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자생(자생)하려 하지 않았기에 장생(長生)할 수 있었듯이, 뒤로 물러서면 앞에 서고, 버리면 오히려 존재하고, 이기적인 나를 버리면 이익이 다가온다는 것이 노자가 발하는 역성(반)의 철학이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 해석하면 '그러므로 성인은 몸을 뒤에 두기에
세상이 요동치고 있다. 그 변화의 흐름을 잘 따라갈 수 없다. 미국은 '시대의 광인'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한국 대통령도 위험하다. 자신의 앞에 놓은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거 같다. 오늘 아침 10시에 기자회견을 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게 변곡점이 될 것으로 다들 판단한다.
어쨌든, 그럴수록 고전을 읽으며, 자신을 단단히 해야 한다. 그야말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이다. 그런 차원에서 어제 못다 한 이야기를 오늘 아침 이어간다. 어제 말했던, 천지(天地)가 장구(長久)한 모습을 본받아야 할 성인(聖人)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인(聖人)은 내가 추구하는 인간상이기도 하다.
성인은 남 탓하지 않는다. 내 뜻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아도, 세상 탓하지 않는다. 다 "도(道)"의 움직임으로 받아들인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하지 않았는가? "천지불인"은 천지의 운행이나 활동, 그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감이나 바램과 무관하게 그 나름대로의 생성법칙과 조화에 따라 이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좀 야속하고 때로는 무자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들로 대표되는 도(道)를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어 누구에게는 햇빛을 더 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톨스토이는 "신은 진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다린다"고 했다.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천장지구"를 보고 다음과 같이 하라고 말한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外其身而身存(외기신이신존): 그러므로 성인은 몸을 뒤에 두기에 앞설 수 있고, 몸을 밖에 둠으로써 몸을 보존한다. (몸을 밖으로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非以其無私邪(비이기무사야) 故能成其私(고능성기사): 사사로운 마음을 앞세우지 않기에, 능히 자신을 이룰 수 있다. (그 성인의 경지의 사사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후(後)로 물러서면, 선(先) 앞서고, 외(外)로 버리면 존(存) 살게 되고, 무사(無私)로 나를 버리면, 성사(成私)로 나를 얻는다는 이름(成)의 역설(反)이다.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도를 구현한 이상적인 치자(治者), 자유인, 내 방식대로 말하면, 자신의 삶을 리드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기 몸을 내세우면서 남보다 앞서가면 안 된다. 항상 그 몸을 뒤로 해야 한다. 노자는 그걸 이렇게 말한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 해석하면 '그러므로 성인은 몸을 뒤에 두기에 앞설 수 있다'이다.
여기서 "후기신"의 "후"는 "신(身, 몸)"을 목적으로 하는 타동사로 보면 이해가 쉽다. "그 몸을 뒤로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而)" 다음에 있는 "신선(身先)"에 있어서는 "신"이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로 보는 거다. 자연스럽게 그 몸이 앞서게 된다는 뜻이다. 자기 몸을 뒤로 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그 몸이 자연스럽게 앞서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적 삶은 소극적이고 모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앞서게 하기 위하여 그 몸을 뒤로 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를 이해하여야 이런 삶의 자세가 이해된다.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이 문장을 단지 이렇게 해석하면 부족하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로 보는 것이 아니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도덕경>> 제22장을 보면 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도덕경>> 제3장에 나오는 "위무위 칙무불치(爲無爲 則無不治)"에서, ‘무위’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주의 순환이나 사시사철의 변화와 같이 정교한 원칙의 표현이다.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는 정교한 '인위(人爲)'이다.
다음 "外其身而身存(외기신이신존)"도 문법 구조는 동일하다. "외(外)"가 타동사이고, "존(存)"이 타동사이다. "외기신(外其身)"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말 그대로 하면, "그 몸을 밖으로 한다"이다. 오강남은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로 읽었고, 도올은 죽음을 불사하고 자기 몸을 자기 밖으로 내던지다"로 해석하였다. 죽음을 불사하고 자기를 내던질 줄 알기 때문에 오히려 그 몸이 보존될 수 있다는 거다.
성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조건 대의를 위하여 소아적 생명을 버릴 줄 아는 희생물이 된다고 하는 각오를 의미하는 거로 보았다. 그리하여 이 장의 결론은 "무사(無私)하기 때문에 성사(成私)할 수 있다"는 거다. 이를 "非以其無私邪(비이기무사야) 故能成其私(고능성기사)"라 했다. '사사로운 마음을 앞세우지 않기에, 능히 자신을 이룰 수 있다'는 거다. 다시 말하면,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결국 부자생(不自生) 하기 때문에 장생(長生)하는 천지의 모습과 상통하게 된다.
요약하면, 노자가 말하는 역설(反)이다. 천지가 자생(자생)하려 하지 않았기에 장생(長生)할 수 있었듯이, 뒤로 물러서면 앞에 서고, 버리면 오히려 존재하고, 이기적인 나를 버리면 이익이 다가온다는 것이 노자가 발하는 역성(반)의 철학이다. 내 몸을 버리면 또 다른 생명을 얻을 것이다. 조국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개인의 사적 이익을 포기했으나 결국 나라와 사회가 존경하고 추모하는 사람이 된다면, 나를 버려서 오히려 나를 얻는 사람이 되는 이치이다.
진정한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통장에 새겨진 숫자가 크고, 멋진 집과 높은 지위를 얻었다고 성공이라 말할 수 없다. 자신을 버려야(無私) 오히려 자신을 얻는(成私) 것이 진짜 성공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이미 배웠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좀 길지만, 끝까지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배웠다/오마르 워싱턴(아라비아 시인)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이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을 배웠다.
인생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 가에 달려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다음은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문제임도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 자신을 비교하기보다는
내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또 나는 배웠다.
인생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을.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의 만남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웅임을 나는 배웠다.
사랑을 가슴 속에 넘치게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나타낼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는 배웠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정한 우정은 끊임없이 두터워진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사랑도 이와 같다는 것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나는 배웠다.
또 나는 배웠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해도 때때로 그들이 나를 아프게 하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내가 내 자신을 때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환경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의 책임인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우리 둘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그리고 우리 둘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나는 배웠다.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인간 자신이 먼저임을 나는 배웠다.
두 사람이 한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또 나는 배웠다.
앞과 뒤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 앞선다는 것을.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 의하여
내 인생의 진로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이제는 더 이상 친구를 도울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친구가 내게 울면서 매달릴 때에는
여전히 그를 도울 힘이 나에게 남아 있음을 나는 배웠다.
글을 쓰는 일이 대화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아픔을 덜어준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내가 너무나 아끼는 사람들이 너무나 빨리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그리고 정말 나는 배웠다.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과
나의 믿는 바를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일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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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표 교수 |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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