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탁월해지는 것이 아니라. 탁월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 탁월함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탁월함을 드러나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인은 자신의 삶 전체를 탁월로 변모 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에 언제나 겸허하고 겸손하며, 경외할 줄 안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의 특장의 '서슴없음'이 아니라, '머뭇거림'이다. 서슴없음과 당당함은 자신을
인간은 자유인이거나 노예이다. 그럼 나는 자유인인가? 아니면 노예인가?
여기서 말하는 자유인은 자기 확신과 자기 존경으로 탁월(자유 자재함)을 수련하여 어제보다 아는 나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 반대로 어제와 똑같이 주위의 인정에 목마른 자발적인 노예이다. 지난 주 배철현 선생의 <월요 묵상>을 읽고, 성찰한 내용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우리는 탁월해지는 것이 아니라. 탁월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 탁월함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의 탁월함을 드러나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 때문이다.
배철현 선생에 의하면,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는 타인으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상태이지만,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는,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지금-여기에서 몰입하는 기운이다." 이러한 몰입하는 기운은 자기 분야에서의 '탁월', '자유 자재함'에서 나온다. 그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수련과 배움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 우리들은, 타인과의 신체적인 접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그와 비례하여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의 자발적인 노예가 되었다. 이런 자발적인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신만의 삶의 노래로 자신에게 감동적이며 세상에 자비를 실천하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통점은 '탁월'이다. 배철현 선생도 그렇게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나는 내 마음 둘 것을 찾았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그 탁월이란, 오랜 묵상을 거쳐 특정한 분야에서 소질을 발견하여, 그것을 갈고 닦는 수련을 거쳐, 소명으로 삼은 자의 자신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삶 전체를, 이 소질을 탁월로 변모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에 언제나 겸허하고 겸손하며, 경외할 줄 안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서슴없음'이 아니라, '머뭇거림'이다.
우리들의 삶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 분잡에 휩쓸리다 보면 존재에 대한 질문은 스러지고 살아남기 위한 맹목적 앙버팀만 남는다. 숨은 가빠지고 타인을 맞아들일 여백은 점점 사라진다. 서슴없는 언행과 뻔뻔한 태도가 당당함으로 포장될 때 세상은 전장으로 변한다.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사법, 종교의 영역에서 발화되는 말들이 세상을 어지러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태도가 있다면 ‘머뭇거림’이 아닐까? '머뭇거림'은 다음을 내포한다.
·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려는 겸허함,
·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
·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 수용하려는 열린 마음.
모든 틈은 깨진 상처인 동시에 빛이 스며드는 통로인 것처럼, 머뭇거림은 우유부단함처럼 보이지만 나와 타자가 함께 숨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머뭇거림이 사람을 자기 초월의 방향으로 인도한다. 세상의 어떤 이론도 지혜도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에 가까워질 수는 있겠지만 근사치일 뿐이다. ‘알 수 없음’이야말로 생명의 실상이다. 여기서 경외가 시작된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다. 알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만 결국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허세 부리려는 욕구에서 해방된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평화가 시작된다.
그런 머뭇거림 속에는 경쟁이 없다. 누구나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을 발휘하여 승리자가 된다. 그 속에는 '자기확신'과 '자기존경'이 있고, 그것들이 자신을 타인과 구별시켜 주는 아우라가 된다. 배철현 선생은 이 아우라의 특징들을 이렇게 열거한다.
· 이 아우라는 사회가 그에게 부여하고 싶은 부, 권력 그리고 명성을 초월한다.
· 이 아우라는 숫자로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후진사회에서, 그를 독보적인 존재로 승화시킨다.
· 이 아우라에서 나는 자기확신과 자기존경, 그리고 탁월(자유 자재함)은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묵묵히 시행착오를 거친 수련과 연습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 이 아우라를 가진 탁월한 자는 명성을 얻기도 하고 약간의 부를 축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탁월한 사람들 대부분은 알려지지 않고 조용히 인생을 유유자적하며 산다. 고독이 그들을 탁월하게 만드는 기반이자 무기이기 때문이다.
· 이 아우라를 가진 탁월한 자유인들은 남들이 보기에는 가난한 삶을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인정이나 부의 축적은, 스스로에게 가지는 자기 신뢰와 자기존경에 비하면 사소한 것들이다. 자기 신뢰와 자기존경은 어떤 권력이나 부도, 혹은 바람과 같은 명성도 함부로 도달할 수 없는 성배다.
· 이 아우라를 지닌 탁월의 보상은 명성이 아니라 자기존경이다. 자신을 존경하는 이유는 타인의 박수나 환호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만의 천부적인 소질을 발견했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순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아우라를 지닌 탁월한 인간에게 타인이 부여하는 인정이나 입증이 필요 없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를 한 편 공유하고, 계속 이어간다. 좀 길지만 백무산 시인의 <길은 광야의 것이다>를 택했다. 자기확신을 위해서이다.
길은 광야의 것이다/백무산
얼마를 헤쳐왔나 지나온
길들은 멀고 아득하다
그러나 저 아스라한 모든 길들은 무심하고
나는 한 자리에서 움직였던 것 같지가 않다
가야 할 길은 얼마나 새로우며
남은 길은 또 얼마나 설레게 할건가
하지만 길은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나락으로 내몰았다
나에게 확신을 주었고 또 혼란의 늪으로 내던졌다
길을 안다고 나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되돌아 서서
길의 끝이 아니라 시작된 곳을 찾았을 때
길이 아니라 길을 내려 길을 보았을 때
길은 저 거친 대지의 것이었다
나는 대지에서 달아나지 않았으므로
모든 것은 희생되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펼쳐진 바다와 같은 아, 하늘에 맞닿아
일렁이는 끝없는 광야의 그늘을 나는 보았다
우리들 삶은 그곳에서 더이상 측량되지 않는다
우리들 꿈은 더이상 산술이 아니다
길은 어디에나 있고 또 없다
길은 대지 위에 있으나
길은 자주 대지를 단순화한다
때로는 대지에서 자란 우리를
대지에서 추방하기도 한다
우리가 헤쳐온 길이 우릴 버리기도 한다
길은 자주 대지의 평등을
욕망의 평등으로 변질시키고
대지의 선한 의지를
권력의 사욕으로 타락시킨다
삶이란 오고 가는 것일까
인생이란 흐르는 길 위의 흔적일까
저기 출렁이는 물결을 보아라
허공에 맞닿아 끝없이 일렁이는 물결을 보아라
길이란 길은 광야 위에 있다
길 위에 머물지도 말고 길 밖에 서지도 말라
길이란 길은 광야의 것이다
삶이란 흐르는 길 위의 흔적이 아니다
일렁이어라 허공 가운데
끝없이 일렁이어라 다시 저 광야의
끝자락에서 푸른 파도처럼 일어서는
길을 보리라
배철현 선생은 그런 사람의 예를 들어 준다.
(1) 소크라테스이다. 그는 아테네 법정의 인정을 위해 법정 연설하지 않았다. 그에게 불리하고 엉뚱한 판결에 순응한 이유는, 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법의 가치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는 당시 유대인들의 최고 판결기관인 산헤드린의 공식적인 인정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인 '사랑'을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기꺼이 올라간 것이다.
잘 생각할 것은 위에서 말한 탁월은, 한 마디로, 인정을 받기 힘들다. 인정을 받기 위해 초조하게 기다리거나 그 대상에 아부한다면, 그는 이미 자발적인 노예다. 배철현 선생의 멋진 설명을 직접 들어 본다. "천재는 타인들이 보기에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는 인내다. 성인은 그것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이런 탁월과 자기존경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인간의 표식이라면, 사회나 전통이 정해놓은 규범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소극은 '자발적인 노예'의 계급장이다. 그 계급장을 따기 위해, 청소년 시절에 건강을 해치고 막대한 돈을 들여가며 과외를 하고, 돈을 잘 번다는 직업을 가지기 위해 인생의 황금기를 철장과 같은 고시원에서 취준생으로 산다. 그런 자들에게 정신질환은 덤이다. 자유로운 자는 자신의 유일무이한 삶을 창조하지만, 자발적인 노예들은 관습, 평판, 의견에 감금되어 사회가 그에게 어울리는 삶을 정하도록 허용한다."
철학자 리차드 테일러는 그런 현대인들을 '자발적인 노예'라고 불렀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노예인 줄 모르고 지낸다. 개인의 자유와 탁월을 보장하는 길은 좁다. 이 길은 처음에는 좁아, 나의 최선 이상을 요구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넓어진다. 밤에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박수를 보낸다. 어떤 이는 양봉으로, 어떤 이는 춤으로, 어떤 이는 글로, 어떤 이는 요리로, 어떤 이는 바둑으로, 어떤 이는 사업으로 자신의 탁월을 자유롭게 수련한다. 자신이 정복하고 싶은 각자의 에베레스트산에 조금씩 올라가기 때문에, 매일 매일이 산 정상이다. 오늘도 그 정상을 위해 걸을 뿐이다. 힘이 난다.
우리는 흔히 남의 글을 잘 읽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은 훈련이 필요하다. 사유의 시선을 탁월하게 올려야 글이 잘 익힌다.
어제 오후 내내 나는 김기석 목사(청파교회)의 글들을 찾아 읽었다. 나는 창피했다. 그분이 사용하시는 언어들 중 예쁜 우리나라 말들이 이렇게 많은데, 사용하지 않거나 알지 못했다. 예를 들어 본다.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다가도 발걸음을 멈추고 하릴없이 식물에 눈길을 준다. 아프고 쓸쓸한 인간사와 무관하게 자기 때를 살아가는 푸나무들의 늠연한 자태가 사뭇 당당하다. 불꽃처럼 피어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지만, 꽃 시절이 지나간다 하여 는적거리지 않는다. 때가 되면 시들어 땅에 떨어질 뿐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열매를 맺는다. 그 홀가분한 순환을 보면서 유정한 나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푸나무, 늠연한, 는적거리다, 유정한 등등이 예쁜 말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진정한 자유인은 자신의 삶 전체를 탁월로 변모 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에 언제나 겸허하고 겸손하며, 경외할 줄 안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의 특장의 '서슴없음'이 아니라, '머뭇거림'이다. 서슴없음과 당당함은 자신을 강자로 여기는 이들의 한결같은 태도이다. 이기심과 결합되면 몰염치함으로 변질된다. 몰염치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김기석 목사님에게서 배웠다. 시몬느 베이유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서로를 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머뭇거림이라고 말했다 한다. 가속화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머뭇거림은 답답함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머뭇거림 속에는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하거나, 응대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다. 지나칠 정도로 단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확신은 고단한 생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둥이지만, 그 확신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성에 갇힐 때는 아집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가면서,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붙잡아야 한다. 온기가 담기지 않은 말을 내려놓고 혐오감을 드러내는 일을 삼가고, 다른 이들을 위해 좋은 것들을 남겨둘 줄만 알아도 삶이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무소유(無所有), 무아(無我, I'm nothing)에서 무(無) 자를 ‘없다’는 의미의 명사가 아니라 ‘지운다’는 의미의 동사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냥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비우거나 버리는 거다.
라벨: 2021년 5월 사진과시 그리고 글 복합와인문화공간 뱅샾62 인문운동가 박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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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표 교수 |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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