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노자가 가르쳐 주는 삶의 자세는 '물 같이 되라', '물처럼 살라'는 가르침

사상과 철학 / 안재휘 기자 / 2026-05-10 10:25:22
<367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 물은 자신의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릇에 따라, 물은 모양을 달리 한다.
- 물은 고이면 썩는다. 항상 웃물이 아랫물로 바뀌어야 살아 있는 물이다.
- 물은 스며들어 없어지면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바람과 같이 사라진다.

 

 

1

노자는 물처럼 다투지 말고 겸손하게 살라고 하면서 물의 정신을 시처럼 읊었다. 물의 속성이 정리된다. 모두가 싫어하는 곳, 낮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자기를 낮추면서 흐르는 것이다. 모두가 높은 곳을 향해 오르려고 안달이지만 물은 그런 일과 상관없이 우주적 원리에 자기를 맡기고 유유자적 낮은 데로 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덕성을 보인다. 우리도 물처럼 그렇게 살아볼 일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임합니다(居善地, 거선지).

물은 연못처럼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心善淵, 심선지).

물은 아낌없이 누구에게 나 은혜를 베풉니다(與善仁, 여선인).

물은 신뢰를 잃지 않습니다(言善信, 언선신).

물은 세상을 깨끗하게 해줍니다(正善治, 정선치).

물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합니다(事善能, 사선능).

물은 얼 때와 녹을 때를 압니다(動善時. 동선시)."

 

다음은 원문이다. "上善若水(상선약수) 水善利萬物而不爭(수선리만물이부쟁) 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오) 故幾於道(고기어도) 居善地(거선지) 心善淵(심선연) 與善仁(여선인) 言善信(언선신) 正善治(정선치) 事善能(사선능) 動善時(동선시) 夫唯不爭(부유불쟁) 故無尤(고무우)." (<<도덕경>> 7)

 

노자가 가르쳐 주는 삶의 자세는 '물 같이 되라', '물처럼 살라'는 가르침이다. 그래 '상선약수(上善若水, 지극히 착한 것은 물과 같다)'라 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부쟁(不爭)의 철학'이다. 남과 다투고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언뜻 보면 소극적인 삶의 방식인 것도 같지만 자세히 보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은 만물을 길러주고 키워주지만 자신의 공을 남과 다투려 하지 않습니다." 물은 내가 길러주었다고 일일이 말하지 않는다. 그저 길러 주기만 할 뿐, 내가 한 일에 대하여 그 공을 남과 다투지 않는다. 자식을 키워 놓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 놓고, 그 행위에 대하여 나를 알아 달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겸손의 철학이다. '자기 낮춤'이다. "물은 모든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임하기에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만약 역류하여 거꾸로 흘렀다면 시간이 지나면 썩어버리는 웅덩이의 물로 남게 된다.

 

2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시초는 물'이라 했다. 노자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을 했다. 물은, 상선약수(上善若水, 지극히 착한 것은 물과 같다)라는 말처럼,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도 타인과 다투지도 않는다. 또한 물은 겸허(謙虛)가 몸에 배어 있어 언제나 낮은 곳으로 스스로 저절로 아무 소리도내지 않고 흘러 들어간다. "상선약수"는 처세(處世)의 한 방법일 수 있다. 가급적 물처럼 살아보고 싶다.

 

물은 자신의 모양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릇에 따라, 물은 모양을 달리 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그러나 낮은 곳으로만 흐르다가 마침내 도달하는 것 곳은 드넓은 바다이다. 물은 쉬지 않고 흘러간다. 자신이 가야 할 곳, 바다를 향해 묵묵히 인내하고 흘러간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

 

물은 고이면 썩는다. 항상 웃물이 아랫물로 바뀌어야 살아 있는 물이다. 현기영의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에서 읽은 내용이다. "인생이란 앞 강물, 뒷 강물 하면서 흘러가다가 하구에 이르면 바다로 빠지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난 바다로 안 갈래'하면서 버티면, 그게[ 웅덩이가 돼서 고이고 썩는 것이다. 그러면 노년이 추하다. 자연스럽게 강물 따라 흘러가 버리면 된다. 그래서 나이 들면 자연과 잘 어울려야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그렇게 너나없이 흙으로 돌아간다. 그때까지 주어진 길을 꿋꿋이 헤쳐 나아갈뿐, 누구라도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진 못한다.

 

물은 스며들어 없어지면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바람과 같이 사라진다.

 

물은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 물은 평상시에는 골이진 곳을 따라 흐르며 벼 이삭을 키우고 목마른 사슴의 갈증을 풀어준다. 그러나 한 번 용트림하면 바위를 부수고 산을 무너뜨린다. 또한 물은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즉 가장 약한 힘인 듯 보아는 한 방울의 물들이 계속 떨어질 때,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환경도 변화시킨다.

 

3

모두 삶이 어렵다고 한다. 사실 그렇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삶은 그리 만만치 않다. 끊임없이 삶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늘 우리 주위에 서성이다가 우리가 방심하거나 소홀히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해코지한다. 그것은 건강, 정신적 아픔, 금전 등 전 방면에서 우리를 괴롭힌다. 하나의 난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난제가 똬리를 틀고 앉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법정 스님은 "삶이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의미를 채우지 않으면 삶은 빈 껍질이다"라 했다. 플라톤(Platon)도 이렇게 말했다. "권력, 명예, 재물 중 한 가지만 가지라"고 했다. 이것은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법정 스님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렇게 우리는 소유로부터 정신적 자유로움을 가져야 한다. 삶도 사랑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달관(達觀)의 삶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본다. 생명, 그 자체가 이미 무한한 은총이며 기쁨이기 때문이다. 천상병 시인은 막걸리 한 잔 값의 돈과 자기를 기억해 주는 벗만으로도 만족하였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남보다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돈과 권력, 명예 이것을 위해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에 함몰되어 참다운 삶의 의미를 잊는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삶이란 이 세상에 소풍 와서 잘 놀다 가는 것이 아니던가.

 

미국 시인 롱펠로우(Henry. W. Longfellow)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첫 번째 아내는 오랜 투병 생활을 하다 외롭게 숨졌으며, 두 번째 아내는 부엌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았다. 시인은 "마당의 사과나무,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나무는 매우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단맛을 내는 사과가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때문입니다라 했다. 앞으로 우리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기 삶을 창조하는 주인의 삶이었으면 좋겠다. 덧붙여 말하면 놀이하는 인간인 초인(超人)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4

나는 니체를 좋아한다. 왜 그는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이들을 위해 대신 울어주려 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토리노 광장에서 늙은 말이 채찍질을 당하는 걸 본다. 무거운 짐을 지고 끌고 가려는 데 길이 미끄러우니 계속 미끄러진다. 마부에 채찍질을 당하는 늙은 말을 보고, 니체가 달려가서 말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자기가 대신 맞으면서, '때리지 마, 때리지 마' 하고 울다가 미쳤다. 그게 그 유명한 '토리노의 말'이다. 그리고 그는 망치를 들고서 인간의 자유를 옥죄는 모든 기존의 가치를 산산이 조각 내려 했기 때문이다. 동양 철학자로는 장자를 좋아한다. 그는 진정한 자유를 위해 평생 고군분투했기 때문이다. 피곤하기 이를 데 없는 여러 사회적 압박에서 벗어나 자연 그대로의 본성에 충실하고 만족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니체와 장자는 이점에 서로 만난다. 니체의 중심 철학은 니힐리즘(Nihilism),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 영원회귀 사상이고, 장자 철학의 중심은 무(), 진인(眞人), 만물의 순환 사 상에 있다.

 

현대 사회의 위기는 '마음'의 위기이다. 왜냐하면 빛의 속도로 바뀌어 가는 사회 환경의 변화와 가면 갈수록 심해지는 물질만능주의는 우리를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체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좋다고 평가하는 것을 쫓으면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 진정한 자기'가 실종된 삶을 산다.

 

니체와 장자의 중요한 가르침은 남의 호흡에 끌려 다니지 말고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남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곹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이기도 하다. 에르히 프롬(Erich Fromm)"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야말로 함께 있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당연히 마음이 아프다. 나도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을 했다. 한동안 힘들었지만, 그 상실을 극복한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고 부터 이다. 그 방법을 되찾은 것은 매일 아침 <인문 일지>를 쓰면서 내 마음을 들여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실 후 마음이 아팠던 것은 많이 사랑해서 괴로웠던 것이 라기보다는 많이 의지 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나 자신의 '자기애'를 굳건히 지키면서 상대를 사랑했더라면 기대에서 오는 상실감이나 의존에서 오는 허전함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 필요한 것이 '나의 방식대로' 떳떳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우리들의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떳떳함의 결여에서 나온다. 떳떳함을 말하다 보니 '구차(苟且)'라는 말이 소환된다. 구차하게 살지 말자. 이는 떳떳하지 못하고 답답하고 좀스러운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버젓하지 않거나 번듯하지 않은 것이다. 원래는 구저(苟菹)라는 말에서 나온 거라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저(, 채소 절임 저) 자에서 풀 초가 빠지고 차(, 버금 차)로 바뀐 것이라 한다. '구저'란 신발 바닥에 까는 지푸라기를 말하는 것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 의인을 살리기 위해 천리 길을 가는 그의 신발이 닮아서 발에 피가 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너무나 애처로워 볏짚을 모아 그의 신발에 깔아주었다. 이 일을 보고 사람들은 모멸을 감수하고 적은 동정을 받는다 뜻으로 "구저 구저" 하다가, 세월이 흘러 '구차'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당장 굶어 죽어도 구차하게 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구차함이 당당하게 대중들 앞에서 나서기 시작했다. 특히 요즈음의 정치인들을 보면 구차하다. 한 세상 당당하게 살고 싶으면, 구차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한다. "재물 앞에 놓였을 때 올바른 방법이 아니면 구차하게 얻지 말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지 마라. 다투게 되어도 이기려 하지 말고, 재물을 나누어도 많이 얻으려 하지 말라" 고대의 일상 생활에 적용되었던 규범들을 실은 <<예기>>에 나오는 글이다. 우리가 떳떳하지 못한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야말로 행복의 지름길이다.

 

그 다음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우리를 아주 불편하게 한다. 후회와 불안보다 좋은 음식을 먹고 충분한 잠을 작 나면, 새롭게 일을 도모할 힘을 얻는다. 하나하나의 시간이 시작이며 또한 끝이다. 얼마나 오래 만나느냐 하는 것보다 하나하나의 시간을 어떻게 만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에 듣는 음악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 만나는 꽃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있음을 늘 잊지 않는 거다. 기쁨의 싹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경험하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나는 늘 "고집스럽게 기쁨"을 추구한다. 잭 길버트의 시 <변론 취지서>에는 우리는 과감히 기쁨을 추구해야 한다. 쾌락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기쁨 없이는 안 된다/ 이 세상이라는 무자비한 불구덩이에서 고집스럽게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적확한 시인의 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기쁨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기쁨이다. 눈이 녹으면 더러워서, 비가 내리면 단풍이 하수구를 막아서, 봄의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이 모든 계절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삶은 어떤 풍경일까? 한 번뿐인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우리는 고집스레 기쁨을 찾아내야 한다. 아주 조금, 관점을 바꾸는 순간 나의 삶은 많은 것이 긍정적으로 변한다. 이미 지나가서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상황으로, '지금, 이 순간'을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 때 마음의 근육이 늘고, 감정연금은 쌓인다.

하략(下略)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 박한표 교수

<필자 소개>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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