 뜻과 함께 '운명'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골프 용어로는 '장애 지역', 즉 '해저드'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그러니까 삶은 수많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우연들이 운명을 만들어 가는 것일까? 우연이 거듭되면 운명이 되는 것일까? 그런 우연이 왜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반면 요즈음 우리 사회를 좌절하게 만드는 많은 사건들이 우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다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사는 것이 힘겨운 서민들에게는 그 흔한 우연이 끼어들지 않는다. 서울 강남에 땅도 없고, 주식을 줄 만큼 부자인 친구도 없으니 당연한 것인가? 그나마 불운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것일까? 운에도 총량이란 것이 있어서 누군가 행운을 누리는 만큼 다른 이들은 불운을 나눠 가져야 하는 것인가? 나에게는 질문들만 꼬리를 문다.
그래도 삶을 만끽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다. 세상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만큼만 보여준다. 그러니까 재미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세상은 재미투성이'인 것이다. 오래 살았다고 나이가 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꿈을 저버릴 때 나이가 드는 것이다. 다시 열정을 불태우리라.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만들지만, 열정을 포기하는 것은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그러니까 열정을 잃고 사는 사람이 최고로 늙은 사람이다. 삶의 열정에는 마침표가 없다.
삶은 그냥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행운을 부르는 우연이 찾아오지 않아도 삶은 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더 나은 삶의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열쇠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깨닫지 못한 인생의 경험과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수많은 우연으로 점철된 여행이라 할지라도, 여행의 목적지는 종착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를 마음껏 즐기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여행길에서 뜻밖의 행운을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더없이 큰 기쁨일 것이다. 미완성인 채로 여행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삶에 재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그저 감탄하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세상은 즐거운 일들로만 가득 차게 되고, 삶은 신나고 재미있어 진다. 인생과 연애를 하듯 살게 된다. 삶에는 이론이 없다. 삶은 그냥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그때 에르스트 블로흐가 말하는 것처럼, 그때 "놀라움이 비처럼 내린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아름답게 나이"들고 싶다.
아름답게 나이 든다는 것/김한규
그것은 끝없는 내 안의 담금질
꽃은 질 때가 더 아름답다는 순종의 미처럼
곧 떨어질 듯 아름다운 자태를 놓지 않는 노을은
구름에 몸을 살짝 숨겼을 때 더 아름다워
비 내리는 날에도 한 번도 구름을 탓하는 법이 없다
우아하게 나이 든다는 것
그것은 끝없이 내 안의 샘물을 길어 올려
우리들의 갈라진 손마디에 수분이 되어주는 일
빈 두레박은 소리 나지 않게 내려 내 안의 꿈틀거리는 불씨를
조용히 피워내는 불쏘시개가 되는 일.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것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욕망의 가지를 피를 토하는 아픔으로 잘라내는 일
혈관의 동파에도 안으로 조용히 수습하여
갈라진 우리들의 마른강물에 봄비가 되어주는 일.
살다가 문득 홀로 거닐다 바라본 높은 하늘이 너무 청아해
누군가에게 꼭 하늘을 마주 바라보자는 그 말을 전하고 싶어
문자를 보내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너 혹은 나의 처진 어깨를 펴 주고
가끔은 나를 버려 우리를 사랑하는 일이다
추하지 않게 주름을 보태어 가는 일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모르고 지낸 날들이 다만 슬펐을 뿐
어쨌든, 품위 있는 사람은 다음 8가지를 하지 않는다고, <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에서 저자 마티아스 뇔케는 말한다.
1. 자랑하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성공을 드러내기 바쁜 순간에도 조용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자신의 탁월함을 과시하지 않으며, 자신의 지위를 두고 유치한 게임을 벌이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의 성공을 내세우기 바쁜, 그 시끄러운 나팔의 행렬에서 과감히 그리고 유유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강인한 내면을 갖고 있다는 신호이다. 내면이 강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겸손한 행동으로 등장하지 못한다.
2.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불만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구구절절 자신의 사정을 하소연하지 않으며, 요란하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는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일도 더 많은데 뭘'. '이 정도면 별것 아니냐.' '방법은 찾으면 돼'. 그냥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뿐이다.
3. 애쓰지 않는다.
남들이 자신의 노력과 공을 알아채지 못해도 크게 개의치 않으며, 오히려 그걸 더 편안히 느낀다. 자신의 내적인 가치를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애쓰지 않는 마음이 오히려 사려 깊음으로 나타나고, 더 침착하게 행동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특별히 유난을 떨지 않고도,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지 않아도, 그들은 고요히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한다. 자신을 소모하는 삶에 탁월함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4. 도망치지 않는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가 안 좋을까 두려워서, 일이 잘못되거나 실패할까 두려워서, 책임을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삶이 항상 쉽거나 공평하지 않다는 걸 이해하며, 설령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남들이 뭐라 해도 자신이 하고 싶고,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한다. '혼자 서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기를 잃는 것'을 더 경계한다.
5. 속이지 않는다.
교묘한 속임수나 거짓 오만한 태도와 편견을 싫어한다. 아무리 겉을 휘황찬란하게 포장해도 본질이 바뀌지 않음을 알기에 기만과 술책은 쓰지 않는다. 거짓과 포장으로 환심을 사려고 하기보다는 솔직함과 진실함으로 신뢰를 얻고자 한다. 원래 탁월한 사람일수록 소박해지는 법이며, 강인한 사람일수록 덜 뻔뻔해지는 법이다.
6. 의존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타인의 판단에 의지하거나 좌우되지 않는다. 남이 자신을 통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남에게 자신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타인의 기준과 요구에 자신의 행복을 걸지 않으며 무엇을 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며, 내면의 힘과 독립성에 대한 표시이기도 하다.
7. 휘둘리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려고 한다. 상황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더라도 어떻게 대응하고 반응할지 선택할 수 있다고 믿기에 ‘저 사람이 내 기분을 나쁘게 해’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때때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태도일 뿐임을 잘 알고 있다.
8. 집착하지 않는다.
성공이라는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과대한 목표를 세워서 스스로를 압박하기보다는 현실 가능한 목표를 선택하고 과정의 즐거움을 누린다. 항상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는 없음을 알고 있으며, 필요하다면 거절하거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친절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고, 겸손하지만 나약하지 않게 행동하는 법을 안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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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표 교수 |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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