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무너진 왕실, 반란을 평정한 진문공은 천하의 실리를 거머쥐다

이튿날 태숙은 다시 왕을 찾아 전날 받은 장원상에 대하여 하례를 드렸다. 입궐한 김에 태후궁에도 들렀다. 왕후는 이미 와 있었다.
“태숙! 어서 오세요.”
살짝 코맹맹이 섞인 목소리가 촉촉했다. 때로는 눈으로도 많은 말을 나누는 법, 주고받는 눈길에도 짜릿한 아림이 있었다. 이윽고 둘은 호젓한 전각으로 들어갔다. 처마 아래 환기창을 통하여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지고 있어 실내는 생각보다 밝았다. 그러기나말거나 단둘의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끌린 듯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남자도 여자도 예비 절차 따위는 좋아하지 않았다.
남자는 떨리는 손길로 여자를 돌려세우고 입을 맞추더니 대뜸 궁금하던 가슴부터 헤집고 들었다. 가슴 가리개가 없던 시절이라 졸지에 사내 앞에 드러난 하얀 젖무덤 두 개가 사로잡힌 들짐승처럼 헐떡거렸다. 마음이 급한 탓인지 남녀의 교접은 뒤죽박죽이었고 허우적거렸다. 이미 젖어 있는 여자가 활처럼 몸을 휘며 남자를 받아들였다. 둘의 눈에는 상대에 대한 갈구로 가득하고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앙탈을 부리듯 배배 꼬던 신음이 끊어지고 드디어 만족한 그들은 나란히 누웠다. 여자는 눈자위가 발갛게 상기되어 서서히 가라앉는 색정을 간수하고 있었고, 남자는 그런 여자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코를 벌렁거리며 여인을 음미했다. 며칠 전 일관의 점괘에서 말한 ‘신령한 짐승인 기린의 암수 한 쌍이 엎치락뒤치락 즐기는 형상이었다. 단지 사람이 바뀌었을 뿐이다. 왕후가 곰실곰실 몸을 꼬아 남자의 품을 헤집으며 속살거린다.
“언제든 이 태후 궁에서 만나요. 이 몸은 당신 거에요,”
이날 태후궁의 궁녀들은 남녀가 정을 통한 일을 알고 있었지만,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태후도 궁녀들을 단속시켰다.
“함부로 입을 놀리면 목이 달아날 것이야!”
궁중에 소동(小童)이란 시비가 있었다. 눈을 옆으로 살짝 흘기는 애교가 일품이었다. 나긋나긋한 자태에다 비파를 잘 뜯어 왕후의 귀염을 받았다. 그날 태숙은 왕후를 기다리면서 소동에게 축(筑, 거문고 같은 현악기로 13현)을 뜯게 하였다. 왕후는 빨리 오질 못했다. 태숙은 술로 목을 축이며 연인을 기다렸다. 소동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칠흑같이 검은 머릿결에서는 한 걸음 밖에서도 달착지근한 향기가 솔솔 풍긴다. 머릿속 상상은 어느덧 연인의 뽀얀 알몸과 조개 속살같이 꼬물거리는 혀에 가 있었다. 결국 태숙은 팔베개로 기대었던 몸을 벌떡 일으켜서 그대로 소동을 덮쳐 누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소동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그녀는 미쳐 날뛰는 태숙보다 왕후가 이 일을 알게 되는 게 두려웠다.
나인들은 원래 속옷을 입지 못하였다. 소동은 순식간에 홀라당 옷이 벗겨진 알몸이 되었다. 그녀는 태숙이 바지 고름을 푸는 틈을 타서 미꾸리가 빠지듯이 도망쳤다. 욕심을 채우지 못한 남자는 칼을 뽑아 들고 뒤쫓았다. 아예 사람을 죽여 입을 막으려는 심산이다. 달아날 데가 없어진 소동은 대전으로 뛰어 들어갔다. 알몸으로 주양왕 앞에 엎드려 울면서 왕후와 태숙의 불륜을 낱낱이 고했다.
“저를 죽이려고 쫓아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당장 왕후를 냉궁에 가두어라.”
옥소선자는 그녀가 사랑하는 옥퉁소와 함께 구금되었다. 냉궁은 말이 좋아 궁이지 악명 높은 내명부의 격리용 수형 시설로서 죄를 지은 여인들의 마지막 처소이다. 왕후는 침묵과 어둠 속에 많은 날을 홀로 보낼 것이다.
밤을 새워 달아난 태숙은 적(赤)나라 군사 5천을 빌려 낙양성으로 진격했다. 왕실의 군사는 제후국을 힘으로 응징하던 과거와는 사정이 사뭇 달랐다. 천자를 경호하는 근위병의 역할에 충실하다 보니 갑옷만 화려할 뿐 전투력은 형편없었다. 적나라 군사는 그날 밤, 자루 짧은 도끼 하나씩을 들고 어둠 속에 스며들어 불을 질렀다. 근접전에는 짧은 도끼만 한 게 없다. 왕실 군사는 우왕좌왕 크게 흩어졌고, 낭패한 왕은 달아났다. 성문이 잡아 뜯기듯 열리고 태숙이 입성하여 의기양양하게 어머니부터 찾았다. 몸져누웠던 태후는 아들을 보자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풀어졌는지 숨이 끊어져 버렸다.
태숙은 냉궁에 갇힌 왕후를 데려오게 하였다.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뺨을 비벼댔다. 오늘도 말은 필요치 않았다. 그대로 침상 위에 쓰러져서 사랑을 나누었다. 이내 시비 소동을 잡아 오라고 분부했다. 괘씸한 것보다 못다 푼 욕정의 잔불이 있었다. 그러나 소동은 적나라 군사가 성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이미 우물에 몸을 던진 뒤였다. 이튿날 태숙은 태후의 유명이라면서 스스로 왕위에 올라 적나라 공주 숙외(叔隗)를 왕후로 책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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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생성 이미지 |
한편 정나라로 피신한 주양왕은 제후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과인이 부덕한 탓에 낭패를 당하여 정나라 범(氾) 땅에 와 있노라.”
그런데 아무도 왕을 위하여 군사를 보내주질 않았다. 기껏해야 사람을 보내 문안을 드릴 뿐이었다. 이만저만 체면이 깎이는 일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복형제간 왕권 다툼이다. 왕실의 위엄이 형편없어진 탓도 있지만, 그보다 적나라 군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세상은 오늘날의 형세를 일러 동제서진(東齊西晉), 남초북진(南楚北秦)이라고 하였다. 동서남북 천지 사방을 통틀어 제(齊), 진(晉), 초(楚), 그리고 진(秦)이 강국이란 뜻이다. 그들 중 초나라는 적(赤)과 이웃하며 사이가 좋아 이참에도 편들고 있었으며, 제(齊)는 제환공 사후에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북쪽의 진(秦)과 서방의 진(晉)이 남았다.
왕실의 명을 받은 진문공(晉文公)은 먼저 장인이 되는 진목공(秦穆公)에게 서신을 보냈다.
“천자께서 부르시기에 출병할까 합니다. 서북방 오랑캐가 위수를 건너올 것이 염려됩니다. 오직 장인을 믿고 출정하겠습니다.”
이번 환란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니 뒷배를 지켜달라는 부탁이다. 진(秦)목공은 웃었다. 그도 호락호락한 위인은 아니다.
“허허, 내 한번 사위의 솜씨를 봐야겠군.”
진(晋)이 주양왕을 옹립하여 낙양으로 진군하니, 태숙 쪽은 동요하여 이탈자가 속출했다. 백성들도 봉기하였다. 형수와 사통한 태숙의 행실이 못마땅한 차에, 천자가 온다는 소문에 성문으로 달려가서 시위를 벌였다. 수비 군사는 거미 새끼 흩어지듯 무너졌다.
도망치는 태숙을 막아선 것은 위주였다. 태숙은 당황했다.
“위… 위주라고 했는가…? 내 부탁함세. 이렇게 빌겠네. 이대로 죽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내가 살아 있기만 하면 언젠가 왕실이 내 손아귀에 들어올 걸세. 한 번만 살려주시게.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반드시 보답할 때가 있을 것이야.”
그러나 평생을 유랑하면서 겉으로 거만하고 속은 비열한 인간 군상을 수없이 겪어 온 위주는 에누리가 없었다.
“흐흐, 말은 잘 알겠다. 이놈은 아주 질이 나쁜 수다쟁이로군. 쓰잘데기 없는 소리 그만하고 포박부터 받아라. 천자께서 너를 놓아주라 하시면 그때 가서 내 다시 생각해보마.”
순간 태숙은 마음을 접었다. 이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에 따라 삶과 죽음이 정해질 뿐, 달리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짜고짜 칼끝을 세워 상대의 가슴팍을 찔러갔다.
“이 천한 것이! 네 어찌 나를 그리도 만만케 보는 것이냐?”
그러나 위주는 이미 이리저리 곁눈질하는 태숙을 보면서 눈치를 채고 있었다. ’흥…!‘ 코웃음과 함께 반걸음 물러서 엇갈리게 공격을 피하더니, 틈을 주지 않고 상대의 칼을 후려쳤다. 태숙의 장검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위주가 훌쩍 수레 위로 뛰어오르면서 상대의 얼굴을 찔러갔다. 내몰린 태숙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자, 위주가 허리춤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팽개쳤다. 태숙이 무릎걸음으로 몸을 일으키는데 이미 눈앞에 날 넓은 언월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대로 어깨쭉지를 비스듬히 베여 가슴 아래까지 갈라졌다.
지켜보던 옥소선자가 자랑하는 비도를 양손에 나누어 들고, 슛… 한꺼번에 두 자루 비도를 날렸다. 뜻밖의 출수에 위주는 칼을 휘둘러 비도를 받아냈다. 하나는 칼에 막혀 떨어지고 다른 하나는 팔등을 감싼 갑주에 막혀 떨어졌다. 아무래도 멋으로 익힌 무예라 실전에는 도움이 되질 못했다. 군사들이 득달같이 왕후를 땅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얼굴 가득 태숙의 피를 뒤집어쓴 위주가 말했다.
“한때는 왕후였던 여인이다. 칼을 쓰지 말고 멀리서 활을 쏘아 죽여라.”
꽃 같은 적(赤)나라 공주는 고슴도치마냥 화살 범벅이 되어 죽었다. 수레 위에는 그녀가 황망 중에 챙겨 나온 옥퉁소 한 자루만 도르르 굴렀다. 이게 다 남녀가 잘못 맺어진 인연 탓이다.
주양왕은 반란을 진압한 진문공을 치하하고 비단과 패물을 상으로 내렸다.
“수고가 많구나! 참으로 애쓰셨다.”
천자가 제후를 호령하고 부리던 시대는 지났다. 왕은 존경과 두려움 섞인 눈으로 진(晉)의 군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진문공에게는 속이 뻔한 공치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신은 감히 우악한 말씀을 받을 수 없나이다. 대신 훗날 신이 죽은 뒤에 수장(隨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수장이란 무덤 속에 길을 내고 관을 안치하는 것으로 천자의 무덤에만 허용되는 예법이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제후의 무덤에는 길을 내지 못한다. 진문공의 말은 자신에게 천자에 필적하는 죽음의 예를 허락하라는 말이다. 왕은 일순 난감하고 당황하여 대답하지 못했다. 이튿날에야 신하들과 의논한 결과를 전달하였다.
“선대께서 예법을 정하여 왕실과 신하의 경계를 두셨다. 예법을 어지럽힐 순 없다. 그러나 과인이 경의 크나큰 노고를 어찌 모르겠는가? 예법과 관련된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것이다. 말해보시라.”
“정히 그러시다면 감히 여쭐 말씀이 있나이다. 신의 나라는 길이 멀어 천자를 가까이 모시지 못하는 고충이 있습니다. 온, 원, 양번, 찬모의 네 고을을 내려주시면 왕실의 울타리가 되어 성심껏 보위하겠나이다.”
대놓고 왕실의 직할지 중 일부를 요구하였다. 이 네 고을은 태항산 남쪽 교통의 요충지로서, 《시경》에서 주남(周南)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고지식한 왕은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지 못하고 떫은 감 씹은 얼굴로 주남 땅을 양보했다. 그런데, 진문공이 진정으로 무덤 속에 길을 내는 수장(隨葬)의 예법을 원했던 것일까? 세상에서 ‘교활’하다고까지 할 만치 실리를 챙기는 사람이다. ‘존왕양이(尊王洋夷)’라고 하지만 겉치레의 말뿐이며 왕실의 시대 따위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왕실을 보위한다? 공공연한 거짓말이며,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새로 얻은 고을에 위주 등 네 명의 장수를 남겨 다스리게 하고 그 지역 일대를 남양(南陽)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산서성 남부의 분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비옥한 평원이다. 이로써 진(晉)은 중원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지하여 천하 패업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대신 왕실의 직할지는 더욱 쪼그라들어 오늘날 바티칸 시국처럼 실질적인 힘은 없고 명목뿐인 성읍국으로 전락할 판이다.
진문공의 얼굴은 이날따라 온유하고, 입가에는 미소를 띠었다. 과연 영웅 본색의 모습이다. 이번 원정은 여러모로 성공이다. 천하에 진(晉)의 강성함을 알린 데다 천자를 핍박하여 땅까지 얻었다.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백성들은 너도나도 거리로 몰려나왔다. 어느 얼굴에서도 경계나 반감의 기색은 없었다.
“방백 제환공이 다시 살아와 천하의 질서를 지키는구나!”
“어디? 어디… 나도 진후의 존안 좀 보자!”
“진나라 임금, 천세! 천천세!”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이렇듯 천하의 여론은 때로는 진실과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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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완 (韓 莞) 작가 |
※저자 한완은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74-1982 영천시 교육청에서, 1985-2014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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