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하강 유역과 장강 지역의 열국이 패거리를 지어 집단전쟁을 벌였던 성복 전쟁 이후 그럭저럭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성복에서 활약한 영웅들은 세월의 바람결에 사라져 갔다. 대신 전쟁의 스토리는 인구에 회자되면서 감동적인 사연을 더했고 그만치 젊은이의 꿈을 부추겼다. 강호 무림의 고수들도 30년이나 50년에 한 번씩 ‘화산논검’을 통해서 ‘중원제일검’의 이름을 겨룬다고 하지 않았던가. 목숨보다 명예를 중히 여기는 영웅들이 언제까지나 몸을 사리고 있을 것인가? 바야흐로 자웅을 가릴 일만 남았다. 이른바 제2차 남북전쟁의 서막이다. 이번에도 도전자 격인 초나라가 먼저 움직였다. 때는 BC 597년이었다.
초장왕은 하희의 스캔들을 빌미로 진(陳)을 평정하고 속국으로 삼았다. 말할 것도 없이 당시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는 북방에 진(晋)나라이다. 웅지를 품은 초장왕은 남쪽 변방의 골목대장으로는 성이 차질 않는다. 범 두 마리가 하나의 숲에 함께 살 수는 없는 법. 그 길목에 정(鄭)이 있었다. 즉위 17년째 되던 해에 정나라 정벌에 나서게 된다. 이때 영윤 손숙오(孫叔敖)가 의견을 개진한다. 손숙오는 눈이 푸르고 수염까지 파래서 자염백(紫髥伯, 자줏빛 수염을 기른 대부)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우리가 정(鄭)을 친다면 반드시 진(晋)이 달려올 것입니다. 기왕에 군사를 일으키려면 진과 싸울 대군을 동원해야 합니다.”
“껄껄… 바로 그렇다. 과인의 생각도 그렇다.”
결국 삼군(三軍)과 이광(二廣)의 모든 군사를 총동원하였다. 삼군은 중군, 좌군, 우군의 정규 전투 부대이며 이광은 좌광(左廣)과 우광(右廣)으로 편성된 군수지원 부대이다. 동원된 정규 군사의 숫자는 5만이며 따로 식량과 말먹이를 나르는 시양졸(厮養卒, 보급대)이 3만으로 도합 8만의 대군이다. 왕이 직접 참전한 만치 군사들의 사기도 높았다. 경험 많고 신중한 장군 양노가 선봉으로서 군사를 이끌었다. 양노는 하희의 남자, 바로 그 사람이다.
정나라 군사는 개전부터 초군의 기세에 눌려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변성의 주둔군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아아! 저것이 모두 사람이란 말인가?”
넓은 평원을 뒤덮어 메뚜기 떼처럼 새까맣게 군사들이 몰려오고 그 뒤에 또 다른 메뚜기 무리가 얽혀 꿈틀대는 모습을 바라보던 정나라 군사들은 기가 질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초의 대군은 무인지경을 달리듯이 엿새 만에 마침내 수도 신정(新鄭)성을 포위하였다.
그날은 그대로 지나갔다. 아니 그날뿐이 아니었다.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나흘이 지나도록 초군은 공격 한 번 하지 않았다. 쌀 씻고 밥 짓는 모습이 오히려 평화스러워 보이기까지 하였다. 군사들은 아예 퍼질러 앉아 병기를 닦고 칼날을 갈면서 휴식을 취했다. 누구는 군마와 당나귀, 소 등 짐승을 돌보거나 주사위 도박에 여념이 없었고, 어떤 자들은 격투를 벌이기도 했다. 취사를 맡은 군졸은 약식으로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전우들에게 먹였다. 이를 지켜보는 정나라 군사는 궁금증에다 불안감까지, 조마조마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드디어 닷새째 되던 날 좌광의 별동대가 도착했다. 그들은 남방 밀림에서 벌목한 엄청난 크기의 통나무를 싣고 와서, 한나절이나 무언가를 만들었다. 성안의 군사들은 저마다 성벽 위에 올라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성벽보다 한 길이나 높은, 바퀴 달린 누거(樓車, 다락 차) 수십 대가 위용을 드러냈다. 성안은 높이 솟은 다락 수레를 보고서 곧바로 그 용도를 깨달았다.
“농성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정나라 군사는 전의를 잃었다. 누거가 느릿느릿 성벽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수십 개의 바퀴를 달고 있는 누거를, 몇백의 군사가 어깨로 밀었다. 비 오듯이 화살이 쏟아지자 방패를 들어 하늘을 가렸다. 화살은 대나무 다발로 장갑한 방패를 뚫지 못했다. 결국 다락 차가 성벽에 붙었다. 멀리서 보면 원래부터 성벽과 함께 쌓은 망루 같았다. 이제는 성벽 위가 지형적인 이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더 높은 누거에서 성벽을 내려다보면서 활을 쏘아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상에서는 기세등등한 보졸들이 땀과 가죽 냄새를 내뿜으며 함성과 함께 성채로 몰려들었다. 성문을 부숴버릴 거대한 통나무, 공성추(攻城錐)는 또 그대로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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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중국 성벽 공성전의 장엄한 풍경. AI 생성 이미지. |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일각이 채 못 되어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선봉이 성벽 위에 발을 디뎠다. 이 광경을 보고 절망에 울부짖는 백성들의 곡성이 여름 논에 악머구리 들끓듯 시끌시끌했다. 젊은 여자들 한 무리가 성벽에 올라서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저고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여자들은 높은 목소리로 울었고, 먼빛에서도 하얀 젖가슴이 햇빛에 반짝였다. 성이 함락되면 그들의 운명은 또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초장왕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퇴각의 징을 울리게 하였다.
“군사를 물려라!”
공자 영제가 영문을 몰라서 물었다.
“부왕! 곧 성을 함락할 기회가 왔는데 어찌 군사를 물리십니까?”
“큰바람이 지나가면 엎드렸던 풀포기가 다시 일어나듯이 오늘 힘으로 눌러놓으면 내일 다시 준동하는 것이 저들의 생리이다. 일단 군사를 물렸다가 한 번 더 기를 꺾을 작정이다.”
성안에서는 정나라 임금 정양공(鄭讓公)이 초조하게 구원병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진(晉)나라 군대는 어디쯤 오고 있을까? 출병을 하기는 한 것인가? 간절한 기다림에도 기어코 초나라 군사가 성벽 위에 올라섰다. 망연자실하는 순간, 이게 또 무슨 일인가? 갑자기 적이 퇴각한다! 불끈 용기가 솟았다.
“적이 퇴각한다. 대국의 군사가 도착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적을 막아라!”
절망에 울부짖던 백성들이 성벽 위로 달려가서 부서진 곳을 수리하고 돌과 화살을 날랐다. 그러나 웬걸, 초군은 이튿날 다시 가공할 누거를 앞세워 공격해왔다. 그러더니 함락 직전에 다시 군사를 물렸다. 성 밖에서 밥을 짓더니, 술과 고기까지 곁들여 한바탕 떠들썩하게 휴식을 취했다. 이른바 희망 고문이었다.
이런 공방이 그 후에도 대여섯 차례나 이어졌다. 초나라 군사의 후방에서는 보급대가 끝도 없이 식량과 마초를 실어 날랐다. 근래 속국으로 삼은 식나라, 육나라, 강나라, 요나라 등에서 연이어 군량을 보내오고 있다. 초는 속국의 식량이 남아도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이런 전쟁이 필요했다. 배가 부르면 주인을 향해 대들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고 있는 신정성은 이미 농성이 아니라 앙탈하는 여인으로 보였다. 날마다 성 밖에는 떠들썩한 잔치 자리가 열리고 군사들이 기세 좋게 즐기고 있었다. 갑옷을 풀고 이리저리 뒹굴고 있어도 정나라 군사는 감히 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튿날이면 다시 공격군이 물밀듯이 성벽 위를 점령하였다가 다시 내려가는 이상한 일들이 반복되었다. 갈수록 성안의 좌절은 커졌다. 밤과 낮이 여러 차례 바뀌어도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구원병은 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적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절대 장벽으로 보였다. 군사들은 점차 무기력해지고 패배 의식에 젖었다. 마침내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초장왕은 성의 함락을 명령하였다. 선봉이 어렵지 않게 성벽 위에 올라서더니 허둥대는 적을 물리치고 성문을 활짝 열었다. 성은 이미 한번 허락한 여인처럼 군말 없이 점령군을 받아들였다. 초장왕은 군사들에게 일절 노략질을 금하였다. 강한 무력뿐만 아니라 군율에서도 초군은 훨씬 앞서 있었다. 백성들로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길가로 나와 향을 사르고 절까지 올렸다. 백성의 민심까지 잃을 판인 정양공은 하는 수 없이 웃옷을 벗고 초장왕을 영접했다.
《사기(史記)》에서는 이때의 모습을 다음처럼 그렸다.
“육단견양(肉袒牽羊)하여 초왕 앞으로 나가다.”
육단(肉袒)이란 겉저고리를 벗겨 맨몸이 되는 것을 말하며, 견양(牽羊)이란 양이 끄는 수레를 타는 것을 말한다. 즉 웃통을 벗고 양이 끄는 작은 수레를 타고 나가 초장왕에게 항복했다는 말이다. 제후 대 제후로서의 단순한 항복이 아니라, 종속 관계로서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이니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다. 정양공이 초장왕의 발밑에 꿇어앉았다.
“지난날 우리 선조들이 서로 화목하였음을 봐서라도 사직을 보존하게 해주시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사실 초나라와 정나라는 그런대로 잘 지낸 시절이 있었다. 초장왕의 할아버지 초성왕은 누이 문미를 정문공에게 시집보냈다. 훗날 문미와 정문공 사이의 두 딸, 백미와 숙미를 초성왕이 동시에 취하여 쌍미전(雙羋殿)에 두고 즐긴 적이 있었다. 왕이 진중 군막에서 쌍미를 취한 이야기는 어언 40년이 가까운 전설로 남았다. 그 뒤 성복의 전쟁에서 중원 연합군이 승리하자 노선을 바꾸어 진(晉)에 복속하는 오락가락 행보를 벌였기에 오늘의 사태를 불렀다. 초나라의 공자 영제가 슬며시 부왕에게 간했다.
“저들은 또 배신합니다. 아예 사직을 거두어버리시지요.”
“급할 게 하나 없다. 문제는 진(晉)이다. 정나라쯤은 그냥 두어도 익은 밤 떨어지듯이 손에 들어올 것이야.”
오히려 군사를 성밖 30리로 물렸다. 정양공은 이튿날 초군의 진지에 가서 다시 사죄하고 동생 거질을 인질로 바쳤다. 남북전쟁의 서막인 정나라 정벌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끝나가고 있었다.
과연 초장왕의 말마따나 수시로 말을 갈아타던 정나라는 이날 이후로 감히 초를 배신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1세기 후 삼진(三晉, 북방의 강자 진晉은 이후 조, 한, 위의 삼국으로 나뉘었다. 이들이 모두 진에서 나왔기에 삼진이라고 불렀다)의 하나인 한(韓)에 패망해 사직을 닫을 때까지 변함없이 부용(附庸, 속국의 옛말)으로 초(楚)를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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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완 (韓 莞) 작가 |
※저자 한완은 계명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74-1982 영천시 교육청에서, 1985-2014 한국수자원공사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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