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세종포럼] ‘한국 현대문학의 특징적 흐름과 작가의 사명’

세종포럼 / 안재휘 기자 / 2022-04-20 11:44:31
2022세종포럼 인문학 특강-제1차 세미나 발제문
강사 : 안 휘(본명 안재휘):소설가/계간 문학의봄 주필

 

2022세종포럼 인문학 특강

한국 현대문학의 특징적 흐름과 작가의 사명

 

 

 

강사 : 안 휘(본명 안재휘):소설가/계간 문학의봄 주필

 

 

1. 여는 말

-명작 명인 탄생의 비밀

 

2. 현대문학 환경의 특징적 흐름 두 가지

1) 독서 시장의 변화와 굳어진 왜곡 편중 현상

2) 장르의 파괴, 융합

 

3. 작가들의 문제와 해법

1) ‘편견(偏見)’으로부터의 도피

2) 독자들의 변화에 대한 응답

 

4. 맺음말

 

 

 

 

1. 여는 말

-명작 명인 탄생의 비밀

 

백남준(Nam June Paik, 白南準)비디오 아트라는 전혀 새로운 양식의 예술 장르를 개척한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 아티스트였다. 그는 서울에서 섬유업 경영자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의 3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학에서 미술사와 미학, 음악학, 작곡을 공부했으며, 1956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대와 프라이부르크 음악학교, 쾰른대학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했다.

1958년 백남준은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만나 자신의 인생과 예술세계에 일대 전환을 일으켰다. 이듬해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 데뷔작인 존 케이지에 대한 오마주 Homage a John Cage’를 초연하던 중에 바이올린을 내리쳐 부수는 해프닝을 보여주었다. 1960년에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습작 Etude for Pianoforte’를 발표했는데, 이 퍼포먼스에서 그는 2대의 피아노를 파괴하고 관람객의 넥타이와 셔츠를 잘라냈으며, 머리를 샴푸시키는 격렬한 행동주의 양식을 전개했다.

기자가 왜 그런 괴상한 행동을 하느냐고 물었다. 고상한 답변이나, 심오한 이론을 기대했던 기자는 백남준의 답변에 맥이 빠지고 말았다. 심드렁한 목소리로 내뱉은 그의 대답은 이랬다. “그냥 살면, 심심하지 않나요?”

 

많은 작가가 누가 보아도 예술가인 것처럼 외양을 꾸미고 다니면서, 누가 물으면 마치 오묘한 예술관(藝術觀)이라도 있는 것처럼 교묘한 말솜씨를 자랑한다. 소설가를 만나서 작품에 대한 의미를 묻고, 전시회에서 화가에게 진지하게 그림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는 모습을 왕왕 본다. 나는 그런 장면을 맞닥트릴 때마다 실소(失笑)를 금치 못한다. 소위 평론가들이라는 사람들은 형편없는 편견이나 파편적 시각으로 전문용어들을 동원하여 작품을 분석하거나 호평, 또는 혹평을 일삼는다. 우리 예술사에는 그런 전문 비평가들의 혀 놀림에 의해 명성을 얻거나 나락으로 빠진 예술가들이 즐비하다. 설명이 필요한 예술품은 이미 예술품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장르이건 간에 세상에 발표된 작품은 그 스스로 생명력을 이어가거나 아니면 존재가치를 잃고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이미 별도의 운명을 지닌 독립체다. 뭔가 설명이 필요한 작품이라면 그 작품은 이미 실패작이다.

 

인류의 문화는 이제 전자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광속의 발전과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속도는 빠르고, 그 폭 또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넓고 깊다. 특히 현대문학 환경은 두 가지 특징적 흐름을 보여준다. 그 첫 번째는 독서 시장의 붕괴 또는 변질이고, 두 번째가 장르의 파괴 또는 융합현상이다.

작가들은 과연 이런 급변에 잘 대응하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외곬으로 깊어진 편벽된 예술관을 고집하면서 독자들(수용가들)의 소구에 적절한 응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정말 중요한 부분은 미래를 절박하게 준비해야 하는 인류에게 던져진 숙제를 해결하는 데 별반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예술의 혼돈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특히 문학가들은 이제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본 발제에서는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그 해법을 모색해가는 과정을 거치고자 한다.

 

2. 현대문학 환경의 특징적 흐름 두 가지

 

한국 문학계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첫 번째 변화 요인은 대중문화의 변화에 따른 전통 독서 시장의 극적인 변화다. 다음으로는 문화 수용 환경의 변화에 수반되는 장르 파괴 또는 융합 현상이다.

 

1) 독서 시장의 변화와 굳어진 왜곡 편중 현상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 출판계의 통계는 몇 가지 의미 있는 수치를 보여준다.

대형서점 교보문고와 예스24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먼저 지난 2020년도에 사람들의 독서에 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1월부터 11월까지 양사의 도서 판매량은 전년도 동기 대비 각각 23%(예스24), 7.3%(교보문고) 늘었다.

온라인 서점인 예스24에서는 활성화한 비대면 강의로 인해 대학 교재 판매량이 지난해 대비 두 배(100%) 늘었다. 부모의 아이 양육법을 다룬 도서 판매량과 청소년 공부법 분야 도서 판매량이 전년 대비 각각 13.6%, 78.9% 늘었다. 교보문고에서도 초등 학습과 중·고등 학습 분야 도서 판매량이 지난해 대비 각각 31%, 24.2% 증가했으며, 아동 분야 도서와 자녀교육서 판매량은 전년 대비 각각 6.4%, 11.4% 증가했다.

집에서 즐기는 취미 활동에 관한 관심도 커졌다. 예스24에서 취미/일반 분야 도서 판매량은 전년 대비 62.3% 증가, 취미/일반 분야 역대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 외에 가정/원예 분야와 홈인테리어/수납 분야 도서 판매량이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6.2%, 29.8% 늘어났다. 언택트, 인공지능 등 4차 산업 시대 기술의 중요성이 커져서인지 과학 분야 도서 판매량도 급증했다. 예스24에서는 올해 자연과학 및 수학 분야 도서 판매량이 약 563,000권이었다. 이는 최근 3년을 통틀어 가장 많은 판매량이며 지난해 대비 42% 늘어난 수치다. 교보문고에서도 과학 분야 도서 판매량이 29.4% 증가하며 역대 최다 판매량 기록을 갈아치웠다.

코로나19 확산 탓에 집콕 예술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인터넷 서점 예스24는 예술 분야 도서 판매량이 전년 대비 30.4% 증가했다고 29일 발표했다. 예술 분야 도서 판매량 추이를 살펴보면 201811.1%, 20198%, 20201.3%이었다. 30%가 넘는 증가세는 매우 이례적이다. 특히 미술 관련 도서, 피아노 연주 관련 서적의 판매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

 

문학 분야는 어땠을까. 동화 같은 상상으로 현실의 고단함을 달래고자 했을까. 서점가 힐링 판타지 열풍에 2020장르 소설분야 내 판타지도서 판매는 전년 대비 41.4%의 성장률을 나타냈다.

예스24의 판매 분석 결과 한국소설분야 도서 판매량은 3년간 꾸준히 증가해 오다 202040.5%라는 큰 폭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연애·사랑소설분야 도서 판매는 지난해 대비 46.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어린이 문학 분야에서도 어두운 현실 속 희망과 사랑을 그린 창작 동화들이 스테디셀러로 사랑받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고착화한 도서 판매시장의 폐해는 전혀 시정되지 않고 있다. 몇몇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작품에만 쏠리는 소비 패턴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예술이라는 영역이 지닌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매체의 왜곡된 정보나 유행을 좇는 대중의 경향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유명인들의 구매 뉴스에 영향을 받아 여성들이 특정 액세서리를 사서 과시하고 다니는 유행병처럼, 읽지도 않는 유명작가들이 책들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정도의 현상은 바뀌지 않는다. 작품성과는 거리가 먼 그런 행태일지라도 그걸 마구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이 옳을는지, 그렇게라도 작품이 유통되는 현실을 감사히 여기고 웃어넘겨야 하는 건지 헛갈리는 일이긴 하다.

 

 

2) 장르의 파괴, 융합

 

장르 파괴현상은 현대예술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특징이다.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 과학기술까지 섞어내는 미술계의 깊숙한 변화일 것이다. 미술 전시회장에서 놀랍도록 파격적으로 접목된 첨단기술을 만나는 일은 이제 귀한 경험이 아니다. 음악 분야에서도 이종교배 형식의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공연은 이미 흐드러졌다.

문학에도 나타난다. 근년에 우리 한국 문단에도 새로운 창작활동 경향이 나타나면서 길지만, 시적 감흥을 잃지 않는(산문시), 그리고 짧지만 강렬한소설 양식에 대한 꾸준한 실험이 유행한다. 아마도 더 많은 연구와 다양한 시도가 잇따를 것 같은 예감이다. 조금 과장하여 말한다면, 머지않은 날에 시와 소설의 경계조차도 모호해질지 모른다는 느낌마저 드는 요즘이다.

 

이런 현상을 놓고 옳고 그름을 논하거나, 찬반을 말하는 것은 어림없는 접근이다. 이미 현상으로 다가와 있고, 변화무쌍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런 변화를 현실로 인정하고 적응하는 게 맞다. 무조건 따라가면서 흉내를 내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왜 이런 현상이 왔는지 정도는 차분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스피드(Speed)의 변화다.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해보더라도 세상의 속도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아날로그(Analogue)에서 디지털(Digital)로 옮겨가면서 세상이 변했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거기에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변화에 가속도를 붙인 것은 기술의 진화.

변화를 추동하는 두 번째 요인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자본 욕구. 쉽게 말하면 자본주의가 심화하면서 함께 자라난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 또는 배금사상(拜金思想), 개인주의(個人主義)의 만연이다. 이 변화는 단지 문학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예술, 철학계를 비롯한 인문학 전반에 걸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느린 존재보다는 빠른 존재가, 상대적으로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새로운 권력자가 되는 세상으로 급변하면서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새로운 현상(New phenomenon)’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출판시장의 변화 중에도 눈에 띄는 것은 지극히 단세포적이면서도 변화무쌍한 이야기가 담긴 황당한 판타지 장르문학에 대한 유통이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다는 대목이다. 이미 많은 작가가 자신들이 추구해오던 문학세계를 버리고 이 시장변화에 편승했다. ‘팔리는작품을 써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만들어낸 불가피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가난을 멋으로 여기면서 심오한 철학자 흉내를 내면서도 행복한 예술가로 폼잡고 살기에 이미 세상은 극적으로 변했다. 대안도 없으면서, 그런 작가들의 행태를 비난하는 것도 사실상 무의미하다.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대단히 빠르고 광범위한 장르 파괴와 융합 현상은 이미 대세가 돼가고 있다. 이 현상은 거부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그 틈새에서 조금 더 가치로운 예술로 가기 위해서는 문학이 더 짧고, 더 쉽고, 더 문학성이 깊어져야만 한다. 얄밉게도, 가장 어려운 숙제들을 한꺼번에 던져 주고 있는 셈이다.

 

 

3. 작가들의 문제와 해법

1) ‘편견(偏見)’으로부터의 도피

 

실존주의(實存主義)는 인류의 의식을 지배하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논리를 명제의 자리에서 처음으로 끌어내린 사상이다. 19세기 중엽 덴마크 출신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와 프로이센 출신의 철학자 니체에 의하여 주창된 이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끼치는 소중한 철학적 깨달음 중 하나다.

 

실존주의를 명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과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말을 주목해야 한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출발점을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리라.”는 말로 정의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19세기에 이르도록 세상을 가장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지배한 편견(偏見)’이 곧 신의 영향력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은 역사상 가장 용맹스러운 혁명 선언이었다.

 

철학과 예술의 전 영역에서 나타난 실존주의의 영향은 막대하다. 실존주의는 인간 개인은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주체자로 인식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즉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을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존주의의 등장은 개인의 삶을 옥죄는 일체의 관행과 규범에서 비롯되는 편견으로부터의 탈출이 파생하는 전환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한 일대 사건이었다.

 

작가의 삶을 산다는 것은 온갖 고정 관념과의 투쟁이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소양이 회의(懷疑)’. 살아가는 시대가 하염없이 강요하는 모든 단정적인 개념에 대해서 쉼 없이 의심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누군가가 주창한 사상이든 다중이 공유하는 논리이든 간에 자유롭게 의심하는 습관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그는 제대로 된 작가가 아니다. 다른 작가가 만들어놓은 작품들은 물론이고, 자신이 빚어놓은 작품들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편안한 생활을 추구한다. 나르시시즘(Narcissism)이야말로 인류의 삶을 가장 편안하게 만드는 패턴이다. 자기의 작품들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의 예술가적 삶은 이미 빛을 잃은 것이다. 나르시시즘보다도 더 심각한 편견은 없다. 자신이 남겨놓을 작품이 최소한 100년 뒤에는 어떤 가치를 지닐 것인지까지도 여지없이 회의할 줄 알아야 한다.

 

작품은 세상에 내놓는 순간 나의 것이 아니다. 작품을 내놓으면서, 홀로 영원한 여행을 떠나는 나의 분신이 어떤 가치를 지닐 것인지 두려운 마음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다. 편견으로부터 온전히 도피하지 못한 작가의 작품은 예술로서의 생명력을 가질 수가 없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돌아보고 또 돌아보라. 내가 얼마나 깊은 편견에 예속돼 있는지를. 오늘 내가 어떤 편견의 노예가 되어 부조리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창작(創作)이란 세상에 없는 그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작품의 독창성이야말로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영역이다. 독창성은 타고난 재능에다가 작가의 꾸준한 노력, 용의주도한 집필 전략에 의해서 형성된다. 독창성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적은 매너리즘(Mannerism)이다. 매너리즘은 작가들이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덫인 셈이다. 다른 작가들이 생산하는 창작물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의 작품까지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니체는 긴긴 세월 빠져 살던 모진 편견으로부터, 그 딱딱한 고정 관념의 굳은 껍질로부터 깨쳐 나오도록 인류에게 줄탁동시의 기적을 선사했다. 그의 위대한 한마디 신은 죽었다.”의 의미를 늘 헤아리자.

 

 

2) 독자들의 변화에 대한 응답

 

독자들의 변화에 올바로 응답하기 위해서 양보해야 할 부분과 절대로 양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독자층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대략 대중적 취향으로 문학을 가볍게 접근하는 층과 여전히 높은 작품성을 기준으로 엄격하게 갈라서 수준 높은 작품만을 인정해 소비하는 적극적인 독자층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의 작품을 어떤 부류의 독자층에 맞출 것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몫이다. 현재 베스트 셀러를 가장 많이 양산하고 있는 장르 소설, 특히 환타지 분야의 문학 쪽으로 방향을 잡고 공부하면서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들에게도 충분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독자가 선호하는 쪽으로 작품의 성격을 맞춰서 주력하는 일이 폄훼될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역사가 그런 작품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얼마나 오래 세상이 남아 생존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명작으로 남아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불후의 명작 중에는 당대의 유행을 좇은 생산품보다도 훨씬 더 인간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 한계, 운명 같은 것들을 다루면서 삶과 죽음에 관련된 전쟁, 사랑 등과 같은 소재들을 깊숙하게 다룬 작품들은 그 생명력이 대단히 질기다는 점이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바로 여기에 힌트가 있다. 모두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에 뿌리를 둔 인간 삶에 대한 웅숭깊은 철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는 순수예술은 그 자리에서 발전해야 할 필요성이란 차고 넘친다. 다만 거창하게 자신의 예술을 과장하면서 오만한 자세로 무슨 대단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거들먹거리는 예술에 빠져서는 안 된다. 서론에서 언급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말에 그 해답이 있다. 여러분들은 그냥 살면 심심하니까 예술을 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정직한 고백의 깊이, 딱 그만큼만 하면 된다. 그런 자세로 꾸준히 나아가면 반드시 범접하기 어려운 귀중한 예술의 세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4. 맺음말

 

20세기 중반 아일랜드 출생의 프랑스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사뮈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 하면 누구나 곧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En attendant Godot(1952)를 떠올린다. 이 희곡의 성공으로 베케트는 일약 유명작가가 되었고, 앙티 테아트르(Anti-Théâtre:反演劇)의 선구자가 되었다. 1969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는 내면세계의 허무적 심연(深淵)을 추구하는 작품을 즐겨 썼다.

베케트의 대표작이자 부조리극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고도를 기다리며는 너무나 유명한 연극으로서 세계 각 나라에서 끊임없이 공연된다. 부조리극 작품들은 깊은 나락의 염세주의와 기괴한 유머가 독특하게 뒤섞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난해하다.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요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처음 이 연극을 본 사람들은 도무지 그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하여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뭔지 모를 엄청난 이미지와 상징이 뇌리에 박히면서 잊히지 않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캘리포니아 산 퀜틴 교도소의 죄수들이 고도를 기다리며연극을 보고 기립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리는 등 그야말로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말하자면 감옥에 갇혀서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이 연극에 나오는 난해한(또는 무의미한) 대사들이 아주 특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는 얘기다.

 

이 작품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대체 고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견해들은 수없이 등장하곤 한다. ‘고도가 바로 신()이라고 주장도 나왔다. 고도라는 단어가 신을 의미하는 영어와 프랑스어 단어인 GodDieu의 합성어라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정작 베케트는 이 작품에서 신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캘리포니아 산 퀜틴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에게는 고도가 바로 자유로 받아들여진 것은 맞지만, 그렇게 한정하기엔 해석이 턱없이 부족하다. 재미있는 것은 베케트가 나조차도 고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다는 일화다.

 

역사적인 대 히트작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작가인 사뮈엘 베케트가 나는 고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한 말은 비디오 아트와 행위예술의 선구자 백남준이 했다는 그냥 살면 심심하니까라고 한 말은 왠지 일맥상통해 보이지 않는가. 그들의 언어 속에 예술가들이 지향해야 할 참다운 예술가의 길이 암시돼 있지 않은가. 그냥 살면 심심해서 하는 게 예술이고, 작가 스스로도 설명을 할 수 없는 게 작품이어야 한다는 말로 환원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 더 나아가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해서 노력해나가는 게 바로 올바로 된 작가의 길이 아닐까. 불멸의 가치를 품기는커녕 쓸 만한 작품이 흔치 않은 세상에서, 시시껄렁한 작품 하나를 놓고 평자들도 말이 많고 작가들도 말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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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휘 / 대표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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