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만 중원연합군과 8만 남방동맹군 격돌…성복의 벌판에 펼쳐진 진문공의 승부수

천하 대사를 ‘감 놔라 배 놔라’ 오지랖 넓게 관여하던 제환공이 죽고 후계문제로 온갖 추태와 난리를 겪게 되니 실질적으로 제(齊)도 패권국가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이제 제후들은 너도나도 다음 세대의 패권을 잡고자 하였다. 주인 없는 물건에 욕심을 부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들 중 진문공(晉文公)이 왕실의 분란을 틈타 먼저 선수를 치고 기선을 잡았다. 현실적으로 진(晉)의 독주가 타당한가, 진문공을 그대로 중원의 패자로 인정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진(晉)과 함께 패권국가의 자리를 다툴 상대는 누구인가? 제(齊), 진(秦), 초(楚), 진(晉) 등 소위 4강 중에서, 진(秦)의 목공은 딸 때문에라도 섣불리 나서지 못할 입장이고, 제나라는 군위 계승의 문제로 제 발등에 불을 겨우 끈 마당에 가타부타 끼어들 처지가 아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초나라 하나이다. 초는 중원의 남서쪽 변방에 위치하여 오랑캐 취급을 받았으나 실질적인 최강대국으로 왕호까지 쓰고 있다. 초성왕도 천하 제패의 야심을 감추지 않는 위인이라 이래저래 둘의 마찰은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진문공이 감공 대(帶)의 난을 정리한 지 2년, 결국 초가 먼저 대군을 움직였다. 성득신을 총수로 삼고 진(陳), 채(蔡), 정(鄭), 허(許) 등 ‘남방 동맹군’ 8만으로 송(宋)을 침공하였다. 이에 맞서 진문공은 제(齊), 진(秦), 송(宋)과 함께 6만의 군사로 맞섰다. 이름하여 ‘중원 연합군’이다. 바야흐로 중원 천하에 처음으로 십만이 넘는 군사가 격돌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세계대전이라고 할 만한 규모의 전쟁이었다. 무려 9개 국가가 참전하였고, 수천 대의 전차가 얽히고설킨 난전을 벌이게 된다.
본래 고대 중국사에서 창업은 대개 황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이제 천하의 대세가 장강으로 옮겨가는 남북 교체의 시기가 오고 있었다. 하나의 산은 동시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키울 수 없는 법, 이제 자웅을 겨룰 일만 남았다.
양군은 성복(城濮) 땅에서 조우하였다. 지금의 산동성 복현 남쪽이다. 몇 달째 전장을 누비고 있는 남군의 대원수 성득신이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상대를 살피고 있다. 중원군의 군세는 기치와 창검이 파도가 일렁이듯 그 끝을 분간할 수 없었다. 형만(邢蠻)의 초는 중원 군사의 위력을 알고 있었고, 중원인들은 난폭한 남만족을 두려워하고 있다. 말하자면 서로 괄목상대하는 관계이다. 성득신은 일단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초나라에는 별도로 상전대(象戰隊, 코끼리 부대)라는 전투 부대가 있었다. ‘밀림의 사람들’ 또는 원인족(遠人族)이라고 부르는 수렵 부족이다. 상반신은 맨몸에다 사타구니만 가리고 코끼리를 타고 다녔다. 코끼리는 무리 동물로서 대장을 따라 함께 움직인다. 대장이 질주하면 열이고 백이고 무리가 그 뒤를 따라,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돌격대가 된다. 초성왕에 이르러 코끼리 전대는 그 규모를 키워 무려 기천에 달했다.
그날 중원연합의 전략 회의에서 대장군 선진이 말했다.
“지난날 주군께서 초나라 임금에게 양쪽 군사가 마주친다면 일단 삼사(三舍)의 거리를 물리겠노라고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약속대로 군사를 물립시다. 세작들에 의하면 상전대까지 오고 있답니다. 일단 군사부터 물려놓고‧‧‧”
그의 말속에는 다른 뜻이 있다. ‘위대한 덫’을 놓자는 것이다. 그러나 덫에 대한 말은 아직 꺼내지도 않았다. 진문공이 재빨리 말을 끊었다. 자리에는 제, 진(秦), 송의 장수들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흠, 흠, 지금 당장 옮기자. 지금 당장! 영채는 그냥 두고 군사만 물린다. 깃발을 더 세우고 사람만 빠져라. 흐흐흐,”
바람처럼 빠져나와 북쪽으로 군사를 물렸다. 이튿날 오후에야 초군은 상대 진영이 빈 것을 알았다. 사람은 없고, 곳곳에 양을 매달아 발굽 소리와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대신 높이 솟은 장대 끝에는 빼곡하게 글자가 쓰인 깃발 하나가 걸려 있었다.
“과인이 망명 시절에 초나라 군주에게 은혜를 입었다. 약속하기를 훗날 양국의 군사가 만나면 삼사(三舍)의 거리를 물리겠노라고 하였다. 오늘 그 다짐을 이행하노라.”
성득신이 껄껄 웃었다.
“크하하하! 중이란 작자가 겁이 나서 도망치면서 이런 변명을 늘어놓았구나. 즉시 뒤를 쫓아라. 가만! 그렇다고 서두르지는 말거라. 매복이 의심스럽다.”
졸개들도 총수를 따라 덩달아 웃으며 추격에 나섰다. 남군이 중원군을 따라잡은 날은 아흐레째 저녁나절이었다. 진문공은 성복의 벌판에서 추격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판은 잡목이 울창하고 곳곳에 바위가 널린 구릉 지대였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사락사락 조릿대 소리에, 몇천이 매복해도 모를 정도로 군사를 숨기기도 좋았다. 성득신은 작은 언덕 위에 본진을 세우고 그 아래 늪지를 에워싸듯이 진을 펼쳤다. 녹각(鹿角)과 목책을 두르고 보루를 빈틈없이 설치하였다. 그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고도 아직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공간이더라도 먼저 준비한 자는 주인이 되고, 따라 들어간 자는 손님이 된다. 전쟁이나 바둑이나 상대가 하라는 대로 따라주는 것이야말로 필패의 길이다.
밤이 깊어가자 먼 곳에서 ‘우우’하고 늑대가 길게 울었다. 늑대 소리는 멀리까지 퍼졌다. 들개나 너구리, 쥐들도 왠지 모르게 밤새도록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엄청난 인마에 짐승들도 긴장한 것이다. 이윽고 새벽닭이 울더니 날이 밝았다. 군사들은 이른 새벽부터 뜨거운 콩국을 한 대접씩 들이켜고 수수밥을 씹었다. 싸움에 이기고 미친 듯이 승리의 함성을 지를 것인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웃자란 풀숲에 대자로 드러누울 것인가?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남군에서는 진(陳), 채(蔡)의 병거가 선봉으로 나섰다. 원래 진, 채는 마상 전투와 병거를 잘 다루기로 이름이 났다. 특히 채는 중원 쪽에 섰다가 근래에 남군으로 옮긴 경우이다. 성득신은 못 미더운 군대를 후미에 두고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채군을 먼저 출격시켰다.
“서전의 승리가 사기를 올린다. 후위는 걱정하지 말라. 무적의 상전대가 뒤를 받칠 것이야!”
진(陳)장 원선(轅選)과 채장 곽인(郭靭)은 다투어 병거를 몰고 돌진하였다. 뒤따라 졸개들의 기세 높은 고함이 터졌다.
“공격하라. 단숨에 짓밟아라.”
”와아! 와앗! 덤벼라.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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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생성 이미지 |
갑작스런 소란에 새 떼가 날아올라 하늘을 덮었고 군마는 앞발을 쳐들어 허공을 긁으며 울었다. 남군의 기세에 비해 중원군은 어딘지 맥이 빠져 보였다. 몇 합 겨루기도 전에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바쁘다. 욕지거리나 비웃음에도 아랑곳없이 달아난다. 남군은 바늘에 실 끌리듯 추격에 나섰다. 구릉과 분지에 따라 들쑥날쑥한 중원군의 진영은 순식간에 대오가 없이 흩어지고 전후좌우 연결이 어설퍼 방어선이 되지 못했다.
채나라 장수 곽인은 원래 녹림 출신이라 경험이 많았다. 아군을 믿지 못하는 대원수의 눈치를 진즉에 알아차렸다. 어차피 죽기 살기로 싸울 마음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의외로 빠른 상대의 퇴각을 보고 더욱 의심이 생겼다.
“쫓지 말라. 바보들아! 밑밥 뿌리기다.”
이때 성득신의 본진에서 큰북과 징 소리가 한꺼번에 터지더니 황색 깃발이 올랐다. 마침내 상전대의 출전이다. 집채만 한 코끼리의 전신을 비늘 박힌 갑옷으로 덮고 등판에는 등나무 상자를 얹어 원인족이 서너 명씩 타고 있었다. 코끼리들은 성큼성큼 아군의 병거가 쓸고 간 관목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천여 마리가 넘는 거구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그림은 그 자체로 압권이었다. 뒤따르는 군졸들이 너도나도 ‘호잇호잇’ 원인족의 괴성을 흉내 낸다. 중원 군사는 달아나기에 바빴다. 수레도 말도 병거도 모두가 경쟁적으로 내뺐기에 들판을 온통 먼지로 뒤덮었다.
넓은 밀림에서 매력적인 암놈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다가 모처럼 전장에 나온 대장 코끼리는 흥분해 있었다. 어느 순간, 그가 코를 치켜세우며 포효했다. “꿰웩… 꿰에엑….” 다른 암놈들도 포효로써 화답한다. “우웩… 우우엑.” 깜짝 놀랄 만치 크고 이질적인 포효였다. 쩌렁쩌렁 울리는 그 소리에 이 산, 저 골짜기에서 새 떼가 날아올라 하늘을 덮었고, 말들이 엉겁결에 앞발을 쳐들어 허공을 긁으며 울었다.
곧이어 대장이 긴 코를 위아래로 흔들어대며 달리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는 발소리는 지축을 뒤흔들고 여기저기에서 ‘꽤애액 꽤애액…’ 하는 울음소리며, 긴 코를 건들거리며 달리는 그 모습은 보기만 해도 장관이었다. 가공할 광경은 중원군에게는 공포를, 남군에게는 용기를 주었다. 오늘 전쟁은 시작부터 결과가 뻔한 싸움이 될 조짐이다. 그때였다! 갑자기 ‘우지끈 쾅…’ 하고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맨 앞줄에서 대장과 함께 돌진하던 백여 마리의 코끼리의 모습이 거짓말같이 훌쩍 땅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코끼리 떼를 삼킨 땅바닥은 방금까지 무장한 병거가 멀쩡하게 지나간 바로 그 장소였다.
전장에 먼저 도달한 중원군은 땅을 파고 그 위를 튼튼한 나뭇가지와 흙으로 덮어 함정을 만들었다. 말이 끄는 병거 정도는 지날 수 있으나 육중한 코끼리가, 그것도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밟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버팀목이 부러지고 땅이 꺼진 것이다. 함정의 바닥에는 짧은 대나무 창대를 촘촘히 박고 여기저기에 쇠갈고리까지 꽂았다. 어금니 하나만 해도 80kg는 족히 될 만한 대장 코끼리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그럴수록 발바닥이 뾰족한 대나무 창에 찔려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친다. 뒤따라 달려오던 코끼리들은 앞발을 모아 땅바닥을 짚으며 멈추려고 했으나 그도 쉽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밀려 꾸역꾸역 함정 속으로 빠져들었다. 발버둥 칠수록 발은 함정으로 미끄러진다. 코끼리와 군마와 군사들이 한 구덩이에 겹치고 엉켜 밟고 밟히어 터지고 죽는 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중원군의 진영에서 북소리가 울리더니, 솔밭 속에서 병거 수십 대가 뛰쳐나왔다. 앞선 몇 마리 말들은 호랑이 가죽을 덮어쓰고 있었다. 몸통을 호랑이 가죽으로 덮어 앞가슴에는 포효하는 호랑이의 머리가 삐쭉이 달렸다. 이번에는 진(陳), 채(蔡)의 말들이 놀라 날뛰었다. 범 괴물과 마주한 말들이 주인이고 장수고 보일 턱이 없었다. 말들은 병거를 매단 채 그대로 돌아서서 오던 길을 미친 듯이 달아났다. 기수는 잡았던 고삐조차 놓쳤다. 뒤따르던 아군들과 뒤섞여 부딪히면서 일순간 진영이 무너졌다. 사나운 군마가 아군을 마구 짓밟았다. 혼전 중에는 내 편, 남의 편도 없었다.
중원군이나 남군이나 서로간에도 나라가 다른 만치 아군이래야 갑옷도 다르고 말씨까지 다른 이국의 군사들이다. 막상 전장에서 소통이 원활할 리가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선봉대와 후위 군사가 충돌한 난전과 혼란이었다. 미친 말들이 질주하고,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 병사들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피가 범벅이 되어 전장을 소용돌이쳤다. 쓰러진 병사들은 짓밟혀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뭉그러졌다. 주인 잃은 말은 멋대로 질주하다가 코끼리가 빠진 함정에 거꾸로 처박혔다. 잘려 나간 사람의 머리통이 축구공처럼 차이고 구르다가 뻘건 진흙 덩어리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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