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책] 『시학 개념의 새로운 이해』-박현수

문화·예술 / 이영 기자 / 2024-06-29 19:24:18
-시인이자 시학 이론 전문가인 박현수 경북대 교수(국어국문학과)의 20번째 저서
- 시에서는 사건이나 인물이 구체적이지 않은 ‘범맥락화’는 어떤 경우에도 적용 가능한 보편화된 상태로 변화시키는 방식을 가리킨다.
-시에서 ‘현재시제’를 주로 사용하는 이유는 시적 상황을 일상적이고 무의미한 상태에서 무시간적이고 영원하고 숭고한 상태로 승화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데 적절하기 때문이다

 

 

 시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한 번쯤, 시에서는 왜 사건이나 인물이 구체적이지 않을까, 시에서는 왜 주로 현재시제만을 사용할까, 시에 나오는 는 왜 독자와 쉽게 동일시되는 걸까 등의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시에 관한 일반적인 질문일 수 있지만, 쉽게 답할 수 없는, 상당히 까다로운 물음들이다.

 

 시인이자 시학 이론 전문가인 박현수 경북대 교수(국어국문학과)가 이런 일반적이지만, 시학의 핵심을 겨냥하고 있는 근원적인 질문에 명쾌하게 답을 내놓고 있다. ‘시학 개념의 새로운 이해’(울력출판사)가 그것이다.

 

 저자는 199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세한도로 등단한 시인이다. 하지만 시인인 그도 이런 질문에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학 연구자로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었는데, 이 책은 시학 연구자로서 그가 이뤄낸 시학 연구의 결과물이다. 이 책은 전문적인 지식을 다루고 있지만, 결코 어렵지 않다. 전문적인 용어를 잘 설명하고 있으며, 차근차근 시의 심연으로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시의 비밀을 알아 가는 희열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시에서는 왜 사건이나 인물이 구체적이지 않을까?

 

 이 책은 먼저 이 질문부터 다룬다. 저자는 구체적인 지명과 풍경, 그리고 시인의 경험을 다루고 있는 듯한, 서안나 시인의 애월 혹은이라는 작품을 예로 들고 있다.

 

 애월(涯月)에선 취한 밤도 문장이다 팽나무 아래서 당신과 백년 동안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서쪽을 보는 당신의 먼 눈(.)”

 

 애월은 제주도 서쪽에 있는 아름다운 해변 마을, 특히 한담해변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애월바닷가라는 사실조차 유추하기 어렵다. 그뿐 아니라 당신의 정체도 알기 어렵다. 그리고 라는 시적 화자가 당신과 함께 있는지 아니면 홀로 당신과 관련된 옛날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애월어느 바닷가 마을, ‘팽나무를 그냥 나무로 바꾸거나, 심지어 서쪽동쪽으로 바꾼다 해도 시의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시적 상황이 외적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돼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외적 맥락과 무관한 이런 발화 방식은 시에서는 아주 일반적이지만, 일상대화에서는 전혀 이뤄질 수 없는, 오히려 대화를 망칠 수 있는, 금기시되는 발화 방식이다. 저자는 시의 이런 특성을 범맥락화(pan-contextualization)’라고 부른다. 이것은 시 속의 사건이나 인물, 시공간 등의 시적 상황을 구체적인 맥락으로부터 떼어내어, 탈맥락화해 어떤 경우에도 적용 가능한 보편화된 상태로 변화시키는 방식을 가리킨다. 시는 이런 범맥락화를 시의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사용하고 있기에, 시의 내용이 구체성을 잃은 듯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는 그런 범맥락화 상태에 도달할 때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에서는 왜 현재시제를 주로 사용할까?

 

 이 책의 두 번째 질문, 즉 시는 왜 현재시제만을 주로 사용할까에 대해서 저자는 실증적인 조사를 통해 풀어 나간다. 저자는 시에서 사용되는 현재시제를 서정시제라 부르며, 시인 97명의 시 700여 편을 실은 시선집을 분석해 전체 시의 95.3%가 현재시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런 서정시제로 인해 무시간성, 숭고성 같은 시간 감각을 초월한 시적 분위기를 만드는 효과가 나타난다고 본다. 시적 상황을 일상적이고 무의미한 상태에서 무시간적이고 영원하고 숭고한 상태로 승화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데 현재형이 적절하기에 현재시제가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세 번째 질문, 시적 화자와 독자의 일치감, 즉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시적 화자 에게 손쉽게 자신을 이입하게 되는 현상에 대한 의문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범맥락성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시적 시공간과 사건, 인물 등에 어떠한 현실적인 정보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즉 범맥락화돼 있기 때문에 시적 화자 역시 어떤 구체적인 특수성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적용 가능한 보편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텅 빈 주체라고 부른다. 시적 화자가 이렇게 제한적인 특수성으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독자는 시 속의 와 자신을 쉽게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앞의 질문은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시의 범맥락화와 현재시제, 텅 빈 주체가 발생하게 된 더 근원적인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는 순환논법의 오류에 빠질 뿐이다. 저자는 그 근원적인 특성을 가상적 연행성에서 찾는다. 이것은 시 내용의 기준 시점을 시가 공연될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삼는 시적 규범(혹은 관례)’을 말한다. 즉 시는 노래에서 왔으며, 그래서 시는 노래가 지닌 연행성(공연성), 즉 청중(타인이나 자기 자신)을 앞에 두고 노래하는 상황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장르적 DNA를 갖고 있다. 그래서 공연할 때의 상황이 창작의 모든 요소를 제어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노래와 결별한 현대시 역시 그 특성을 DNA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연행성(공연성)이 실제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가상적으로 그 연행성을 시의 규범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가상적 연행성 때문에 앞에서 다룬 특성들이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이런 시적 특성은 현재 노래 가사에서도 여전히 공유되고 있는 특성이다. 김광석의 다음 노래 가사를 보자.

 

 이렇게 홀로 누워 천정을 보니/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잊으려 돌아누운 내 눈가에/말없이 흐르는 이슬방울들”(김광석,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노랫말은 연인(‘’)과 이별한 후 화자가 느끼는 그리움과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리듬감(3음보 율격)이 있으며, 현재시제를 사용하고 있고, ‘의 구체적인 신분이나 상황을 알 수 없다는 특성이 모두 나타난다. 그런데 작사가가 이별의 아픔을 즉석에서 토로하는 것처럼 현재형(‘천정을 보니’)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것은 불가능하다. 슬픔에 빠진 사람이 일정한 형식에 맞춰 발화를 미적으로 조율하는 일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창작의 일반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작사가는 연인과 이별한 경험을 회상하거나 있을 법한 상황을 가정해 책상 앞에 앉아 퇴고를 거듭하며 이 노랫말을 썼을 것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노래(혹은 시) 창작의 목적이 공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작의 구체적인 상황은 미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개념으로 시의 대부분의 형식적 특성을 해명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이외에도 리듬, 서정적 동일시(서정성), 이미지, 비유, 숭고의 문제도 다루며, 시가 지닌 특성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형식적인 특성을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내용적인 특성을 다루고 있다. 전반부의 특성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적 특성이 가상적 연행성이라면, 후반부를 장악하고 있는 특성은 초월 감각이다. 시는 바로 이 두 가지 특성의 정밀한 교직(交織)으로 이뤄지는 훌륭한 직물, 텍스트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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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 문화예술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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