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에 잠긴 패군, 중원의 패권이 바뀌다

철석같이 버티던 조전의 군사마저 나가떨어지자 진(晋)의 군졸들은 달아나는 일만 남았다. 울타리 방책이 인파에 밀려 무너지고, 군량을 실은 수레가 뒤집히고 막사가 짓밟혔다. 몸져누운 장졸들은 일어나지도 못한 채 다른 군졸들의 발에 채어 죽어 나갔다. 덜 꺼진 불 자리에서 매캐한 식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먼지와 연기, 피비린내가 뒤섞여 역겨운 악취가 진동했다.
총수 순림보는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디면서 휘청거렸다. 어젯밤 야습이 시작되자 그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렸고 눈동자는 허공을 헤맸다. 기습과 화마와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그의 혼쭐을 빼놓았다. 우왕좌왕 좌충우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입으로는 상반되는 여러 명령을 정신없이 쏟아냈다. 그가 허둥대는 사이에 오늘 밤 선봉을 맡은 초나라 장수 악백이 큰 칼을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순림보는 정면에서 내리치는 악백의 언월도를 피해 말 등에 납작 엎드렸다. ‘챙…’ 총수의 굽 높은 투구가 쇳소리와 함께 바닥에 굴렀다. 다행히 목은 붙어 있었다. 그나마 남은 자존심마저 깡그리 사라졌다. 허겁지겁 말을 몰아 강변을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10만의 군사가 내버린 병장기와 말 장구가 겹겹이 쌓여서 즐비했다.
이때 부장 선곡이 피가 줄줄 흐르는 이마를 헝겊 조각으로 싸맨 채 순림보의 뒤를 쫓아왔다. 평소 자랑하는 무기인 갈퀴 달린 창, 방천극은 이미 목이 부러지고 달랑 자루만 남았다. 순림보는 경황 중에도 선곡을 보고 비아냥을 쏟았다.
“싸우자고 우기던 사람이 어째 그 꼴이냐?”
“총수가 먼저 달아나니 졸개들의 꼴이 이 모양이요! 알기나 하시오?”
그럭저럭 그들이 황하강 어귀에 닿을 무렵에는 가을날 저무는 해가 누런 강물을 석양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강물은 붉고 건너편 기슭은 까마득히 먼데 강폭이 넓어 땅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민물 갈매기 떼가 시끄럽게 울었다. 새들은 천지를 뒤흔든 지난밤에 소동에서 잠에서 깨어나 강바닥을 뛰어다녔고 늘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천여 척의 전선들은 선창에 매여 있었다. 선창이라야 평소 한갓진 곳으로 그나마 수십 척 거룻배를 매던 나루이다. 밑창 뚫린 전선들은 기울어져 있거나 아예 무심하게 뱃전까지 물속에 잠그고 철썩거리고 있었다. 배 밑창이 뚫렸다는 며칠 전 풍문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장졸들의 마음에 낭패감이 일었다.
선곡이 성한 군사들을 이끌고 인근 어선을 모으러 나섰다. 나머지 군사들도 불안하여 이리저리 서성댄다. 패잔병이 시시각각 도착하는 바람에 군사는 더욱 많아졌다. 마침내 선곡의 무리가 징발한 거룻배 백여 척을 끌고 돌아왔다. 이제는 살았구나! 차례로 배를 타기 시작했다. 철썩철썩 뱃전을 때리는 물살도 바빠졌다. 그런데 배가 작아 모여든 군사의 반의반도 태우질 못했다.
“이제, 그만, 그만 타라. 빨리 강을 건네주고 돌아오겠다.”
순림보가 크게 소리쳐 군사들을 제지하였다. 배는 강바닥을 더듬으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득한 전방에서 구름 같은 흙먼지가 말리듯 감겨 오르더니 군마의 발굽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뒤이어 북소리, 징 소리도 들린다. 추격군이 마침내 황하에 이른 것이다. 패잔병들은 마음이 급하고 혼란에 빠져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의 앞에는 누런 황하의 강물이 있었고 뒤에서는 먼지를 일으키며 잔인한 형만의 오랑캐가 덮쳐오고 있었다. 게다가 이름 있는 장수들은 모두 배를 타고 있었다. 의지할 데 없는 졸개들은 너도나도 갑옷을 벗어 던지고 강물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아예 병기조차 내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황하가 그들에게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기를 쓰고 새까맣게 뱃전에 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매달린 전우를 다시 붙잡고 기어오르는 지경이다. 순식간에 십여 척이 뒤집히고, 배에 탔던 군사들이 개미 떼처럼 물속으로 떨어졌다. 어지러운 비명이 사방을 흔들고 다급한 명령과 욕설과 고함이 뒤엉켰다. 사람은 아우성치고 놀란 말은 허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선곡이 졸개들에게 명을 내렸다.
“매달리는 놈들의 손모가지를 칼로 쳐라!”
일제히 칼을 뽑아 뱃전을 잡은 전우들의 팔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다른 배에서도 칼부림을 일삼았다. 손목이 잘리고 그 손목의 임자들은 괴로운 비명과 함께 물속으로 떨어졌다. 철썩철썩 물결치는 소리를 반주 삼아 울부짖는 단말마의 비명이 처절하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광경으로 이제 막 팔뚝에서 잘려 펄떡거리는 손목과 손가락이 배 안에까지 뒹굴었다. 군사들은 그걸 긁어모아서 도로 강물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옥도로서 배는 뒤집히고 사람들은 강물에 내던져졌다. 황하는 팔 잘린 시신과 그 손목에서 쏟아지는 핏물로 짙은 비린내를 풍겼다. 때맞춰 저녁 썰물에 강의 흐름이 빨라졌다. 어젯밤 싸움에 죽은 시신까지 떠내려오자 굽이치는 여울마다 걸린 시신들이 첩첩이 쌓였다. 시신들이 강물을 덮어 물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한동안 크고 굼뜬 물고기들이 원 없이 배를 불리게 생겼다. 미처 배를 타지 못한 군사들의 욕설과 비명과 울부짖음이 산과 들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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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 생성 이미지 |
아비규환의 지옥도는 불이 다 타서 꺼지듯이 차츰 잦아들었다. 동료들의 욕지거리와 저주를 들으며 간신히 강을 건넌 군사들은 열에 두셋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대개는 불에 그슬리고 데이고 다친 군사들이다. 필(邲) 땅의 전장에서 황하의 강변까지, 시체가 연도에 널리고 부상자들은 행렬을 따라가다가 기진해서 쓰러져 죽었다.
하류 쪽으로 기울어지는 해가 강물 위로 노을을 펼치자 서쪽 하늘에 개밥바라기 별이 나타났다. 해거름이 되고 강물은 햇살이 닿는 곳과 닿지 않는 곳으로 나뉘어 너무 밝거나 어두웠다. 이내 마지막 해가 산마루에 걸리자, 석양빛으로 수면과 강변이 붉게 물들었다. 평상시 석양은 평화와 평온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날 저녁 태양은 핏빛이었고, 연안과 강심이 농도를 달리하는 강물은 역한 냄새로 진저리를 치게 했다. 어둠이 밀려오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전우에게 손목 잘려 죽은 자들의 원혼을 실어 그들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고국 쪽으로 불었다. 습지의 갈대밭 어느 구석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바람을 피해 앉아있었다? 다시 살펴보니 다친 사람이 숨 끊어지기를 기다리는 독수리였다. 억새밭을 가르며 불어오는 강바람조차 강해지다 못해 쉐엑, 소리를 내는 바람에 인간이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더욱 몸서리치게 하였다.
필(邲) 땅, 그 구릉과 평원, 습지 위에 웅대한 구상을 펼치고 저마다 영웅의 공명을 노리던 이 전쟁은 상현에서 그믐까지 스무날 남짓으로 길지 않았고, 그믐날 밤의 격전은 거짓말처럼 일방적인 공격으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사연 많은 오늘 하루도 노을에서 박명으로 이어지고, 어느 결엔가 어둠이 찾아왔다. 한 서린 귀신의 울음소리 같은 밤바람이 윙윙거리며 갈대숲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쟁은 이처럼 최악의 참상을 연출하며 그렇게 막을 내렸다.
초장왕은 필(邲) 땅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한 오삼의 벼슬을 높여 대부로 삼고 당읍(堂邑) 땅을 식읍으로 내렸다. 훗날 그의 아들 오거(伍擧)는 진(晉), 초(楚)의 양강 체제를 구축한 명신으로 《사기(史記)》에 한 줄 이름을 올렸다. 손자 오사(伍奢)는 훗날 왕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목숨을 잃었으며, 그 아들이 바로 오월 전쟁의 주역인 오자서이다.
바야흐로 전쟁의 행태도 차츰 변하고 있었다. 대규모 전차전에 적합한 중원 지역을 벗어나 강과 습지가 많은 동남쪽으로 전장이 확대되면서 기갑부대 병거의 역할이 크게 줄어들었다. 대신 기동력과 함께 장거리 작전이 가능한 기병의 역할이 커졌다. 사회적으로는 종래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전쟁에 야인과 노예들도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요지부동이던 신분제가 서서히 잠식되고 있었다. 명목상으로 왕실이 있었으나 어느 제후도 천자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힘이 곧 대의요 명분이 되는 시절이다. 제환공 시절 한때 방백으로 군림했던 제나라도 마침내 초에 복속하여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과연 초장왕은 필생의 염원대로 한차례 날갯짓으로 중원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저 기수 가의 물굽이 바라보니 첨피기욱 (瞻彼淇薁)
푸른 대나무 무성히 자라다 록죽의의 (綠竹漪漪)
빛나는 우리 님 유비군자 (有匪君子)
깎고 다듬은 듯 여절여차 (如切如磋)
쪼고 간 듯 여탁여마 (如琢如磨)
장중하고 당당하며 슬혜한혜 (瑟兮僩兮)
반짝이고 훤하다 혁혜훤혜 (赫兮晅兮)
빛나는 우리 님 유비군자 (有匪君子)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종불가훤 (終不可諼)
공자의 시경 국풍 중 위풍 기욱(汽旭, 기수의 물굽이)
스스로의 리더쉽으로 마침내 대붕의 꿈을 이루었던 왕은 그로부터 6년 뒤 죽었다. 천하 패자가 된 후에도 그는 질박한 초(楚)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음악이나 복식 등 사회 문화에서도 화려한 중원을 따라 하지 않고 형만(邢蠻)의 오랑캐 기질을 고수했다.
그의 아들 초공왕의 재위 30년 동안에도 초나라는 변함없이 중원 천하의 지배자였다. 열국은 너도나도 조공을 바치고 초나라 군주를 천자 모시듯이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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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완 (韓 莞) 작가 |
※저자 한완은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74-1982 영천시 교육청에서, 1985-2014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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