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는 그 힘을 내면에 모은 채 보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쳐낼 수 있는 것
-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몰아(沒我)'의 상태일수록 내용이 마음에 더 깊게 남는다.
- 카네기 ‘1․2․3 법칙’…‘말은 1분하고, 2분 이상 들어 주며, 맞장구에 3분을 사용 하라’
- ‘聖人’이라는 한문 글자를 풀면, …먼저 듣고(耳) 말하기를(口) 가장 잘하는 사람(王)이 성인
어제 한병철이 말하는 근대의 "서사의 위기"를 이야기 하다가 다른 길로 샜다. 오늘 아침 다시 돌아온다. 근대의 '서사적 위기"는 세상이 정보로 과포화되는 데 원인이 있다고 한 교수는 말했다. 이야기 정신은 정보의 홍수에 목이 졸렸다고 말한다. 정보는 설명할 수 없고 오로지 이야기로 전해지는 일은 취급하지 않는다. 반면 이야기에는 경이롭고 의미심장한 무언가가 있다. 이야기하기 예술에는 서사적 긴장을 위해 설명을 삼가한다. 이야기, 서사는 설명을 삼가한다. 이야기는 모든 걸 내보이지 않는다. 그래 이야기는 힘이 있다. 이야기는 그 힘을 내면에 모은 채 보전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쳐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정보는 완전히 다른 시간성을 보인다. 정보는 오로지 찰나의 순간에만 작동한다. 영구한 발아력을 지닌 씨앗이 아닌, 티끌이나 다름없다. 중요한 게 발아력이 없다. 한번 인식되고 나면, 이미 확인을 마친 부재중 메시지처럼 무의미성 속으로 침잠한다. 이야기는 다르다.
이야기는 경험을 먹고 자라며,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 이야기는 그 안에 든 풍부한 경험과 지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준다. 예를 들어 "와이로(蛙利鷺)"라는 이야기를 공유한다.
고려시대 의종 임금이 하루는 단독으로 야행(夜行)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날이 저물었다. 다행히 민가(民家)를 하나 발견하고 하루를 묵고자 청을 했지만, 집주인이었던 이규보 선생이 조금 더 가면 주막(酒幕)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여, 임금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그 집 이규보 대문에 붙어있는 글이 임금을 궁금하게 했다.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唯我無蛙 人生之恨 (유아무와 인생지한).>
"도대체 개구리가 뭘까?"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어느 만큼의 지식(知識)은 갖추었기에 개구리가 뜻하는 걸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주막에 들러 국밥을 한 그릇 시켜 먹으면서, 주모에게 외딴집(이규보의 집)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과거에 낙방하고 마을에도 잘 안 내려오며, 집안에서 책만 읽으면서 살아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궁금증이 발동한 임금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서 사정사정한 끝에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집주인의 글 읽는 소리에 잠이 오지 않아서 면담을 신청했다. 그러고는 그렇게도 궁금하게 여겼던 <唯我無蛙 人生之恨 (유아무와 인생지한)>이란 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옛날에 노래를 아주 잘하는 꾀꼬리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살았는데, 하루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데, 까마귀가 꾀꼬리한테 내기를 하자고 했다. 바로 '3일 후에 노래 시합을 하자'라는 거였다. 백로(白鷺)를 심판으로 하여 노래 시합을 하자고 했다. 이 제안에 꾀꼬리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노래를 잘하기는커녕, 목소리 자체가 듣기 거북한 까마귀가 자신에게 노래 시합을 제의하다니 말이다. 하지만 월등한 실력을 자신했기에 시합에 응했다. 그리고 3일 동안 목소리를 더 아름답게 가꾸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반대로 노래 시합을 제의한 까마귀는 노래 연습은 안 하고 자루 하나를 가지고 논두렁의 개구리를 잡으러 돌아다녔다. 그렇게 잡은 개구리를 백로(白鷺)한 테 뇌물로 가져다주고 뒤를 부탁한 것이었다.
약속한 3일이 되어 꾀꼬리와 까마귀가 노래를 한 곡씩 부르고 심판인 백로의 판정을 기다렸다. 꾀꼬리는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기에 승리를 장담했지만, 심판인 백로는 까마귀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한동안 꾀꼬리는 노래 시합에서 까마귀에 패배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서 백로가 가장 좋아하는 개구리를 잡아다 주고, 까마귀가 뒤를 봐 달라고 힘을 썼기 때문에 본인이 패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꾀꼬리는 크게 낙담하고 실의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라는 글을 대문 앞에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이 글은 이규보(李奎報) 선생이 임금한테 불의와 불법으로 뇌물을 갖다 바친 자에게만 과거 급제의 기회를 주어 부정부패로 얼룩진 나라를 비유해서 한 말이었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란 말이 생겼다는 거다. 이규보 선생 자신이 생각해도, 나의 실력이나 지식은 어디에 내놔도 안 떨어지는데 과거를 보면 꼭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돈도 없고, 정승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과거를 보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노래를 잘하는 꾀꼬리와 같은 입장이지만, 까마귀가 백로한테 개구리를 상납한 것처럼 뒷거래를 하지 못하여 과거에 번번이 낙방해 초야(草野)에 묻혀 산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이규보(李奎報) 선생의 품격이나, 지식이 고상(高尙)하기에 자신도 과거(科擧)에 여러 번 낙방하고 전국을 떠도는 떠돌이인데, 며칠 후에 임시(臨時) 과거(科擧)가 있다 하여 개성으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궁궐에 돌아와 즉시 임시 과거를 열 것을 명(命)하였다고 한다. 과거를 보는 날, 이규보 선생도 뜰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시험관이 내건 시제(試題)가 바로, <'唯我無蛙 人生之限(나는 있는데 개구리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다)>란 여덟 글자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규보 선생은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큰절을 한 번 올리고, 답을 적어 냄으로써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이후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와이로(蛙利鷺/唯我無蛙 人生之恨)'란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식이다. 심리 분석이나 해석이 곁들여진 소설과 달리, '서사적' 이야기는 서술적이다. 최대한 창의성으로 서술하면서도 시간의 심리적 맥락을 독자들에게 주입하지는 않는다. 이야기하기와 귀 기울여 듣기는 상호 의존적이다. 이야기 공동체는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귀 기울여 듣는 행위에는 특별한 주의 집중이 필요하다.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자기를 잊고 들리는 내용에 몰두한다.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몰아(沒我)'의 상태로 접어들수록 들리는 내용은 그 사람의 마음에 더 깊게 남는다. 다시 한번 경청(傾聽)의 중요성을 상기한다.
우리가 서로 하는 말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 위에서 오고 가는 편도 열차 같다. 다시 한번/손월언의 <다시 한번>이라는 시에 나오는 것처럼, ‘말은 (…) 사물의 정체와 관계에 상처를 입힌 뒤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런 말들이 잘 오고 가게 하려면, 나는 ‘S-L-L’ 즉, Stop(멈추어라), Look(보아라), Listen(들어라)의 세 가지 원칙을 따를 것을 제안한다.
▪ Stop: 말하기 전에 잠깐 멈추어서 생각을 정리한 후에 말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자신의 말이 논리적이고 줄거리가 잘 구성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가끔씩 상대의 말의 요점이 정리되지 않는 말을 듣기는 얼마나 힘든지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둘째는 혹시 내가 이 말을 해서 말을 듣는 어떤 누가 상처를 입지 않을까, 즉 역지사지라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일단 말을 뱉아 내면 주워담을 수 없고,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기분 나쁜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Look: 상대의 눈을 바라보면서 대화를 하여야 하고 상대가 말을 할 때는 또한 그의 눈을 바라봄으로써 관심을 표명한다.
▪ Listen: 대화의 내용을 정확히 잘 듣고 파악하여 대응해 나가라는 것이다. 대화에서 말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상담 교사는 찾아온 학생의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끝까지 잘 들어주는 교사라고 한다.
그리고 카네기도 대화의 ‘1.2.3 법칙’을 말하고 있다. 이것도 ‘하고 싶은 말은 1분하고, 상대방 말은 2분 이상 들어 주며, 이 때 단순히 듣지만 말고, 들으면서 맞장구를 치는데 3분을 사용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1번 말하고, 2번 듣고, 3번 맞장구치라는 말이다. 이 두 가지 법칙에 충실하면 '상대가 나를 이해하여 준다'고 생각하게 되며 신뢰를 쌓게 될 것이다. ‘聖人’이라는 한문 글자를 풀면, 귀 이(耳)자가 먼저 오고, 그 뒤에 입 구(口)자와 임금 왕(王)자가 합해진 글자이다. 그 뜻은, 먼저 듣고(耳), 말하기를(口) 가장 잘하는 사람(王)이 성인이란 말이다. 즉, 남의 말을 잘 듣는 ‘경청 맨’이 ‘성인(聖人)'인 것이다. 그리고 탈무드에도 ‘인간은 입이 하나인데 귀가 둘이 있다’라고 쓰여 있다. 이는 “말하기보다는 듣기를 두 배 더 하라!"는 뜻일 것이다. 즉, 최고의 대화술이 듣는 것이다. 남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 전에는 절대 말을 자르지 않고, 가능하면 상대방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리고 경청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스티브 잡스다. 그는 한 때 애플에서 쫓겨났다가 복귀했다. 복귀한 후 첫 일성으로 잡스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앞으로 나를 CLO(Chief Listening Officer, 최고 경청자)라고 불러 달라.” 과거에는 자신을 꽉 채우고 있어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자신을 비우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실제로 복귀 후 잡스는 이러한 리더십 전환으로 아이팟과 아이폰, 아이패드 등 최고의 혁신 제품들을 잇따라 히트시켰다. 여전히 자신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냈지만, 또 다시 애플에서 쫓겨나지는 않았다. 너무 강한 잡스는 중도에 부러졌지만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한 잡스는 죽음이 그를 데려갈 때까지 끝까지 부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귀 기울여 듣기의 능력은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몰아'의 상태로 경청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생산하며, 자기 자신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경청은 마치 술에 취한 듯 허정하게 듣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허정 하게'라는 말을 쓰는구나! "치허극 수정독(致虛極, 守靜篤)"(노자 <도덕경> 제16장)에서 따온 말이 아닐까? 이 말은 '허함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히 한다.' 아니면 "비움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 지키기를 도탑케 하라!'는 뜻이다. '비움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면 고요함이 도타워지며, 고요함 지키기를 도탑게 하면 비움이 지극해진다'는 상보적인 의미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술에 취했을 때가 '허정'이 된다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걱정이 없어지고, 간이 부어 용감해진다. 그래서 '술에 취한다'는 것은 비우는 것일 수 있다. 그냥 쉽게 비워지지 않으니까, 술을 마시고 비우는 것이 아닐까? '몰아'가 된다.
경청/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 |
▲ 박한표 교수 |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 미디어시시비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