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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조·한전쟁의 발생 위치와 한사군 설치 [자료] 지도제 위에 필자가 그림 |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고조선 세력이 날로 강대해져 흉노와 연합할 경우 중원을 위협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서』열전 위현전에서는 한애제(哀帝)에 이르러 선황들의 제사를 단촐히 하는 것에 대해 논하게 되는데, 여기서 한무제에 대한 제사 폐기가 논의선상에 올랐다. 여기서 태복 왕순 등은 한무제의 공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동쪽으로는 조선을 정벌해 현토와 낙랑을 일으켜서 흉노의 왼쪽 팔(左臂)을 잘라냈다.”고 하며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한전쟁의 전개에 대해서는 『사기』 조선열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왕 위만은 북경 인근의 요동태수와 약속하기를 외신이 되어 요새 바깥의 만이들을 보호하고, 만이의 군장들이 천자와 만나기를 원하면 이를 막지 않기로 했다. 이에 따라 위만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활용하여 주위의 여러 세력들을 항복시켰고, 진번과 임둔까지 장악하여 그 땅이 수천리에 이르게 되었다.
위만의 손자 우거에 이르러 고조선은 그 세력을 더욱 확대하였고, 여러 세력들이 한과 통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에서는 섭하를 보내 외교적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고조선에서는 비왕을 죽인 섭하를 습격하여 죽여 버렸다. 그러자 한무제는 누선장군 양복에게 5만의 수군을 지휘해 제나라에서 발해를 건너 조선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육지에서는 좌장군 순체로 하여금 요동에서 공격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한군은 상호 협력하지 않고 서로 공을 다투었고, 요동에서 출발한 육군이 먼저 조선에 진격했다가 패하여 공격 장수는 참수당하고 수많은 군대를 잃었다. 거기다 누선장군은 제나라 군사 7천여명을 이끌고 왕검성을 공격하려다 역습을 받아 대패하여 인근 산속에서 열흘을 헤매야만 했다.
조·한전쟁에서 한나라군은 조선을 점령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서』본기 무제기에는 “누선장군 양복은 병사들을 많이 잃어 버려 면직되어 서인이 됐고, 좌장군 순체는 (양복과) 공을 다툰 죄로 기시되었다.”고 했다. 조선은 한나라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인해 멸망했다. 한에서는 고조선 지역에 낙랑군, 임둔군, 현도군, 진번군을 설치했다고 했다. 그런데 낙랑은 원래 연나라에 공격당하기 이전에 하북성 보정시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낙랑의 위치가 고조선의 위치 이동에 따라 같이 이동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에서 고조선과 낙랑을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낙랑의 위치에 대한 비정은 크게 세 가지 이견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는 수성현은 황해도 북단의 수안으로 비정된다는 주장이다. 이병도 씨는 『한국고대사연구』(1976) 낙랑군고에서 낙랑군은 그 수부(首府)의 이름이 조선현이고, 일제 강점기에 낙랑시대의 유적 유물이 많이 발견된 점을 들어 평양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으로 비정했다. 그런데 이병도 씨의 주장대로라면 수륙 양면 공격전에서 육군이 먼저 도착해 패했다는 『사기』의 기록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다. 더구나 평양은 수륙 양면 공격이 불가능하다. 육군이 평양까지 도착하려면 몇 달이 걸릴 것이고, 수군은 3~4일 내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러한 군사작전은 존재할 수 없다.
둘째, 낙랑이 북경 동쪽 난하 입구의 진황도(秦皇岛) 인근을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이는 진황도에 갈석산이 있고, 수성현이라는 지명이 존재하며, 장성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주장은 한나라의 고조선 공격시 이동된 낙랑을 가리킨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영토를 확장하면 지명도 확장시켰다. 따라서 진황도의 갈석산은 확장된 지명이다.
셋째는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遂城鎭) 해촌(解村)의 장성 유지를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서경』에 나타난 우임금의 구주치수도인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禹貢所載隨山濬川之圖)’에 따르면 갈석산은 맨 우측 상단에 조이(鳥夷)와 함께 기주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주 지역은 황하로 둘러 쌓여 있고, 태행산맥(太行山脈)이 동서로 지역을 나누고 있는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기』 하본기와 화식열전, 그리고 『한서』 지리지에는 갈석산의 위치를 태행산맥과 항산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갈석산이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전국 시기 무수(武遂)현이었다. 수많은 사료들이 보정시 인근의 수성진이 원래의 낙랑 수성현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조선은 연나라 진개의 공격으로 요동 밖으로 이동한 이후 새로운 세력을 형성했다가 한의 공격에 의해 내분이 일어나 멸망했다. 낙랑은 곧 고조선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낙랑이 이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낙랑의 남쪽에는 대방이 위치하고 있었다.
-시리즈 18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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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朴東) 박사 |
[필자소개]
-박동(朴東) 박사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정치학박사, 정치경제학 전공)를 졸업하고 참여정부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정책연구실장,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정책기획국장을 거쳐서 현재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무렵 도라산 통일사업을 하던 분들과 교류를 하다가 도라산의 라(羅)의 유래에 대해 꽂혀서 최근까지 연구했으며, 중국의 운남성 박물관에서 라의 실체에 대해 깊숙이 알게 되었다. 현재 연구 결과를 책자 발간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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