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세종포럼 특별세미나] 동양평화론을 현재에 되살리는 길

세미나 / 김영호 기자 / 2020-07-10 11:47:45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주제발표문 전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1. 동아시아는 분쟁 중

현재 동아시아는 분쟁 중이다. 1945년 이전의 분쟁은 주로 일본 한 나라가 공격하고 나머지 대다수 국가들이 방어하거나 저항하는 형태였다면 지금의 분쟁은 중국과 일본이 각각 패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중층적 구조를 띈다. 또한 이는 무력분쟁일뿐만 아니라 역사적 주권(Historical Rights)을 둘러싼 분쟁이라는 구조를 띈다. 한 세기 전에 동양평화론을 제기했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현재에 되살림으로써 이런 패권 추구의 경향에서 평화 추구의 경향으로 방향 전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본다.


2. 패권 추구하는 중국

2020년 현재 동아시아 정세는 불안하다. 먼저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고 있다. 《빈과일보》 등의 대만언론에 따르면 미국 의회는 최근 환태평양 군사훈련에 대만군을 초청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미국은 2021 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 초안을 찬반 25대 2로 통과시키면서 미국과 대만 관계의 기본조약인 ‘대만관계법’과 ‘6항 보증’의 내용을 재확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국방수권법 초안은 비평화적 방식으로 대만의 앞날을 결정하려는 시도는 어떠한 것이라도 서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고 미국은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미국이 7월 3일 해군 항공모함 니미츠호(CVN-68)와 로널드 레이건호(CVN-76)를 남중국해로 파견했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남중국해의 파르셀군도에서 5일까지 군사훈련을 진행하자 미국은 두 항모와 4척의 전투함을 파견해 ‘공격역량을 높이기 위한 훈련’을 포함한 대규모 군사훈련에 나섰다는 것이다. 파르셀군도는 1974년 중국이 점령한 이후 베트남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지역이다. 조지 위코프 제5항모타격단장(로널드 레이건호)은 월스트리트저널에 “이번 훈련의 목적은 우리의 동맹과 파트너들에게 우리가 지역의 안보와 안정에 전념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일국양제를 사실상 포기하는 홍콩보안법을 강행하는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중국의 행태는 이른바 구단선(九段線, Nine Dash Line)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단선은 중국이 남중국해 해역과 해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남중국해 주변을 따라 그은 9개의 해양 선으로 그 안쪽은 남중국해 전체의 90%를 차지하는데, 필리핀,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여러 국가의 배타적 경제수역(EEZ)과 겹치고 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본부를 둔 국제상설재판소는 2018년 “중국은 남해 구단선에 대한 역사적 권리(historic rignts)를 주장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존 커비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통해 “이번판결은 최종적이고 중국과 필리핀 모두에 구속력이 있는 것”이라며 “양국 모두 의무를 준수하길 희망하고 기대한다”고 밝혔지만, 시진핑 국가주석은 “남중국해 도서는 예로부터 중국의 영토”라면서 “중국의 남중국해 영토주권과 해양권익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필리핀이 제기한 중재판결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중국은 구단선이 1953년에 확정된 것이므로 1994년에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이 PCA 판결의 근거가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유엔해양법협약이 발효되기 전에 중국이 구단선 안쪽 해역을 지배했다는 뜻이다. 중국은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이곳에 인공섬을 조성해 군사시설화하고 인접 국가 어민들의 조업을 단속해왔는데, PCA는 “중국이 인공섬을 건설하고 필리핀의 석유 탐사와 어로 행위를 방해하는 등 EEZ에서 필리핀이 정당하게 주권 행사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판시하고, 또 “중국이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南沙)군도·필리핀명 칼라얀 군도)와 미스치프 암초에 대한 EEZ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중국 외교부는 판결 직후 공식 홈페이지에 게재한 성명을 통해 “해당 판결은 무효이고 법적 구속력도 없다. 중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반발했다. 중국 외교부는 판결 결과 발표를 앞둔 정례브리핑에서 “필리핀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기한 소위 불법적인 중재판결"이라면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재확인한 바있다. 중국은 그간 7개의 산호초 등을 인공(人工) 유인 섬(有人島)으로 만들고 해군 부두와 공군비행장을 구축하고 해군 함정, 공군 군용기와 해양경찰을 배치하면서 12마일 영해가 아닌, 200마일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관할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미국은 이들 도서의 12마일 이내로 미 해군 함정들을 통과(transit)시키면서 이는 국제법에 따라 보장된 항행의 자유 권리를 행사하는 ‘항행의 자유작전(FONOP)’라고 명명하면서 일종의 국제법 ‘검증행위’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현재 국제법도 무시하면서 자국만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현재 중국이 동아시아 평화와 안정의 큰 저해세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3. 과거로 회귀하는 아베 내각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는 2020년 1월의 신년사에서 국가 개혁의 포부를 밝히면서 “그 선두에 헌법개정이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평화헌법이라 불리는 〈일본국헌법〉 제9조의 개정을 뜻하는 것이다. 패전 후 만들어진 〈일본국헌법〉의 전문의 ‘3대 원칙’에는 ‘평화주의’가 들어가 있는데 그 9조가 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국헌법 전문〉에는 “정부의 행위에 의하여 또 다시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함을 결의하며, 여기에 주권이 국민에 있음을 선언하여 이 헌법을 확정한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이를 보장하는 그 9조는 다음과 같다.

“①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한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전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육해공군과 그 기타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원문과 영문은 다음과 같다.
第9条 日本国民は、正義と秩序を基調とする国際平和を誠実に希求し、国権の発動たる戦争と、武力による威嚇又は武力の行使は、国際紛争を解決する手段としては、永久にこれを放棄する。2.前項の目的を達するため、陸海空軍その他の戦力は、これを保持しない。国の交戦権は、これを認めない. RENUNCIATION OF WAR Article 9. Aspiring sincerely to an international peace based on justice and order, the Japanese people forever renounce war as a sovereign right of the nation and the threat or use of force as means of settling international disputes. In order to accomplish the aim of the preceding paragraph, land, sea, and air forces, as well as other war potential, will never be maintained. The right of belligerency of the state will not be recognized.(英文:日本法令外国語訳データベースシステム)


아베는 이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해서 일본이 합헌적으로 군대를 보유하겠다는 것이다. 2014년 7월 1일 아베 신조 내각은 이 헌법 9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리는 결의안인 ‘집단적 자기 방위’를 채택했는데, 이는 “일본에 대한 무력 공격뿐만 아니라 일본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에 대한 공격의 경우와 그러한 공격의 심각한 위협이 있는 경우에도 자위대를 사용할 수 있다”고 결의했다. 일본에 대한 무력 공격뿐만 아니라 “일본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에 대한 공격의 경우”에도 군사개입을 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에 대한민국이 포함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는 표면적으로 보면 한국이 외국의 공격을 받을 경우 일본 자위대가 한국을 돕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일본 우파들이 사용하는 용어는 그 이면의 뜻이 따로 있다.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 이후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馬關條約)〉의 제1조는 “중국은 조선국이 독립자주국가임을 확인하고 조선의 중국에 대한 조공, 봉헌, 전례 등은 영구히 폐지한다” 라는 것이었다. 이 조항으로 보면 마치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독립시켜주기 위해서 청일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제2조가 “요동반도, 대만, 팽호 열도 등”을 청국이 일본에 할양한다는 것이었다. 즉, 일본으로서는 요동반도, 대만, 팽호열도를 차지한 것보다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떼어내어 자신들이 차지할 발판으로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는 뜻이다.
아베 내각이 이 평화헌법 제9조를 개정해서 합헌적으로 자위대를 보유하고, 자국이 공격받을 때뿐만 아니라 “일본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 즉 한국에도 파병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베의 이런 논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는 19세기 말 일본 극우세력들이 만든 개념인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의 21세기 판에 불과한 것이었다. 주권선은 일본을 뜻하고 이익선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지키거나 차지해야 하는 선을 뜻하는데, 19세기 말에 등장한 것이었다. 
아베는 19세기 말 일본 극우세력들의 논리인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을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인데, 이는 일본 우익들이 과거 침략전쟁에서 어떠한 역사적 교훈도 얻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자 중국과 일본의 이런 현상은 동아시아 정세가 청일전쟁 이전으로 회귀했음을 의미한다.

4. 안중근의 노선 전환

구한말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일단의 유학자들이 망국에 이르게 된 원인을 깊게 천착했다. 그 결과 두 흐름이 나타났다. 하나는 유학의 중화 사대주의 때문에 나라가 망국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인식한 유학자들로서 대종교를 창시하는 홍남 나철(나인영)이나 무원 김교헌 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들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사대주의에 물든 사고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단군을 민족 공통의 시조로 모시는 단군교(대종교)를 창시했다.

다른 하나는 서구의 학문을 배우자는 것으로서 일본의 개화노선을 본받아 대한제국을 부강하게 만들려고 시도했다. 나철 등이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조야 지식인들에게 ‘동양평화’를 주창한 것은 이런 흐름이 을사늑약 직전까지도 계속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안중근도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했다. 안중근은 여순감옥에서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에서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현감을 지냈고, 부친 6형제 모두 문한(文翰)이 넉넉했으며, 자신도 어린 시절 한문학교(漢文學校)에 들어가 공부했다.
고 회고한 것처럼 유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 안태훈(安泰勳)은 진사 벼슬을 한 유학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 역시 서구의 사상과 학문을 배워 나라를 되살리자는 결단이었다. 안태훈은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빼앗은 곡식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민씨 척족정권의 세도가 민영준(閔泳駿) 민영준은 뒤에 泳徽로 개명하는데, 1910년 한일합방공로작 때 자작의 지위를 받는 찬알파다. 
의 압력을 거절했다가 체포될 위험이 있자 프랑스 사람의 천주교당(天主敎堂)으로 도피하는데, 안중근은 부친이 “이때 교당 안에서 오래 머물며 강론도 많이 듣고 성서(聖書)도 널리 읽어 진리를 깨닫고 몸을 허락해 입교했다” 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 안중근도 천주교에 입교했는데 그의 모친의 이름이 조(趙)마리아일 정도로 천주교는 유교를 대신해 집안의 종교가 되었으며 안중근도 홍석구(洪錫九:J Wilhelm) 신부로부터 프랑스 어를 배우기도 했다. 안중근은 상해에서 곽(郭:Le Gac)신부를 만나 “교육을 발달시키라”는 권고를 받고 1906년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를 세우고 청년들을 교육시켰다.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였으니 안중근 역시 서구 학문을 배워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런 안중근을 무장투쟁에 나서게 만든 것은 일본의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천신이었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이 ‘독립자주국가’라고 규정해놓고도 러일전쟁 이후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으려 했다. 이토는 1905년 11월 9일 고종을 만나 일왕의 친서를 제시했는데, 일왕의 친서는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사를 특파하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一從)해서 조치하소서”라는 것으로서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늑약 체결을 요구한 것이다. 
외교권을 빼앗긴 고종이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자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그래서 안중근은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북간도로 망명했다가 다시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안중근은 각 지방을 돌며 한국인들에게 시국 연설을 하는데, “그런즉 오늘 국내 국외를 물론하고 한국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총을 메고 칼을 차고 일제히 의거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국계몽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 아니었다. 애국계몽운동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고 무장투쟁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무장투쟁 주장은 무모한 것만도 아니었다. 안중근은 “더구나 일본은 아라사와 청국과 미국 등 3국과 더불어 개전하게 될 것이라 그것이 한국의 큰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때에 있어서 한국인이 만일 아무런 예비가 없다면 설사 일본이 져도 한국은 다시 다른 도둑의 손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라고 간파했다. 시기는 조금 뒤였지만 일본은 이후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개전해 멸망에 이르게 된다. 안중근은 일제가 다른 제국들과 전쟁을 일으킬 때를 이용해 무장투쟁을 전개하면 독립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1943년 미국·영국·중국 등 3개국 정상이 만난 카이로회담에서 일제 패망 후 한국의 독립문제가 논의되고 1945년의 포츠담 선언에서 이것이 재차 확인된 것은 일제 강점기간 내내 끊이지 않았던 항일 무장투쟁의 결과물이었다는 점에서 안중근의 혜안이 돋보인다.
안중근은 실제로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는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과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와 접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다. 안중근은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재판과정에서 “나는 개인으로 남을 죽인 범죄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의무로 소임을 띄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 습격한 뒤에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라고 말했다. 안중근은 일제와 전쟁을 벌이다 포로가 된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이라는 뜻이다. 안중근이 애국계몽운동에서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한 상황에 걸맞는 방향전환이었다.

5. 이토 저격과 동양평화론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토 정치의 특징은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성이었다. 이토는 마치 자신이 한국 병합, 즉 강점을 반대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으나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小松綠)의 《조선 병합의 이면朝鮮倂合之裏面》에 따르면 이토는 1909년 4월 총리대신 가쓰라, 외무대신 고무라와 3자 회합에서 한국을 병합하는 것에 이의가 없다고 동의했다. 이에 따라 일본 각의는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켜 한국 점령을 기정사실화했고, 이를 기초로 〈대한시설대강(對韓施設大綱)〉을 확정하고 구체적 점령 작업에 들어갔다. 

이토는 그해 10월 러시아 방문길에 올라 러일전쟁 격전지였던 여순의 203고지를 둘러보고 ‘1만 8,000명의 뼈를 묻고 있는 산’ 운운하는 시로써 일본 근대사의 감회를 토로하고 장춘을 거쳐 하얼빈으로 향했다가 대한국의용군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 안중근에게 저결 사살된 것이었다. 일제는 총 15명을 기소했는데, 이때만 해도 한국은 일제에 강점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일제는 외국인에 대한 불법적 영사재판권을 실시하여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에게 사형, 우덕술에게 징역 2년, 조도선·劉東夏에게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했다
이토 사살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던졌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이토의 죄상 15항목을 제시했는데 각 항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罪狀) 15항목

.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에 대하여 매우 불리하게 한 일

. 190712개조 조약을 체결하여 모두 한국에 대하여 군사상 대단히 불리하게 한 일

.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일

. 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 일

. 불평등 조약의 체결에 대하여 분기한 한국인 의병 등 양민을 살해한 일

. 한국의 정치, 기타의 권리를 약탈한 일

. 한국 학교에서 사용한 좋은 교과서를 폐기처분한 일

. 한국 인민에게 신문의 구독을 금한 일

. 화폐개혁과 제일은행권(第一銀行券)을 발행한 일

. 3백만원의 국채를 모집하고 한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토지를 수탈하기 위하여 사용한 일

. 동양평화를 교란시킨 일

. 한국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보호의 이름을 빌어 한국 정부의 일부 인사와 의사를 통하여 한국에 불리한 시정을 펼친 일

. 일본 효명선제(孝明先帝)를 살해한 일

. 한국민이 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황제나 기타 세계 각국에 대하여 한국은 무사하다고 속이고 기만한 일

 

 

여기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동양평화를 교란시켰다고 주장했다.

안중근은 재판장 마나베(眞鍋十藏)에게 사형 선고를 받은 직후인 1910년 2월 17일, “나는 지금 옥중에서 《동양정책(東洋政策)》과 《전기(傳記)》를 쓰고 있는데, 이를 완성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안중근은 자서전 《안응칠역사》에서 전옥(典獄) 쿠리하라(栗原貞吉)를 통해 고등법원장 히라이시(平石)를 만나 “만일 허가될 수 있다면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1책을 저술하고 싶으니 사형집행 날짜를 한달 남짓 늦추어 줄 수 있겠는가”라고 요청했다.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은 “어찌 한달 뿐이겠는가.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고, 이를 사실로 믿은 안중근은 공소권 청구를 포기하고 동양평화론 집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는 안중근으로부터 공소권 청구를 포기하게 하려는 일제의 사기에 불과했다. 전옥(典獄) 쿠리하라(栗原貞吉)는 조선통감부 경시(警視) 사카이(境喜明)에게 보낸 서한에서 “본인(안중근)은 철저히 《동양평화론》의 완성을 원하고, ‘사후에 빛을 볼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전 논문의 서술을 이유로 사형의 집행을 15일 정도 연기될 수 있도록 탄원했으나 허가되지 않을 것 같아 결국 《동양평화론》의 완성은 바라기 어려울 것 같다”고 전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① 서문(序文) ② 전감(前鑑) ③ 현상 ④ 복선(伏線) ⑤ 문답의 순서로 집필될 예정이었으나 전감 집필 와중인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됨으로써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제는 안중근의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극비에 부쳐 친족에게도 전하지 않았으나 1969년 한국국제연구원 최서면(崔書勉) 원장이 1969년 동경 고서점에서 《안중근 자서전(安重根自敍傳)》이라 표제된 일역본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공개되었고, 1979년 재일(在日) 김정명(金正明) 교수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연구실 《칠조청미(七條淸美)》 문서 중에서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와 《동양평화론》의 등사본을 합책한 것을 발굴하면서 보다 자세히 전해졌다. 《안응칠 역사》와 미완성의 《동양평화론》에는 안중근의 동양평화에 대한 사상이 드러나는데 이책에서 안중근은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15가지 이유 중에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를 14번째로 들고 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의 서문에서 “일본이 러시아와 개전할 때 인본천황의 선전포고하는 글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했으나 종전 후 이 약속을 어기고 한국의 국권을 빼앗고 만주 장춘(長春) 이남을 조차(租借)를 빙자해 점거했다고 비판했다. 


안중근은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돌려주고 청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버리는 것이 동양평화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의 핵심은 한·중·일 세 나라가 각기 독립국을 이룬 대등한 상태에서 서로 일심협력해서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하고, 한·중·일 세 나라가 서로 협력해 나가면서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힘써 나가자는 것이다.

6. 동양평화론을 현재에 되살리는 길

현재 동북아가 다시 분쟁에 빠진 핵심 이유는 중국과 일본이 패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동북아, 동남아 할 것 없이 전방위적인 패권추구에 나서고 있고, 일본도 평화헌법 9조의 개정을 통한 패권추구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양국의 이런 패권추구는 모두 잘못된 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본은 메이지시대 정한론을 필두로 한 침략사관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반도사관, 만선사관의 재연이 가능할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자위대를 합헌적 군대로 만들면 그 힘을 과시하는 첫 단추는 독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양해를 얻어 독도를 강점한 후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는 전략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간 일본 우익들은 한국의 많은 친일학자들에게 돈을 대 주고 “독도는 일본 것”이라는 논문과 글을 쓰게 했다.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에 그간 한국학자들이 쓴 “독도는 일본 것”이라는 논문 등을 증거자료로 제시하면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수많은 1차사료보다 이들 매국 친일파들이 쓴 2차사료들이 더 유력한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이 크다. 남한의 매국 친일학자들이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근본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중국의 패권추구가 과거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침략사관을 바탕으로 행해진다는 점이다. 과거 일제에 의해 고통당했던 과거를 잊고 일제가 만든 침략사관을 바탕으로 동북공정을 비롯한 각종 역사공정을 수행하고, 이를 패권추구의 논리로 사용하거나 구단선 등 이를 본떠서 만든 어설픈 이론을 가지고 패권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한국의 역사학계가 아직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중국의 동북공정을 지지하고, 일본 극우파의 역사침략에 동조하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가야특별전인 ‘가야본성’을 전시하면서 그 연표에 일본 극우파들이 임나일본부 설치 근거로 제시한 369년조에 야마토왜가 가야를 공격했다는 《일본서기》 기사를 그대로 서술한 점에서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권 때의 《국정교과서》와 바를 바 없는 《검인정교과서》의 사용은 물론 끝까지 독도를 삭제한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역사지도》 재발간 시도 등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상황은 안중근 의사가 거사하고 동양평화론을 제기할 당시 일진회 등이 나서서 한국병합을 주장한 사실과 본질적으로 같다. 결국 동양평화를 거스르는 핵심은 중국과 일본의 패권주의인데, 이런 패권주의가 잘못된 역사관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역사관의 가장 큰 문제는 중국, 일본 패권주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한국 내 식민사학자들이 아직도 침략사관을 마치 정설인 것처럼 용인하는 행태인 것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현재에 실현하는 길은 중국, 일본, 한국이 사료에 입각한 올바른 역사를 확립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현재 각 나라가 갖고 있는 영역에 대한 권리(Territorial rights)는 아닐지라도 역사적 권리(Historical rights)까지만 인정된다고 할지라도 동아시아 평화는 달성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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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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