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저 그대로 피고 지는 자연처럼 관계에 순응하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피조물일 뿐이다. 불완전한 존재로 왔다가 자기 나름의 최선의 노래를 부르다 자기가 온 곳으로 돌아가는 철새 같은 존재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아직 끝이 아니다, 내가 끝이라고 선택하는 순간이 끝이다.'
선택인가? 필수인가? '평범하다'는 마음은 언제나 우리를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야망을 쫓아야 할까? 멀리해야 할까?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어떤 변화의 가능성도 없이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는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갖는 거다.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지체가 또 다른 특권은 아닐까? 아니면 자의적으로 중용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미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거나 최소한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만이 더 이상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오늘도 프랑스계 미국인인 마리나 반 주일렌의 <<평범하여 찬란한 삶의 향한 찬사(Eloge des vertus miniscules)>> 이야기를 한다. 이 책 속에 "마음껏 실패할 권리"라는 말이 나온다. 녹초가 될 때까지 일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사치로 보인다.
그렇지만 '평범하고자 한다', '그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은 한 가지 상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의 눈,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내 주변 사람들이 한층 더 막연하게 느껴지거나, 누군가를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고 비판하지 않게 된다. 이 세상에는 자신의 성공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람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도 많다.
다른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자. 에밀리 디킨슨이 말한, 첫인상을 뒤바꿀 수 있는 "열한 번째 시간(the eleventh hour)"을 기억하자는 거다.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자는 거다. "열한 번째 시간"이란 표현은 영어의 관용적 표현으로, '막판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상황'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며, 최후의 시간에도 희망은 있다는 의미의 시간을 말한다. 에밀리 디킨슨의 말을 공유한다. "왜 지적 세계에는 백발이 성성한 죄인들이 구원받는 영혼 세계의 '열한 번째 시간'이 없을까? 평범한 여자애들이 '현명'할지, 또 누가 아는가?"
마리나 반 주일렌에 의하면, '그만하면 괜찮다'는 시선을 갖추고 그것을 인식하면, '열한 번째 시간'에 일어나는 인식의 변화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게다가 여러 현인(賢人)의 주장들을 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 사이에 간혹 생길 수밖에 없는 간극을 보다 신중하게 판단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했다. 판단을 유보하고 삶이 흘러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결과보다는 과정에 관심을 둔 귀한 자질을 지닌 사람들은 '그만하면 괜찮다'는 인식을 지닌 사람들이다.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에 대한 이야기 몇일 동안 계속 이어간다.
김연수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그가 메리 올리버의 시를 얘기하며 “세상은 경이로워!”라고 말하는 것과 “세상을 품에 안을 때 경이로워!”라는 말이 다르다고 말하는 문장을 발견했다. “’세상을 품에 안을 때 경이롭다’는 말은 경이로움이 내게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세상을 안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셈이다.
기러기(Wild Gees)/메리 올리버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참회하며 무릎으로 사막을 건너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의 육체 안에 있는 연약한 동물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게 하면 된다.
너의 절망에 대해 말하라.
그런 내 절망에 대해 말하리라.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돌아간다.
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투명한 빗방울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간다.
풀밭과 우거진 나무들 위로 산과 강 너머로
그러는 사이에 기러기들은 맑고 푸른 하늘 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간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네가 상상하는 대로 자신을 드러내며,
당신의 상상력에 내맡기고,
기러기들처럼 거칠고 들뜬 목소리로
너에게 외친다.
이 세상 모든 것들 속에
너의 자리가 있다고.
시인은 완벽할 수 없는 우리의 존재를 그대로 수긍하고 받아들이라고 속삭이는 듯 하다. 연약한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한다. 우리는 그저 그대로 피고 지는 자연처럼 관계에 순응하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피조물일 뿐이다. 불완전한 존재로 왔다가 자기 나름의 최선의 노래를 부르다 자기가 온 곳으로 돌아가는 철새 같은 존재이다. 나 스스로를 그대로 보듬어 껴안게 한다.
끝으로 '열한 번째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영어로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We are at the eleventh hour." 이 말을 해석하면 '우리 막바지에 와 있어'이다. 'at the eleventh hour'는 '막판에, 막바지에, 마지막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영사전을 보면, '열한 번째 시간에 무언가를 한다면, 마지막 가능한 순간에 그것을 한다는 것'이 풀이가 있다. 이 말은 <마태복음> 20장 1-16절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우선 마태복음 20장 1-16절을 읽어 본다.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개신교 성경은 다음과 같이 좀 다르다.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하고,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포도밭 주인은 1시에도, 3시에도, 6시, 9시에도 일꾼들을 고용했는데, 제 11번쩨 시간(the eleventh hour)에도 놀고 있는 사람들을 고용하고, 임금은 동일하게 1데나리론을 지급했다. 먼저 와서 더 많은 일을 하고도 같은 보상을 받는 것에 불만을 보이자, 최후의 시간(the eleventh hour)이라도 참회하는 자들은 마찬가지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포도밭은 천국, 포도밭 주인은 예수, 일꾼들은 우리를 비유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간 개념은 우리 시간으로 오전 6시에 하루를 시작하여 시간을 셈하는 것으로 첫 번째 시간은 오전 7시를 의미하고, 제 11번째 시간은 오후 5시로 하루 일과가 끝나는 오후 6시가 되기 한 시간 전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열한 번째 시간'이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며, 최후의 시간에도 희망은 있다는 의미의 시간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내가 자주 기억하는 말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내가 끝이라고 선택하는 순간이 끝이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 |
▲ 박한표 교수 |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 미디어시시비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