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러브레터와 문자 메시지

사상과 철학 / 안재휘 기자 / 2024-05-20 08:46:41
<272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새로운 소통 기술이 러브레터라는 구식 영역을 점령하면서 그것들은 한때 연애 생활의 본질이던 홀로 있기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젠 너무 느리고 쓰기에도 너무 힘든 러브레터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는 낭만적인 관계라는 것이 함께 있는 시간 못지않게 홀로 있음에 많은 혜택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산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생(生)은 혼자 가는 길이다. 혼자만이 걷고 걸어서 깨달아야만 하

 

 

요즈음은 소셜미디어로 글쓰기가 대세이다. 전통적인 글쓰기에 비해, 소셜북 플랫폼은 독자들이 자유롭게 디지털 텍스트의 여백에 코멘트를 남기고, 거주하는 공동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일종의 살아 있는 영구적 북클럽 같은 곳이다. 읽기와 쓰기가 소셜미디어로 이루어지면서 협업 노력이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책의 여백에 뭔가를 적었지만, 그런 생각들은 책꽂이에 묵힌다. 그러나 디지털 도서의 여백에 쓴 글은 공유될 수 있다는 것이 차이이다.

 

문제는 디지털 텍스트들은 작은 스크린과 이동 중에 잠깐씩 보는 데 적합하도록 축약하고 단순해졌다는 점이다. 소셜 미디어에서의 읽기와 쓰기가 등장함으로써 홀로 읽기와 쓰기의 장점인 관심과 조용한 공감 같은 가치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소설보다 트위터에 가깝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혼자 읽기를 하려면, 스마트폰이 연결되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혼자 읽어야 한다. 그 독서는 우리의 불안과 분주한 일상생활도 지워버린 무아지경 비슷한 진정한 독서가 될 것이다. 그러면 완전히 홀로 있으면서 소설 속 주인공 같은 타인의 삶을 리허설할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테크놀로지는 각자의 렌즈를 우리 눈에 씌운다. 소셜미디어라는 렌즈가 인쇄기라는 렌즈보다 생명력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쨌든 소설의 해결책만큼 행복한 결말은 현실에서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반면, 삶은 트위터의 글처럼 쪼개지고 여러 경로로 흩어진다. 인쇄의 시대나 스크린의 시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리 삶이 우리의 선택에 따라 크게 갈라지는 방식을 잘 묘사할 수 있을까? 어쨌든 현실 생활은 소설보다는 트위터에 올라오는 글에 더 가깝다. 아직은 위에서 했던 질문에 잘 답을 할 수 없다. 어쨌든 읽기와 쓰기가 크게 변하고 있다.

 

타자기나 손으로 편지를 쓰는 이벤트가 있다. 타자기나 손편지는 삭제 기능이 없다. 그리고 쓰기 속도가 느리다. 반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는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칠 수 있다. 하지만 타지기로 쓰는 글은 생각의 속도와 보조가 일치한다. 문자를 보내는 일에 익숙한 참가자들은 실제로 편지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문자를 보내며 서로의 생활에 관계를 맺다 보면, 얼굴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할 기회가 적어진다. 젊은 참가자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글을 써 보낸다는 생각, 답장을 즉각 받지 못한다는 것, 메시지 하나를 보내는 데 한 시간이나 걸린다는 생각은 일종의 농담이고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실제로 타자기로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썼다. "나는 마침내 그녀에게 내 기분을 말할 수 있다", "그는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거야", "드디어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등등.

 

실제로 우리가 서로 보내는 메시지들은 절대 없어지지도 않고 다시 읽어보는 일도 없게 된다. 지금 우리는 문자 보내기의 즉각성과 동시성을 즐기고 있다. 사람들은 음성으로 나누는 소통보다 그쪽을 더 좋아한다. 전달 내용 이외의 다른 요소가 지워진 초연한 형태의 소통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문자 보내기는 털을 다듬어 주고 또 보답으로 자기도 다듬어지기를 끝없이 기대하는, 그것도 금방 다듬어지기를 기대하는 21세기식 시스템이다.

 

데스크톱 컴퓨터에서 모바일 플랫폼으로 이동하면서, 문자의 개수는 많지만 문자의 평균 길이는 짧아졌다. 손으로 쓴 편지의 느긋한 보조는 갈수록 간절해지는 문자의 묶음 수십억 개로 쪼개진다. 에로틱한 문자가 가능해지면서 온전한 문장은 문법에 맞지 않는 제안으로 축소되고, 나중에는 그런 것마저 사라져서, 이모티콘과 사진에 밀려났다.

 

리베카 솔닛의 <<우리는 헤어지고 있어>>를 보면, 옛 시절이 그립다. "나는 사라진 세계에 대해, 네트워크 기술이 나타나기 전에 살았던 방식에 대해 생각한다. 자석에 양쪽 극이 있는 것처럼, 홀로 있기와 공동체적 교류가 존재한다. 새로운 수다는 우리를 양극 사이의 중간 즘에 데려다 놓아, 실제로 연결되는 위험을 무릅쓸 필요 없이 홀로 있음의 공포감을 누그러뜨린다. 그것은 더 깊은 두 구역 사이의 얕은 곳, 자신과 접촉과 타인과의 접촉이라는 위험 사이의 안전지대이다."

 

그런데 지금은 스마트폰에 연결된 문자 메시지의 교환으로 갈망보다는 만족과 맥락을 더 같이하며, 유보된 에로틱한 갈망의 수수께끼보다는 욕구 충족에 더 관심이 많은 '낭만적' 미세 문자와 강박적 감시의 문화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새로운 소통 기술이 러브레터라는 구식 영역을 점령하면서 그것들은 한때 연애 생활의 본질이던 홀로 있기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편지는 더 느리고 더 사려 깊은 작업을 요한다. 편지 쓰기에는 손가락 끝만이 아니라, 손 전체가 개입한다. 편지를 쓸 때와 받을 때 사이의 침묵에 싸인 막간으로 인해 고백이 유보됨으로써 그것은 더욱 귀중해진다. 또 편지는 사람들의 개인 역사를 본인이 소지할 수 있게 한다. 강철 상자에 담긴 서버에 보관되는 문자와는 다르다.

 

문자 보내기는 지루하게 진행되는 진짜 편지, 구두 상자에 간직된 편지, 급히 뜯은 봉투의 울퉁불퉁한 가장자리 등 편지 자체에 배어 있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역사를 대체할 수 없다. 물론 파괴와 망각의 잠재력도 있다. 옛날식 편지는 모닥불에 던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메일과 스마트폰의 삭제 불가능한 세계에서는 양편이 사본을 갖고 있을 수 있다. 사랑의 증거를 없애 버릴 능력은 그것을 보존할 능력만큼 중요하다.

 

사실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보다 손으로 진짜 편지를 쓸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진다. 편지를 쓰는 것은 다른 사람을 가상으로 앞에 불러놓고 내 생각 속에서 홀로 있는 것이다. 실제 손편지를 쓰려면, 우리는 입 밖에 튀어나와 버린 우발성 및 문자 보내기와 이메일의 가벼운 재확인과 수다에서 물러나 사물의 질서 있는 표현으로 이동해야 한다.

 

러브레터는 단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젠 너무 느리고 쓰기에도 너무 힘든 러브레터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는 낭만적인 관계라는 것이 함께 있는 시간 못지않게 홀로 있음에 많은 혜택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손 글씨 편지/서홍관

 

전에는 편지가 있었다.

친구로부터 아버지로부터

연인으로부터 형으로부터.

우표가 붙어 있었고

손으로 쓴 내 이름이 있었고

가슴 설레며 봉투를 열었고

혼자 읽고 싶어 옷 속에 감추고 산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지금은 아파트관리비 청구서, 수도요금 고지서,

백화점 카탈로그, 신용카드 명세서,

구독 신청한 적 없는 잡지와 신문들.

절반은 뜯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나도 손 글씨 편지 보낼 곳이 없다.

 

 

어제 오후는 이런 생각들을 하며, 맨발 걷기를 했다. 행복한 삶이란 대부분 조용한 삶이다. 진정한 기쁨은 오직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생()은 혼자 가는 길이다. 혼자만이 걷고 걸어서 깨달아야만 하는 등산로 같은 것인지 모른다. 히말라야나 에베레스트 정상에 헬리콥터를 타고 간들 아무도 그가 산을 정복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 지금 힘들고, 지쳐도, 무엇보다 자기 앞에 놓인 시간과 싸워서 각자가 가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고독한 길이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86세로 약한 치매를 앓고 있는 큰 누나, 역경을 겪고 행복한 삶을 사는 두 번째 누나 그리고 수녀님 누나 그리고 나이가 같은 조카 등을 만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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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표 교수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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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휘 / 대표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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