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1975~6

문화·예술 / 안재휘 기자 / 2022-05-08 23:44:13
(1975)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
(1976)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발꿈치를 들면 빨리 보고 많이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결코 오래 서 있을 수가 없다. 또 보폭을 넓혀서 한꺼번에 성큼성큼 앞으로 빨리 나아가려고 한다. 몇 걸음은 실제로 빨리 나아가지만 계속 그렇게 걸어갈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은 "무언가를 간단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당신을 그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고 말했다.

 

[박한표-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1975~6

 

(1975)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

(1976)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발꿈치를 들면 빨리 보고 많이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결코 오래 서 있을 수가 없다. 또 보폭을 넓혀서 한꺼번에 성큼성큼 앞으로 빨리 나아가려고 한다. 몇 걸음은 실제로 빨리 나아가지만 계속 그렇게 걸어갈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은 "무언가를 간단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당신을 그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고 말했다.

 

197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427)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

'까치발을 하고서는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가랑이를 한껏 벌려 보폭을 너무 크게 하면 제대로 길을 걸을 수 없다'는 말로 시작하는 노자 <<도덕경>> 24장을 읽을 차례이다. 우리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이 그 자체의 구조에 의하여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좋은 문장이다.

 

진득하게 앉아서 기다리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고 일어서는 것으로 부족해 발꿈치를 든다. 발꿈치를 들면 빨리 보고 많이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결코 오래 서 있을 수가 없다. 또 보폭을 넓혀서 한꺼번에 성큼성큼 앞으로 빨리 나아가려고 한다. 몇 걸음은 실제로 빨리 나아가지만 계속 그렇게 걸어갈 수가 없다. 까치발과 큰 걸음은 사람에게 일종의 착시효과를 준다. 처음에 많고 빠른 결과를 가져올 뿐인데 그 과정이 지속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까치발을 하고 큰 걸음으로 걷는 것이 낫다. 하지만 그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처럼 순간에만 통할 뿐 그 다음에 여전히 막막할 뿐이다.

 

좀 더 높이 서겠다고 발끝으로 서는 것은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다. 그런 부자연스런 행동으로서는 단단히,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멀리 가겠다고 다리를 한껏 벌리고 가려고 하는 것도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다. 그런 부자연스런 행동으로는 멀리, 오래 갈 수 없다. 모든 부자연스런 행위를 버리는 것이다. 이런 부자연스런 일로서는 본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결과만 불러 올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연의 지배를 받는다. 자연은 부자연스러운 인위의 행동을 그 자체의 조화의 법칙에 의하여 차단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초조해하지 말고, 일상에서 조급증을 덜어내고 싶다.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자중하며 일상을 행복하게 향유하고 싶다. 하루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행복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지만 모두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시작된 경쟁과 적자생존의 논리는 사회생활에서도 이어졌고 지금껏 우리들의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경쟁을 통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가능성이 십분 발현되기도 하고 발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쟁을 통한 성취를 최우선시하는 사회에서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릴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의 국민의식을 조사한 자료를 살펴보면 행복하기 위해 거창한 무언가가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남 보란 듯이' 살지도 않는다.

 

비우고 덜어내 텅 빈 고요함에 이르면, 늘 물 흐르듯 일상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뿐 포장하지 않으며, 순리에 따를 뿐 자기 주관이나 욕심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모든 행위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항상 자유롭고 여유로울 것이다. 샘이 자꾸 비워야 맑고 깨끗한 물이 샘 솟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만약 비우지 않고, 가득 채우고 있으면 그 샘은 썩어간다. 물질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전체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존중한다. 남보다 빨리 갈 필요도 없다. 조금 느릴지라도 꿈을 향해 살아갈 수 있는 삶, 경쟁에 밀릴까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남을 밟지 않아도 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아닐까?

 

이 장을 읽다 보니, <<구약성서>> "시편" 11절이 소환된다.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한다." 이 말을 좀 쉽게 풀어 본다.

 

(1) 그는 범죄자들과 나쁜 일을 도모하는 일에 동참하여 걷지(walk) 않는 사람이다.

 

(2) 그는 죄인들이 가는 길에 서 있지(stand) 않는 사람이다.

 

(3) 그는 남을 중상모략하는 자리에 있지(sit) 않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그걸 다음같이 '안 하기'를 하는 거다.

 

(1) 공동체를 음해하는 일을 도모하는 일에 참여하여, 그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범죄자들과 어울려 다니지 않는 것이다. 그런 곳에 걷는 일(walk), 즉 행동하지 않는다.

 

(2)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이 하는 삶의 스타일을 따라 그 안에 서 있지(stand) 않는다.

 

(3) 자신이 모르는,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중상모략하고 시기하는 자리에 앉아 남을 헐뜯는데 앉아(sit)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여기서 앉아 있는다는 건 자신의 몸에 배어, 자신이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내는 수동적인 삶의 모습에 앉아 안주(安住)하는 사람이다. 탈 영토화하여, 건너가기를 끊임없이 시도하여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길 위에 서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매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묵상해야 한다.

 

(1) 나는 오늘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걷고 있는가?

 

(2) 나는 오늘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과 함께 서 있지 않은가?

 

(3) 나는 오늘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자리에 앉아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안 하기'를 위해서는, 내가 나도 모르게 하는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제3자가 되어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노자의 '무위(無爲)'가 소환된다. '무위'는 부자연스럽게 인위적으로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거다. 그런데 '무위이불무위(無爲而不無爲)'라 했다.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장을 단지 이렇게 해석하면 부족하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면 부족하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도덕경>> 22장을 보면 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안 하기'를 하면, 그 결과가 좋다는 말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은 우주의 순환이나 사계절의 변화와 같이 정교한 원칙의 표현이다. 또한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는 정교한 '인위(人爲)'이다. '무위'는 오랜 연습과 훈련, 시행착오와 수정, 혹독한 자기 점검과 자기 변화를 거쳐 도달하게 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이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운 좋은 발견', '재수 좋게 우연히 찾아낸 것'이다. '세렌디피티'는 자신의 만의 보물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 우연히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 보물을 찾기 위해 애쓰지 않는 사람에겐 그런 행운이 찾아올 리가 없다.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그릇이 마련되지 않아, 금방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불행이다.

 

 

 

바람이 전하는 말/최서림

 

 

이제 그만 납작 엎드려 민들레로 살라 하네.

몸 안에 공기주머니를 차고 방울새로 살라 하네.

부딪히지 말고 돌아서 가는 물로 살라 하네.

위벽을 할퀴고 쥐어짜듯 아픈 새벽

유리창을 두드리며 바람이 일러주는 말,

비우면 채워지고 비우면 채워지니 강물처럼 살라 하네.

물새 똥 앉은 조약돌처럼 구르고 구르면서 살라 하네.

 

노자 <<도덕경>> 24장 읽기를 계속한다. 스스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 스스로 옳다고 하는 것, 스스로 자랑하는 것, 스스로 으스대며 뽐내는 것 등도 모두 자연스런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일을 하면 할수록 우리의 본래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만 거두게 된다. 스스로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기 때문에 멸시를 당하고, 스스로 자랑하기 때문에 한 일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스스로 잘난 체하기 때문에 무시를 당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아야 밝게 드러나고, 스스로를 옳다고 하지 않아야 돋보이게 되며,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야 한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게 되고, 스스로 뽐내지 않아야 오래갈 수 있다는 역설의 논리가 성립된다는 거다.

 

그래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自見者不明(자견자불명) 自是者不彰(자시자불창) 自伐者無功(자벌자무공) 自矜者不長(자긍자부장) - 스스로 드러내는 사람은 밝지 않고, 스스로 내세우는 사람은 돋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 으스대는 사람은 공이 오래가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역설의 공식이 성립한다는 거다.

 

自見不明(자견불명):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관점으로 보는 것

 

自是不彰(자시불창): 자신을 옳다고 하는 것

 

自伐無功(자벌무공): 자신을 드러내는 것

 

自矜不長(자긍부장): 자신을 내세우는 것

 

체하는 삶, 허례허식으로 가득한 삶, 위선적인 삶은 무엇보다도 우선 본인을 고달프게 한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뭔가 보여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뭔가 자기만 옳다고 외쳐 대고, 뭔가 자기만 위대하다고 거들먹거리고, 언제나 남의 눈치를 봐야 하고,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 쓰고, 남과 자기를 비교하고,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하고, 이렇게 온갖 애를 다 쓰는데도 기대한 만큼 좋은 결과는커녕 오히려 남의 비웃음만 사고 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더욱 잘난 체하고, 목에 힘주고, 그러기에 더욱 남의 빈축을 사게 된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그러다가 결국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이 불가능한 삶, 그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사는 '비교급 인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차분하고 홀가분한 삶의 담백한 맛을 모르고 사는 비참한 삶이 된다는 거다.

 

"자견", "자시", "자벌" 그리고 "자긍" 그런 것들은 모두 설거지통에 버려질 음식 찌꺼기이거나 몸에 난 종기 혹은 할 필요 없는 군더더기 행위와 같은 것들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자연의 원칙과 너무나 거리가 먼 행위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존재 원칙 속에서는 어떤 것도 "자기 자신"으로 확보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모든 것의 존재 근거가 다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 스며들어 있다. 이렇게 되어 있는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유한한 체계를 가지고 그것을 옳다고 고집하거나, 배타적으로 확보된 자신을 내세우는 것과 같은 행위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노자는 이걸 이렇게 말한다. "其在道也(기재도야)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物或惡之(물혹오지)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깨우친 사람은 그러한 데 처하지 않는다."

 

도를 아는 사람은 위에서 말한 일들이 모두 "밥찌꺼기""군더더기"같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이다. 남이 칭찬한다고 키가 한 치 더 커지는 것도 아니고, 남이 비난한다고 몸이 가려워지는 것도 아니다. 구태여 자신을 과시하여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거나, 멸시를 피하려 하는 모든 인위적이고 가식적이고 작위적인 행동이 결국은 부자연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일임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도를 아는 사람은 이런 일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남이 칭찬을 하거나 오해하여 비난하는데 신경 쓰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소박하고 충실하게 그리고 묵묵히 살아 갈 뿐이다. 단순하고 꾸밈이 없는 삶이 가져다주는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거다.

 

다음은 <<도덕경>> 24장의 원문과 번역이다.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 - 까치발로 서면 제대로 서있을 수 없고, 보폭을 너무 크게 하면 제대로 걸을 수 없다.

 

自見者不明(자견자불명) 自是者不彰(자시자불창) 自伐者無功(자벌자무공) 自矜者不長(자긍자부장) - 스스로 드러내는 사람은 밝지 않고, 스스로 내세우는 사람은 돋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 으스대는 사람은 공이 오래가지 않는다.

 

其在道也(기재도야)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物或惡之(물혹오지)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깨우친 사람은 그러한 데 처하지 않는다.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197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428)

 

어제 못다 한, 노자의 <<도덕경>> 24장 이야기를 오늘 아침에 조금 더 한다. "여식췌행(餘食贅行, 음식 찌까기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삶 이야기를 하려 한다. "企者不立(기자불립), 跨者不行(과자불행)"으로 시작되는 이 장은 과유불급을 도가 식으로 풀어낸 장이다. 멀리 보려는 욕심이 지나쳐 까치발로 서면 신체의 중심이 무너져 안정된 자세로 서 있을 수 없다. 빨리 가려는 욕심이 지나쳐 보폭을 지나치게 크게 하면 제대로 걸을 수 없다.

 

자연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봄을 앞당기려고 겨울을 짧게 하지도 않고, 앞서가는 물을 추월하려고 덜미를 잡지도 않는다. 자연처럼 서두르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자세와 보폭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스스로를 드러낸다거나, 스스로 으스대고 자랑하는 행동도 자연스럽지 않다. 노자는 이러한 것을 "여식췌행(餘食贅行)", 즉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과 같다고 말한다. 도에는 "여식췌행"이 없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소박한 삶, 미니멀리즘이 도를 닮은 행동이다. 원문은 이거다. "其在道也(기재도야)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物或惡之(물혹오지)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일은 먹다 남은 밥이나 군더더기 행동으로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깨우친 사람은 그러한 데 처하지 않는다."

 

노자가 말하는 도의 모습은 부드럽고 조화롭고 자연스러움이다. 그러한 것에 거스르는 것은 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까치발로 서는 것은 서 있기에 불안정하고 풀쩍풀쩍 건너뛰는 일 또한 급하고 조급함을 일으키니 도에 거스르는 것이다. 자기의 의견만 고집하고 옳다고 여기는 자는 세상의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여 도의 모습을 거부하려는 자이다. 자기 자랑을 일삼고 자기 잘난 멋에 사는 사람 또한 도를 따르지 않는 자이다.

 

실제로 까치발로 서거나 풀쩍풀쩍 건너뛰는 일은 사람들 눈에 쉽게 띈다. 눈에 쉽게 띄지만 불안정하다. 사람이 보여주기 식의 일을 하여 다른 이의 관심을 끄는 일을 하려다 보면 자기 의견에만 집중하고 바른말을 하는 남에게는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어쩌다 일을 해서 성공했다고 치자, 그러면 자기 자랑을 일삼는다. 그런데 이런 것은 결국 모두 남은 음식 찌꺼기처럼 처치 곤란한 것이고, 몸에 난 혹처럼 군더더기로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도를 터득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도를 터득한 사람은 좀 더 높이 서겠다고 까치발로 서는 일을 하지 않는다.

 

도를 터득한 사람은 멀리 가겠다고 다리를 한껏 벌리고 가려 하거나 풀쩍풀쩍 건너뛰는 일을 하지 않는다.

 

도를 터득한 사람은 자기의 견해만을 내세우지 않거나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관점으로만 보지 않는다.

 

도를 터득한 사람은 자신의 견해만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도를 터득한 사람은 자신의 공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다.

 

도를 터득한 사람은 우쭐대며 자만하다가 자신의 자리를 차버리지 않는다.

 

도를 터득한 사람은 세상과 부드럽고, 조화로우며, 자연스러운 관계를 추구한다.

 

<<장자>> 4"인간세" 2절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는 만날 수 있다.

 

夫道不欲雜(부도불욕잡) 雜則多(잡즉다) - 무릇 도는 잡되지 않아야 한다. 잡되면 용무가 많아지고,

 

多則擾(다즉요) 擾則憂(요즉우) - 용무가 많아지면 어지러워지며, 어지러워지면 근심이 생기고,

 

憂而不救(우이불구) - 근심이 생기면 남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잡다하지 않은 "단순은 궁극의 정교함"(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아인슈타인은 "무언가를 간단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당신을 그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고 말했다. 단순함이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그 단순은 오랜 수련을 거쳐 도달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거의 완벽한 상태이다. 그러니까 단순은 모자란 것이 아니다. 서툰 것도 아니다. 무용수들의 춤을 보면,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확장하는 고된 훈련을 통해 최적의 몸 상태를 만든다. 그들의 움직임의 가장 큰 특징이 단순이다. 이들은 군더더기(장자는 '익다(益多)'라고 표현) 없는 최소한 움직임으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동작을 만들어 낸다. 나는 아르떼(ARTE)라는 방송으로 가끔 세계 최고 무용 공연을 넋 놓고 볼 때가 있다.

 

배철현 교수가 소개한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 윌리엄 오컴에 의하면, 어떤 명제가 진리인지 거짓인지를 판가름하는 추론의 기준은 불필요한 가정의 제거라 보며, “필요 없이 복잡하게 만들지 마십시오라 말했다. 이 문장을 더 풀이하면, 문제의 핵심을 모르는 사람은 복잡하게 설명합니다. 쓸데없는 말들로 오히려 본질을 흐립니다.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게 설명하는 사람을 피하라는 말이다.

 

인생이란 삶을 위한 최적의 상태인 단순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인간에게 문명을 가져다준 두 가지 요소를 배철현 교수는 도시와 문자로 삼는다. 도시는 사적인 이해가 상충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대화와 양보를 통해 공동체적인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추상적인 공간이다. 문자는 이 추상적인 공간을 유기적으로 엮어주는 거룩한 끈이다. 그런데 고대 사람들은 문자를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사용했는데,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알파벳을 완성했다.

 

호메로스의 천재성은 자신들에게 절실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창조적으로 변용했다. 영어를 포함한 오늘날 대부분의 유럽 문자들은 페니키아 알파벳을 수정한 그리스 알파벳의 후손이다. 알파벳은 26개의 문자로 인간의 거의 모든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단순함의 극치이다. 혁명이란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이름을 바꾸는 용감한 행위이다. 혁명의 핵심은 꼭 필요한 몇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제거하는 단순함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는 복잡한 것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단순한 것에서 출발한다. 노자는 <<도덕경>> 12장에서 오만 가지의 색깔, 오만 가지의 소리, 오만 가지의 맛은 사람을 도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했다. 말을 달리면서 하는 사냥과 구하기 힘든 재물도 사람의 행동을 번잡하고, 광포하고, 방자하게 만든다. 재물이 많다고 삶이 도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소유물을 비울 때 도에 가까워진다. 성인은 배를 위하되 눈을 위하지 않는다는 대목은 삶의 본질적 요소와 비본질적 요소를 구분하라는 의미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는 거피취차(去彼取此)도 같은 맥락이다. 버려야 할 저것은 많은 재물, 많은 음식과 같은 비본질적인 것이고 취해야 할 것은 소박하고 단출한 생활, 즉 삶의 본질이다.

 

우리는 흔히 '연두'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초록'이라고 말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연두'완두콩의 빛깔과 같이 연한 초록색'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연두는 완두콩의 완두를 생각하고, 그 완두에서 초록을 생각한다. 초록은 풀의 푸른색을 직접적으로 연상하지만, 완두의 초록이 하나의 필터를 더 가진다. 초록이라고 해서 단 하나의 초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수한 초록이 있다. 노랑에 가까운 초록이 있을 수 있고, 파랑에 가까운 초록이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초록은 적색이나 주황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연두의 초록은 어떤 색에 가까울까?

 

 

연두의 저녁/박완호

 

연두의 말이 들리는 저녁이다 간밤 비 맞은 연두의 이마가 초록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한 연두가 연두를 낳는, 한 연두가 또 한 연두를 부르는 시간이다 너를 떠올리면 널 닮은 연두가 살랑대는, 널 부르면 네 목소리 닮은 연두가 술렁이는, 달아오른 햇살들을 피해 다니는 동안 너를 떠올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점에 닿을 때까지 네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들려올 무렵이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거리의 나무들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채워지며, 수채화가 유화가 될 것이다. 숲의 아래쪽은 진녹색, 중간은 초록, 위쪽은 아직 연두로 짙고 얕은 '녹색의 향연'은 좀 더 계속될 것이다. 봄이 꼭대기를 쫓아가며 농담(濃淡, 진함과 묽음)의 붓질을 해댈 것이다. 드문드문 섞인 솔숲이 암록(暗綠, 어두운 초록색)일만큼 신록이 눈부실 것이다. 숲이 아름다운 것은 색이 변화하며 형형색색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군자삼변(君子三變)"이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수양과 학문이 뛰어난 인물로, 모두가 되고 싶어 하는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엄숙함, 따뜻함 그리고 논리력을 모두 갖춘 사람을 '삼변(三變)'이라고 했다. 그런 세 가지 다른 변화의 모습을 그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를 '군자'라 한다 했다.

 

(1) 일변(一變)은 멀리서 바라보면 의젓하고 엄숙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망지엄연(望之儼然)’이라 표현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 풀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며 의젓하기는 하지만 가까이하기엔 다소 어려운 면이 있을 수 있다.

 

(2) 이변(二變)은 엄숙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가 대화해 보면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것을 '즉지야온(卽地也溫)'이라 한다. '멀리서 보면 엄숙한 사람인데 가까이 다가서서() 보면 따뜻함()이 느껴지는 사람의 모습이라 풀 수 있다. 그런 사람은 겉은 엄숙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속은 따뜻한 사람이다.

 

(3) 삼변(三變)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정확한 논리가 서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청기언야려(聽其言也厲)'. 그 사람이 하는 말(其言)을 들어보면() 논리적인 모습()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군자는 비록 달변은 아닐지 모르지만 했던 말은 반드시 지키는 신의가 있다.

 

이를 종합하면, 군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외면의 엄숙함과 내면의 따뜻함에 논리적인 언행까지 더해져, 멀리서 보면 의젓한 모습, 가까이 대하면 대할수록 느껴지는 따뜻한 인간미,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언행을 하는 군자, 최상의 사람, 선비, 보살인 것이다. 그것이 한 사람의 품격이다. 요즈음 말로 해서 리더는 온화하되 절대로 유약해서는 안 된다. 주저하고 결단치 못하는 리더는 전체 조직을 위험에 빠뜨리는 리더이다.

 

▲ 박한표 교수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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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휘 / 대표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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