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함을 동양적 사유로 말하면, 덕(德)이 아닐까? 내 생각으로, '덕'은 '도(道)가 실제 삶에 구현된 것'이고, 이를 그리스어로는 '아레떼'라고 하는 것 같다.
젊은이들이 공정성에 모든 것을 올인한다는 것은 이미 미래를 상실한 증거이다. 공정성 문제는 공정성이나 제도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파이를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안목이 중요하다고 본다. 안목(眼目)을 사전에서는 "사물의 좋고 나쁨 또는 진위나 가치를 분별하는 능력"이라 정의한다. 안목과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머리'는 "어떤 일의 내용, 방법, 절차 따위의 중요한 줄거리"로 정의된다. 그렇지만 안목과 일머리는 한통속이다. 안목이 있어야 '일머리'를 안다. 물론 여기에 필요한 것이 자기 신뢰와 그 일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축적되어야 한다.
배철현 선생은 "안목은 대상을 눈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라 했다. 말 그대로 하면, '안목'은 '눈의 눈'이지만 말이다. 안목은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울리는 것, 좀 촌스럽게 말하면 가슴이 벌렁벌렁하게 하는 것과 조우(遭遇, 우연히 서로 만남)하여 매료당하는 끌림이다. 그 속에서 정색을 하고 홀로 좌정하여, 자신에게 진실한 것만이 진정 진실하다고 확신할 때 그 안목이 힘을 발휘한다.
자신에게 진실한 것만이 진정 진실하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아도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왜? 그게 이득이 되니까. 그게 평판이 좋아지니까. 난 그런 거짓을 싫어한다. 좋은 게 그냥 좋은 건 아니다. 그걸 부정하고, 진실을 추구해야 내면에 '덕(德)'이 쌓인다. 그 덕이 내적으로 충만해지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밖으로 드러난다. 그걸 장자는 "덕충부(德充符)"라 했다. 어제(5월 15일) <인문일기>에서 말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 인간이란 (1) 늘 탁월함을 생각하고, (2) 자신과 이웃을 성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여기서 '탁월(卓越)하다'는 '남보다 두드러지게 뛰어나다'로 사전은 정의한다. 탁월함을 동양적 사유로 말하면, 덕(德)이 아닐까? 내 생각으로, '덕'은 '도(道)가 실제 삶에 구현된 것'이고, 이를 그리스어로는 '아레떼'라고 하는 것 같다. 어쨌든 '각자에게 주어진 잠재력을 최대한도로 발현된 것'을 '아레떼', '탁월함', '덕'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 탁월함은 그냥 아무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각각에게 해당되는 (1) 짜임새 있는 배열(taxis)-질서 (2) 올바름 (orthotes) (2) 기술(techne)을 통해서 탁월해진다고 한다. 탁월함에 왜 질서가 필요한가? 질서에서 절제가 나오기 때문이다. 탁월함은 절제에서 나온다. 기술, 테그네라는 말이 나온다. 어쩌면 최고의 기술이 예술이기 때문이고, 기술과 예술은 하나이기 때문 같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 필멸성이 동물상태의 인간을, 영원을 희구하는 신적인 인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런 여정에서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377)는 부모로부터 의술을 배웠고, 그것을 처음으로 체계화하여, 의사가 되려는 학도들을 위한 '교본'을 만들었다. 전쟁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을 치료하면서 시간의 시급함과 응급처치의 중요성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의 의학 교본에 등장하는 '격언집'(Aphorismi)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인생은 짧고 기술은 길다. 위기는 쏜살처럼 달아나고 경험은 위험하고 결정은 어렵다. 의사는 '자신에게 옳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환자, 간호원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인생이 짧으니, 자신에게 "옳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다른 이들과 협력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짧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며 심판을 하는 시간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강물이 흘러가듯 항상 저만치 달아나버린다. 우주가 빅뱅으로 탄생한 137억 년 전이나 이 글을 쓰기 시작한 1시간 전이나,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순간이다. 인생은 허약하고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다. 그런 삶을 연장하는 열쇠가 '기술'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테크네'가 나온다. 여기서 '기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테크놀로지'(technology)의 나온다. '테크네'는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을 하나로 엮어 상상하지도 못한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는 솜씨'다. 이건 안목에서 나온다. 배철현 선생은 지구와 동식물을 살리는 물은 수소 2개와 산소 하나의 절묘한 결합이며 정반대 것들, 즉 암수의 결합으로 창조된 모든 생물이 그 예들이라 말했다.
로마로 와서, 호라티우스는 히포크라테스의 문장을 라틴어로 'vita brevis ars longa(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로 번역하였다. 그는 그리스어 '테크네'를 라틴어 '아르스'로 번역하였다. 예술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아트'(art)의 어원이다. 여기서 예술은 우리가 흔히 아는 예술을 포함한 모든 기술을 의미한다. 예술은 어떤 분야든지 최선의 경지를 지칭하는 용어다. 예술가는 그 순간에 몰입하여 이질적인 것들에서 최고를 선택하여 표현하는 사람이다. 몰입하지 않는 기술이나 예술은 없다. 예술이나 기술은 몰입하여 이질적인 것들에서 최고를 선택하는 수고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21세기 문명의 기반인 최첨단 기술은 고독을 통한 그의 심오한 통찰이 만들어낸 예술"(배철현)이라 했다.
그러니까 ‘예술’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 ‘아르스ars(그리스어 테크네, 기술)’의 의미는 ‘우주의 질서에 알맞게 만물(萬物)을 정렬시키다'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렬시키는 일이 '배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을 지배하며, 몇 가지 삶의 규칙을 가지고 '지금-여기'의 삶을 정돈하는 사람은 모두 예술가이다. 그냥 충동적으로, 감각적으로 살면서 무질서한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가는 시간 있다고 TV만 보거나 잠을 자지 않는다. '저 너머'를 꿈꾼다. 생존만을 위한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인문운동가도 예술가이다. 인문운동가로서, 나는 사람들에게 흔히 말하는 쓸데없는 일을 궁금하게 만들어 주려고 노력한다. 먹고 사는 일 이외에의 것들에 관심을 갖게 하고 싶다. '테크네'와 ‘아르스’는 하찮아서 잘 보이지 않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솜씨 있게 엮어내는 기술이다. 마치 그 솜씨가 어머니가 담근 김장김치 맛처럼, '테크네'와 '아르스'는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경험이 만들어 준 최적화된 간결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과 예술은 실패라는 경험들이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결합할 때, 슬그머니 나오는 감동이다. 나는 주변의 기술자들에게서는 그 감동을 보았다. 그러나 주변의 예술가들에게서는 그 감동을 보지 못하고 있다. 물론 내 안목이 문제일 것이다.
나이는 마음의 상태일 뿐이다. 물리적 나이가 청춘이어도 마음이 늙어 있으면 늙은 것이고, 마음이 나이가 장년기에 접어들었어도 어린이와 같은 천진난만함과 호기심을 유지하고 있다면 아직은 청춘이라고 규정한 시가 있다. 오늘 그걸 공유한다.
청춘/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미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를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십의 청년보다
육십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력이 땅으로 떨어질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육십 세이든 십육 세이든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놀라움에 끌리는 마음,
젖먹이 아이와 같은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
삶에서 환희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법이다.
그대와 나의 가슴속에는
남에게 잘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간직되어 있다.
아름다움, 희망, 희열, 용기
영원의 세계에서 오는 힘,
이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는 젊음을 유지할 것이다.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냉소라는 눈에 파묻히고
비탄이란 얼음에 갇힌 사람은
비록 나이가 이십 세라 할지라도
이미 늙은이와 다름없다.
그러나 머리를 드높여
희망이란 파도를 탈 수 있는 한
그대는 팔십 세일지라도
영원한 청춘의 소유자인 것이다.
윤정구 교수님의 담벼락을 보고, 아침 내내 굵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 특히 다음 내용이다.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지낼 때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우제를 지켜보던 인디언 꼬마는 어른들의 게으름에 항의하기 위해 우비를 입고 기우제에 나타났다. 이유는 기도를 통해 비가 올 것이라는 인디언들의 공동으로 구성한 정신모형의 지도를 믿고 있다면 반드시 비가 올 것이므로 우비를 입고 나타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른들이 항상 같은 복장으로 기우제에 나타나는 것은 자신들이 열심히 기도는 하지만 자신들의 기도에 믿음의 뿌리가 없었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어린 인디언이 보기에도 믿음이 없는 기도는 그냥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만났던 공동체가 그런 모습이었다. 물론 나부터 그러해야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래 나는 거기서 빠져나와, 다시 그런 공동체를 찾을 생각이다.
윤정구 교수님에 의하면, 기도가 세상을 바꾸는 원리는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가 물꼬가 되어 이 기도를 실현시킬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일머리가 있다. 그냥 기도만으로는 안 된다. 윤 교수는 "기도를 통해 세상이 만들어지는 원리는 말그대로 제심합력을 통해서"라고 말했다. "제심합력", 잘 모르는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한문으로 다음과 쓴다. 齊心合力. "많은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노력(努力)한다"는 뜻이다. '제심(齊心)'에 방점을 찍고 싶다. 제가 '가지런할 제'자이다. "만물제동(만물제동)"을 말하는 <장자>의 "제물론"도 이 한자와 같다. '제'는 고르게 한다는 말이다. '제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로 한다'는 것이다. 영어로 하면, either, or(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both, and(양쪽을 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쪽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다 보아야 한다.
무슨 일을 하려면, 우선 '제심'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생각을 고르게 하여야 한다. 이는 온라인으로만 소통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휴먼 터치(human touche)'가 필요하다. 첨단 기술이 발전할수록 역설적으로 사람의 따뜻한 감성이 더욱 중요해지는 트렌드를 일컬어 '휴먼 터치'라고 명명한다. 휴먼터치는 기술이 인간을 흉내 내거나 대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술이 무한대로 발전해 나가더라도 그 안에 "인간의 손길은 언제나 필요하다"는 점이 오히려 핵심이다.
이런 휴먼 터치 속에서 '제심합력'을 동원하려면, 공동의 정신모형을 만들어야 한다. 그 정신모형의 중심에는 선한 세상에 대한 염원인 목적과 사명의 스토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 이 목적과 사명에 대한 믿음 필요하다. 그 믿음이 우리의 일상의 삶과 만나 우리에게 희망이 전달되면, 그것이 소명이 된다. 이러한 소명을 받아 미래를 향한 삶의 동력을 받는 동안 우리는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게 나이와 상관없이 사는 청춘이다. 그러니까 청춘이란 미래를 염두에 둔 상상체험으로 죽음이 현재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운명을 연기시키는 방식이다.
우리 사회의 위기는 미래의 상실에서 온다. 젊은이들이 공정성에 모든 것을 올인한다는 것은 이미 미래를 상실한 증거이다. 공정성 문제는 공정성이나 제도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파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믿음과 이 믿음을 현실화하는 실험인 혁신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윤정구 교수의 멋진 통찰이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젊은이들이 공정성과 집과 주식에 '영끌한다'는 것은 이미 젊은이들의 정신모형 속에 미래가 지워졌다는 표시이다.
정신모형 이야기를 좀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는 마음속에 무의식적으로 그려져 있는 지도를 정신모형이라고 했다. 이 정신모형에 새겨진 상태로 자신의 삶의 무늬를 판단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획득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칸트는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반영한 지도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미래를 염두에 두고 미래의 개념을 반영한 지도를 구성해 낸 사람들을 구별했다. 우리가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현실과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서 미래의 개념을 구성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고 이 지도의 설계대로 세상을 만들어 간 선구자들의 피와 땀 때문이라고 보았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담론이 아니라, 미래의 개념을 구성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고, 그 지도의 설계대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실천이 반드시 담보되어야 한다. 말로만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들의 이야기는 최근 뇌과학이 입증하고 있다. 뇌과학자들에 의하면, 세상을 만들어내는 기제인 정신모형이란 시낸스 네트워크 패턴 지도이고, 이 시냅스의 지도는 과거, 현재, 미래를 구성할 수 있는 시간 여행 능력에 의해서 변화한다고 했다. 그리고 뇌의 맹점은 실제 경험과 상상적 경험을 구별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윤정구 교수에 의하면, 상상임신이나 피그말리온 효과나 자기 완성적 예언 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은 다 뇌가 상상적 경험과 실제 경험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뇌가 구성되고 믿은 현상에 맞춰 몸에 호르몬 반응을 명령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개인이 미래에 대한 상상적 체험을 하고 세상을 이 상상적 체험의 성공 도식으로 보기 시작한다고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도를 그리고 그 설계대로 세상을 만들어 가려는 구체적인 시도가 뒤따라야 한다. 윤 교수에 의하면, 한 개인의 선구적 상상은 그냥 현실의 단단한 바위에 씨알 한 톨을 뿌린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본다. "현실은 같이 살고 있는 구성원들의 정신모형들이 세상의 운동장에 모여 협상과 암묵적 합의를 통해 상호주관적으로 구성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혁신적 미래를 구성하는데 성공해도 다른 사람이 이것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절대로 현실이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은 현실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 이런 전쟁은 사람들 마음에 회복이 어려운 깊은 상처만을 남긴다." 중요한 이야기이다. 특히 마을 활동을 하려면, 서로 '제심합력'으로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러려면 같이 모여 협상과 암묵적 합의를 통해 상호주관적으로 정신모형을 만들고, 각자 할 일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 그 속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다 청춘일 수 있다.
라벨: 2021년 5월 사진과시 그리고 글 복합와인문화공간 뱅샾62 인문운동가 박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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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표 교수 |
박한표 교수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
공주사대부고와 공주사대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석사취득 후 프랑스 국립 파리 10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 문화원 원장, 대전 와인아카데미 원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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